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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무한경쟁 시대를 달리는 앨리스

서메리 | 작가 겸 번역가.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저자

[인-잇] 무한경쟁 시대를 달리는 앨리스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수학자 겸 작가인 루이스 캐럴이 1872년 발표한 아동문학 소설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후속 편이다. 전작에서 말하는 토끼를 따라갔다가 땅속 나라로 떨어졌던 일곱 살 소녀 앨리스는 원래 세계로 돌아온 지 겨우 6개월 만에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 새로운 모험을 겪는다.

루이스 캐럴이 그려낸 거울 뒤편의 세상은 거울 앞쪽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마법과 신비가 가득한 별세계다. 호기심 충만한 소녀 앨리스는 살아 움직이는 체스 말과 수다쟁이 장미꽃 등 온갖 신비로운 생물과 대화를 나눈 끝에 '하얀 나라'와 '붉은 나라'가 벌이는 체스 경기에서 이기면 여왕이 될 수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된다. '여왕'이라는 달콤한 목표에 홀린 그녀는 겁도 없이 출사표를 던진다.

칸과 칸 사이가 너무 넓어서 기차를 타거나 시냇물을 건너야만 이동할 수 있는 거대한 체스판을 누비며, 그녀는 이 세계의 물리 법칙이 현실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예를 들어, 붉은 나라의 수장인 붉은 여왕은 경기 규칙을 설명하다 말고 느닷없이 앨리스의 손을 잡아채더니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숨이 턱까지 차도록 달린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맨 처음 출발했던 바로 그 나무 아래다. "이상해요! 우리 세계에서는 계속해서 빨리 달리면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고요!" 헐떡이며 외치는 앨리스에게, 붉은 여왕은 신기하다는 듯이 대꾸한다. "그것 참 느린 세계구나. 여기선 있는 힘껏 달려야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단다.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면 두 배는 빨리 달려야 해."

경기 중에 만난 하얀 여왕 또한 특이하긴 마찬가지다. 그녀는 이 세계의 기억이 미래와 과거 양쪽 방향으로 작용한다며, 자신은 미래의 기억을 근거로 아직 죄를 저지르지 않은 잠재적 범죄자를 잡아다 미리 벌을 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어떻게 기억한다는 거죠? 벌을 받은 사람이 실제로 죄를 짓지 않으면 어떡해요?" 앨리스가 묻는다. "그럼 잘 된 거지. 벌을 미리 받아서 죄를 짓지 않는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니?" 뭔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소녀는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다.

여왕들뿐만이 아니다. 체스판을 건너며 마주친 신비의 생물들은 하나같이 앨리스의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해댄다. 갑옷 차림의 체스말 기사는 미래에 만날 어떤 적도 무찌를 수 있도록 모든 대비를 갖춰야 한다며, 각종 무기와 쥐덫은 물론 벌을 잡기 위한 벌통, 상어를 쫓기 위한 강철 가시까지 달고 다닌다. 달걀 모양의 괴물 험프티 덤프티는 앨리스를 보자마자 "넌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어"라며 타박하더니, 적절한 도움을 받으면 얼마든지 노화를 멈출 수 있다고 일러준다.
서메리 인잇용
이 소설이 발표된 1872년 당시, 사람들은 현실에서 도저히 일어날 법하지 않은 희한한 일들을 상상해내는 작가의 창의력에 감탄하며 앨리스 시리즈에 열광했다. 그로부터 약 150년이 흐른 지금, 이 작품은 여전히 아이부터 어른까지 수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2016년에는 할리우드 스타 조니 뎁과 앤 해서웨이가 출연한 동명의 영화가 개봉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연극과 뮤지컬을 비롯하여 다양한 2차 창작물이 생산되고 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현대 독자들이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읽으며 느끼는 감상은 150년 전 최초의 독자들이 느꼈던 순수한 흥미와 사뭇 다르다. 우리는 거울 나라의 이상야릇한 물리 법칙을 보며 신기함을 뛰어넘는 묘한 친근감을 느낀다.

죽을힘을 다해 달려야 겨우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붉은 여왕의 조언이나 자신에게 상상만 가지고 누군가를 심판할 권리가 있다는 하얀 여왕의 거드름은 비정한 현대 사회의 현실을 상기시킨다(실제로 무한경쟁을 뜻하는 경영학 용어 '붉은 여왕 효과'는 이 책에서 유래한 것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목을 매는 체스말 기사나 나이듦을 비웃으며 노화를 멈추라고 말하는 달걀 괴물 또한 분명히 어디서 본 듯한 모습이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예언서나 미래 예측서가 아니라 판타지 요소가 가미된 아동문학 소설이다. 하지만 루이스 캐럴이 창조해낸 허구 세상의 풍경에서 범상치 않은 기시감을 느낀 사람이라면 이 작품의 결말 부분에도 주목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앨리스는 마법의 체스판을 가로지르는 고된 여정 끝에 그토록 원하던 황금 왕관을 손에 넣는다. 하지만 목표 달성의 보상으로 주어진 것은 영원한 행복이 아니라 점점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초조함과 혼자만 뒤처지고 있다는 박탈감뿐이었다. 결국 그녀는 여왕의 권위를 내던지고 사랑스러운 고양이와 소박한 벽난로가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짜 행복을 찾는다.

우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남들보다 두 배, 세 배 빨리 달려서 체스판을 가로지르는 삶에 익숙해졌다. 그 과정에서 현재를 무시하고, 미래에 짓눌리고, 덧없는 세월을 탓하며 나이듦을 회피하려 한다. 하지만 그 끝에 있는 목표를 정확히 알고 달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무엇보다, 그렇게 해서 손에 넣은 목표가 정말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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