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북적] 17년 만에 돌아온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 - 테드 창 숨

권애리 기자 ailee17@sbs.co.kr

작성 2019.09.03 16:32 수정 2019.09.20 13:37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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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205 : 17년 만에 돌아온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 – 테드 창 <숨>

"이것은 손님께 보여드리려는 것의 서막에 불과합니다." 바샤라트는 저더러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고 한층 깊숙한 곳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방 한가운데에 원형의 문이 서 있었습니다."

이번 주 <북적북적>에서는 "현존하는 최고의 SF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그 사람, 테드 창의 두 번째 작품집 <숨>에서 한 편을 읽었습니다. <숨>은 2년에 한 편꼴로 과작하는 단편 작가로도 유명한 그가 17년 만에 내놓은 정식 작품집입니다. 테드 창이 2000년 이후 발표한 중·단편 9편이 모였습니다.

테드 창은 우리나라에선 지난 2017년 초 개봉한, 충격적으로 신선한 SF 영화 <컨택트>의 원작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쓴 사람입니다. (혹시 아직 <컨택트>를 보지 않으신 분이라면, 뭔가 새로운 재미, 신선한 자극을 받고 싶은 날 한 번 찾아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날, 혹은 그 후로도 한동안, <컨택트> 한 편으로 그 욕구가 충분히 채워질지도 모릅니다^^)

테드 창의 작품을 처음 읽고 들었던 생각은 '영국이 201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즈오 이시구로 보유국이라면, 미국은 테드 창 보유국이구나'였습니다. 누구랑 굳이 비교하거나 따지고 싶었던 게 아닙니다. 책 한 권을 읽고 나서, 몇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완벽한 정찬, 흠잡을 데 없는 풀코스 디너를 마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그 느낌이 비슷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맛, 서비스, 분위기뿐만 아니라, 함께 했던 사람, 나눴던 웃음 같은 것들까지 총체적으로 환상적인 포만감이 들어서 몸과 마음이 듬뿍 충족될 수밖에 없었다... 는 그런 느낌 말입니다. 특유의 우아하고 서정적인 분위기, 깊고 날카로운 시각을 펼쳐 보이는 과정 자체가 매혹적인 그 분위기도 왠지 이시구로를 떠올리게 하고요.

그런데 테드 창에겐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물리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공대생' 출신으로서, 자신이 써내는 SF의 근간이 과학적으로도 논리적 모순이 없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 치밀함까지 갖춰 지적 포만감을 더한다는 겁니다.

"바샤라트는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현실의 피막에는 마치 나무에 난 벌레 구멍 같은 미세한 구멍들이 뚫려 있다고 했습니다. 일단 그 구멍을 찾아내면, 유리 직공이 녹은 유리 덩어리를 잡아끌어 목이 긴 파이프로 바꾸듯이, 그 구멍을 넓혀 길게 끌어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한쪽 부리의 시간을 마치 물처럼 흐르게 하고, 반대쪽 부리에서는 그것을 시럽처럼 걸쭉하게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숨>에 실려있는 첫 번째 단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작품은 마치 세헤라자드가 들려주는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시대 불명의 아라비아 상인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형식을 취해 철학적이고 환상적인 시간여행을 그려냅니다. 시간의 상대성과 타임워프 이론의 근간을 이 구절처럼 쉽고 맛깔스러운 몇 개의 문장으로 단숨에 설명해 내는 대목들에서 저도 모르게 나오게 되는 감탄은 거의, 쾌감에 가깝습니다.

"포옹을 한 뒤 타히라가 말했습니다. "저를 위해 그리 큰돈을 지불하실 줄은 몰랐어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당신 없이는 즐거울 수 없어."
아지브는 자기 말이 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문득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당신에게 걸맞은 것들을 사줄 수 없을 거요."
"이제 더 이상 저를 위해 뭘 사주지 않아도 돼요." "


그의 작품들은 정서적으로 갑자기 의표를 찔러오는 방식으로 문학적 고양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사랑, 후회, 번민, 죄책감, 애착, 슬픔... 또는 이 모든 인간적 감정들에 대한 사근사근한 이해가 세상과 과학에 대한 다층적인 시각과 풍성하게 얽혀, SF에 대해서 보통 갖기 쉬운 선입견을 가볍게 뛰어넘는 '이야기'로서 충실한 재미를 보장한다는 겁니다. 테드 창은 단지 "현존하는 최고의 SF 작가"일 뿐만 아니라, 그냥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이 아닐까. <숨>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입니다. 이제 슬슬 장편을 써주면 어떨까, 하는 기대를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네요.

"바샤라트는 저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실은 최근에 그런 생각을 바꾸어줄지도 모르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외부인에게 보여주는 것은 손님이 처음입니다. 보고 싶으신가요?"

SF를 즐겨 읽지 않는 분께도 죄송함 없이 권해드릴 수 있는 책입니다. '참 좋은데, 뭐라고 설명할 말이 없네' 같은 기분이랄까요 ㅎㅎ

<북적북적>에서는 한정된 시간 동안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한 편 곳곳에서 발췌한 대목들을 읽었습니다. 보석 같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집 <숨>에는 이뿐 아니라, 펼쳐보지 않고는 내 것이 될 수 없는 9개의 보물이 들어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바람이 선선해지기 시작하는 이 가을의 초입, 슬슬 책 한 권 들어볼까 한다면! 바로 이 책이 맛있게 배부른 바로 그 한 권이 될 거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출판사 '북하우스'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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