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썩은 동아줄'이 되어버린 교육과 입시

김지미 | 영화평론가

SBS 뉴스

작성 2019.10.05 11:0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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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는 보호자 없이 친구들끼리 극장에서 본 첫 영화였다. 중학생이었던 우리는 중간고사인지 기말고사인지를 마치고 바로 극장으로 달려갔다.

사슴 같은 눈망울의 이미연이 전교 6등 성적을 받고도 엄마에게 닦달을 당하는 장면에서 같이 한숨을 쉬었고, 전교 17등으로 밀려났다고 절망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에서는 내 일이라도 된 양 통곡했다. 극장 밖을 나와서도 왜 우리는 한국에서 태어나 이렇게 고생이냐며 한탄했다. 매년 보도되는 학력고사장 풍경과 가족 중에 고3이 있으면 숨도 크게 쉬면 안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중학생이었던 우리조차 미리 기죽게 했던 시절이다.

그다음 해에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면서, 어쩌면 고달픈 건 우리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이상한 위안을 받았다. 영화 속 이야기가 미국의 부유층만 다니는 기숙형 사립학교의 특수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와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며 같이 울고불고했던 학생들은 이제 학부형이 됐다. 영화 속 주인공들을 자살로 몰고 갔던 공부에 대한 압박도 한편으로는 옛날이야기가 됐다. 물론 아이들이 성적에서 벗어나 행복해진 것은 아니다. 공부 말고 챙겨야 할 일이 더 많아졌을 뿐이다. 게다가 뉴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부모의 권력과 재력이 그 일들을 챙기는 데 큰 몫을 한다.

지옥 같았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시대였지만, 차라리 그때가 나았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일등부터 꼴등까지 성적표를 붙여놓고, 성적을 기준으로 매질과 모욕을 일삼던 그때가 지금 이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지나치게 복잡하고, 부모의 능력이 학생의 스펙으로 합법적으로 치환되는 지금의 입시에 대한 환멸이 그만큼 심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태국 영화 <배드 지니어스>는 근간의 교육 현실을 범죄 스릴러의 극적 긴장감 안에 녹여냈다. 천재적인 학습능력 덕분에 명문 사립학교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하게 된 주인공 린은 절친인 그레이스가 성적 하한선 때문에 교내 연극에 출연할 수 없을까 걱정하는 것을 보고 커닝을 도와준다. 작은 호의로 시작된 이 일은 린의 남자 친구인 부유층 자제 팟까지 끼어들면서 조직적인 커닝 사업으로 변하게 된다.

팟의 성적이 향상된 원인에는 관심이 없고 결과에만 한껏 고양된 그의 부모는 미국 유학을 보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압박을 시작한다. 팟과 그레이스는 린에게 미국 대학 입시까지 도와줄 것을 부탁하며 더 큰 사례를 약속한다. 가진 것이라고는 좋은 머리밖에 없는 린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같은 학교 친구 뱅크까지 설득해 억대에 이르는 미국 대학 입시문제 유출을 기획한다.

실제 SAT 문제 유출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이 영화는 입시 부정 사건을 긴장감 있는 범죄 스릴러로 그려냈다. 그런데 보통의 범죄 스릴러가 완전 범죄로 쾌감을 주거나 권선징악적 결말로 도덕적 교훈을 주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을 보는 마음은 묘하게 서럽다. 범죄를 저지르는 주체도, 그 결과로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되는 이도 결국은 가진 것 없는 계층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왜 그토록 총명한 아이들이 도덕적 타락을 택했는지 따져볼수록 마음이 답답해진다. 그레이스가 순진한 얼굴로 린에게 자기 남자 친구의 성적 향상이나 대학 시험을 부탁할 때, 양심의 가책이나 돈의 유혹 때문에 괴로운 것은 가진 것 없는 주인공뿐이다. 가진 것이 많은 이들에게 교육은 성공한 삶을 위해 갖출 수 있는 여러 가지 옵션 중 하나일 뿐이지만 린이나 뱅크에게 그것은 성공을 위한 유일한 사다리다. 부유한 아이들은 린과 같은 아이들이 그 거래를 위해 무엇을 걸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배드 지니어스>의 결말에서 린이 금전적 보상보다 양심을 택하기로 했을 때 우리는 도덕적 각성이나 위안을 얻기 어렵다.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곤 학력뿐일 린의 고백이 그녀의 미래에 치명상을 입힐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반면 그녀의 부유한 친구들은 찰과상 정도만 입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교육 문제는 곪은 곳이 어딘지 모두 알지만 완벽한 치유책을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더 갑갑하다. 지금도 우리는 린의 그 부자 친구들이 현실에서 벌이는 드라마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지 않은가?

(사진=영화 <배드 지니어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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