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북적] 지금, 여행을 떠나요! 내 방으로!!…내 방 여행하는 법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작성 2019.10.13 07:35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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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211 : 지금, 여행을 떠나요! 내 방으로!!…<내 방 여행하는 법>

"정해진 길을 고집하지 않고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듯 자신의 상념을 쫓는 것보다 더 매혹적인 일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내 방 여행을 하면서 곧바로 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탁자에서 시작해 방구석에 걸린 그림 쪽으로 갔다가 에둘러 문 쪽으로 간다. 거기서 다시 탁자로 돌아올 요량으로 움직이다가 중간에 의자가 있으면 그냥 주저앉는다. 의자란 얼마나 훌륭한 가구인가."

자, 이건 도대체 뭐에 관한 글일까요. '의자란 얼마나 훌륭한 가구인가' 라니 의자 예찬론 싶기도 하고 듀*백 의자 광고 카피로 써도 될 것 같습니다만 실은 '내 방 여행자'의 고백 같은 이야깁니다. 고작 해서 방 안에서 이동하다가 중간에 의자 있으니 주저앉아 쉬는, 이 소심한 호쾌함! 방이 얼마나 넓기에 이러고 있나, 혹은 얼마나 게으르기에 기껏 방에서 도중에 쉬어가나 실소가 나옵니다.

요즘 여러모로 갑갑한 마음에 여행 가고 싶은 사심을 가득 담아 여행에 관한 책을 골라왔습니다. 조금은 특이하게 200년 전 여행,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가 쓴 <내 방 여행하는 법>입니다.

1763년 태어난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소설가이자 군인으로, <방 속의 수상(隨想)>(1794) <아오스테시(市)의 문둥이>(1811) <코카서스의 포로>(1815) <젊은 시베리아 처녀>(1825) 이런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보수 전통주의 사상가인 조세프 드 메스트르의 동생이기도 한데, 조세프는 "모든 나라는 그에 마땅한 정부를 갖는다"는 말의 저작권자로 알려져 있다는군요.

이 책은 여행에 관한 책인데, 의자 예찬은 왜 나왔는가 하면 제목 그대로 '내 방'을 여행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이긴 합니다만, 이보다 70-80년 뒤에 80일 동안 세계일주를 하는 필리어스 포그도 있는데 그자비에가 그 절반인 기간에 돌아본 건 그의 방입니다.

그자비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재미있습니다. 37살 때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어떤 장교와 결투했는데 그 벌로 무려 42일 동안 가택 연금을 당합니다. '비자발적 방콕' 처지가 된 그자비에는, 심심했겠죠, 무료함을 달래려 머리 굴리다 이 책을 썼다는 겁니다.

"세상에서 벗어나 은둔할 골방조차 없는 비참한 처지의 사람들이라면 혹 모르겠으나 그런 골방만 있으면 우리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게 다 갖춰진 셈이니 말이다. 어떤 성격과 기질을 타고났듯,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 여행법에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구두쇠 건 헤프 쟁이 건, 가난 뱅이 건 부자건, 나이가 적건 많건, 열대지방 사람이건 극지방 사람이건 간에... 요컨대 이 땅에 모여 사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특히 방에 죽치고 있는 이들 가운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소개하는 새로운 여행법을 거부할 이는 단 한 명도 없으리라."

"아픈 사랑과 무심한 우정에 홀로 방구석에 처박힌 그대여, 보잘것없는 헛된 세상사를 털어 버리고 떠나자! 슬프고, 아프고, 외로운 세상 모든 사람이여, 나와 함께 떠나자! 게으른 자여, 그대도 일어나 함께하자! 사랑의 배신을 겪고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과 담을 쌓으려는 음울한 생각으로 가득한 그대여, 밤의 상냥한 은둔자로 세상과 인연을 끊고 규방에 평생 틀어박힌 그대여, 그대들도 오라! 나를 믿고 그 음침한 상념을 떨치고 오라!"

"요컨대 인생의 절반이 고통으로 점철돼 있다면, 나머지 반은 이 감미로운 침대에서 잊고 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나의 뇌리를 채우고 있는 이 희비의 정체는 무얼까? 고통스러우면서도 달콤한 기분이 드는 이 야릇함은."

"행여 내가 이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 상황에 몰려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내게 소중한 모든 것을 걸고 단언컨대, 42일간 내 자유를 앗아간 그 일이 터지기 훨씬 전에 난 이 여행을 궁리하고 있었다. 어쩌다 가택 연금을 당하여 예정보다 일찍 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뿐이다.


....

"오늘 나는 자유다. 아니 다시 철창 안으로 들어간다. 일상의 멍에가 다시 나를 짓누를 것이다. 이제 나는 격식과 의무에 구애받지 않고는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변덕스러운 여신이 있어 내가 경험한 이 두 세계를 다시는 잊지 않도록 해 주고, 다시는 이 위험한 연금에 연루되지 않도록 해 준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금지된 결투를 감행한 벌로 가택 연금을 당했던 처지에 정신 승리가 이만저만 아닙니다. 그러다 연금에서 해제된 뒤에는 오히려 철창 안으로 들어간다, 일상의 멍에가 나를 짓누를 것이라는 소회에 이르면... 아, 세상은 그런 곳이었지 하는 묘한 공감마저 드네요. 강제로 떠나게 된 42일 내 방 여행이지만, 여행의 즐거움이란 꼭 새로운 지역과, 풍경, 새로운 사물에서만 오지 않는다는 것, 선입견 떨치고 긍정적으로 상황의 다른 면까지 관조할 수 있는 활짝 열린 눈이 있으면 그걸로 족할 수 있다는 것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원래는 이 책을 세상에 선보일 생각이 없었는데 그의 형에게 한 번 읽어보라고 보냈다가 형이 아무 말 없이 익명으로 출간해버렸다는 후일담도 재밌습니다. 저를 포함한 '방구석 여포'들이 너무 많은 요즘이라 그런지 이런 허풍과 허장성세마저 더 귀엽고 반갑네요.

이번에 다시 읽으며 알았습니다만, 속편 <한밤중, 내 방 여행하는 법>도 있다고 합니다. 이 여행은 4시간짜리라는데요, 당시에도 변화의 속도란!

*유유출판사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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