[인-잇] '조국 논란' 와중 멀어진 친구, 뭐가 문제였을까?

이혜진 | 해냄출판사 편집주간

SBS 뉴스

작성 2019.10.19 11:01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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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인-잇] 조국 논란 와중 멀어진 친구, 뭐가 문제였을까?
화이트보드 위에 누군가의 고민들이 적혀 있는 쪽지가 여러 개 붙어 있다. 읽어가다 보면 왠지 나에게 유난히 꽂히는 고민이 들어오고, 거기에 내 번호를 적는다. 이제 그 고민을 적은 이와 짝이 되어 100분간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는 시간을 갖는다. 테이블에 앉아서 처음 보는 이와 낯선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서 서울숲을 천천히 산책하며 깊은 마음을 나눈다.

얼마 전 한 단체에서 진행하는 '속마음산책'이라는 프로그램을 참관하게 되었다. 여기에선 자신의 고민이나 괴로움을 나누는 이를 '화자'로, 누군가의 고민을 공감하기 위해 온 이를 '공감자'로 역할을 나누어 사전 신청을 받는데, 마침 현장에서도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공감자'가 되는 일이 왠지 부담스러워 일단 '화자'로 신청을 했다. 내 이야기를 실컷 하고 싶은 욕심도 사실 있었다.

본격적인 산책이 시작되기 전, 공감자들을 위한 사전 교육이 진행되었다. 며칠 전부터 마음을 가다듬고 관련한 책도 보고, 나름 준비와 각오를 한다 해도 오롯이 누군가의 인생 이야기에 공감을 한다는 일은 큰 부담이 따른다. 정현종 시인의 시구처럼 '사람이 온다는 건…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엄청난 일이니까.

깊이 공감을 하러 왔지만 오히려 말실수를 해서 그에게 상처를 주진 않을지, 막상 들어보니 그의 이야기가 내 가치관과 달라 제대로 공감할 수 없으면 어떡하나, 내가 겪어보지 않은 고통에 그저 듣기만 해서 되는 것인지 염려됐다. 타인의 마음 속살에 다가가는 일이 어찌 쉬울까. 사전교육 시간에는 이런 부담이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도록 충분한 설명이 오갔다.

그중에서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 할 점은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을 내려놓는 것, 피상적으로 듣는 것이 아닌 '온 체중을 실어'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러한 태도가 화자에게 전해지기만 해도 화자는 안전함을 느끼고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놓게 된다.

드디어 실전의 시간. 내 이야기를 하고 또 상대의 이야기도 듣고 하다 보니 산책 종료 시간을 알리는 문자가 온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의 얼굴에 시작할 때의 긴장감은 사라지고 환한 미소가 어려 있다. 어떤 이는 눈가가 붉다. 오늘 산책이 어땠는지, 소감을 나누며 정리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내 생각, 내 판단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존재에 온전히 집중하는 일의 놀라운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자리였다.

깊은 대화 후 한껏 넉넉해진 마음으로 단체에서 선물로 준 장미 한 송이를 든 채 집에 오는 길, 문득 몇몇 얼굴이 떠올랐다. 이번 가을,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둘러싼 혹독한 논쟁과 갈등 속에서 서걱서걱 심리적 거리가 벌어져 버린 친한 지인들이었다.

각자가 SNS에서 혹은 사석에서 꺼내놓은 입장과 시선에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는가 보다' 덤덤한 마음이었다가, 점차 당황스러움으로, 분노로 변해갔다. 아니 이런, 이 사람 이렇게 안 봤는데!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온 십수 년간의 추억과 인연도 무용지물이었다. 둘 사이의 문제로 핏대를 세우며 싸운 것도 아닌데 SNS에 올린 몇 줄의 문장, 나와 생각이 다른 문장들이 마치 나를 공격하는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을 주변에 토로하니, 듣고 싶지 않고 보고 싶지 않아 차단 버튼을 누르거나 단체 채팅방을 나와 버렸다는 이들이 꽤 많았다. 정치적 생각이 달라 친한 관계까지 깨져버린 셈이다. 속마음산책의 정리 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 중 한 분의 이야기가 계속 맴돌았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겉으로만 들었는지 새삼 알게 되었어요. 무엇보다 저랑 생각이 다른 친구들하고도 이런 시간을 경험해보고 싶어요. 지금까진 비난하기 바빴지만 이런 자세로 듣게 된다면 서로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감정 상하지 않고 더 잘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치적 의견을 말하고, 지향을 드러내는 일이 내면의 상처나 고민을 나누는 일과 같을 수는 없다. 각자의 살아온 배경과 이해관계와 정보가 첨예하게 뒤얽혀 금세 날이 서곤 한다. 아니 어쩌면 그렇기에 우리에겐 온 체중을 싣지는 못하더라도 더 섬세하게 충조평판을 내려놓고 그에게 귀 기울이려는 태도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 억지스러운 동의와 공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중한 관계를, 그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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