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내 안의 데미안을 찾아서

서메리 | 작가 겸 번역가.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저자

SBS 뉴스

작성 2019.08.03 11:01 수정 2019.08.03 18:23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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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소년 에밀 싱클레어는 동네 일진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신세다. 친구들 앞에서 허세를 부린답시고 도둑질 경험이 있는 척했는데, 그 한 번의 실수로 또래 불량학생들의 우두머리 프란츠 크로머에게 약점을 잡혀버린 것이다. 크로머는 툭하면 "절도 혐의로 경찰에 신고해버린다"는 협박을 하며 돈을 가져와라, 누나를 데려와라 같은 온갖 부당한 요구를 해댄다. 정작 신고를 해야 할 피해자는 본인임에도, 어리고 순진한 싱클레어는 영악하고 폭력적인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시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거짓말이었지만, 그 끝은 상납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훔치는 진짜 범죄로 이어진다.

이렇듯 어두운 기억으로 얼룩진 소년기를 뒤로 한 채, 싱클레어는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의 김나지움(독일의 중등 교육기관)에 진학한다. 새로운 시작을 향한 열망이 지나쳤던 것일까? 아니면 가족도, 친구도 없는 곳에서 급작스레 찾아온 사춘기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한때 일진의 '빵셔틀'이었던 그는 어느새 앞장서서 술집에 출입하거나 담배를 피우고 반항을 일삼는 문제아 중의 문제아가 된다. 떨리는 손으로 저금통을 털어서 크로머에게 돈을 갖다 바치던 소년 싱클레어는 이제 자신의 술값, 담뱃값을 대기 위해 거짓 핑계로 부모님에게 돈을 뜯어내는 비행 청소년이 되었다.

행실 불량으로 퇴학 직전에 몰린 상황이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부모님을 사랑하고 선생님께 칭찬받고 싶은 순수한 아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겉으로는 세상을 비웃고 아무렇지 않은 듯 음담패설을 내뱉어도, 속으로는 자신이 욕하는 바로 그 대상을 향해 간절한 그리움을 느낀다. 길을 걷다가 깨끗한 옷을 입고 맑은 미소를 짓는 아이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의 눈에선 회한을 담은 눈물이 하염없이 솟아난다. 싱클레어는 꾀죄죄한 차림새로 싸구려 술집을 전전하는 지금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다. 담배를 끊고, 거짓말을 관두고, 공부와 독서와 산책을 즐기는 밝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하지만 길이 없다. 십 대 중반의 고독한 청소년에 불과한 그는 현실을 깨고 나갈 방법을 모른다.

지나고 보면 많은 일들이 이렇다. 미래의 관점에서 보면 별것 아닌데도, 그냥 터벅터벅 걸어 나가면 그만이었다 싶은데도, 정작 그 순간을 겪고 있을 때는 주어진 현실이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자 빠져나갈 수 없는 깊은 수렁처럼 느껴진다. 담배를 끊고 싶으면 끊으면 되지 않느냐고, 부모님께 사죄를 하고 싶으면 하면 되지 않느냐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남들 눈에는 어떨지 몰라도 당사자에게 그 상황은 세상의 전부이자 하나의 세계다. 다음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원래 있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과 혼란을 수반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싱클레어라는 한 소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치며 성장해나가는 사춘기 아이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두렵고, 외롭고, 앞이 보이지 않는 알 속 갇혀 저마다의 투쟁을 하고 있다. 알을 깨고 훨훨 날아가는 것은 모든 인간의 꿈이지만, 모두가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서, 때로는 방법을 찾지 못해서, 우리는 바깥에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좁다란 알 속에 주저앉곤 한다.
서메리 인잇_데미안 삽화《데미안》의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는 짧지 않은 고뇌와 고통스러운 투쟁 끝에 소년기의 나약함과 사춘기의 방황이라는 알을 깨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만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난 신비로운 전학생 데미안이 없었다면, 그는 좁고 어두운 과거의 세계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데미안은 강인하고 현명하며 다정다감한 친구다. 또래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성숙하고, 과거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세상 이치에 밝다. 싱클레어가 필요로 할 때는 반드시 나타나고, 어느덧 성숙해진 그가 홀로 설 수 있게 된 순간에는 타이밍 좋게 사라져준다. 신과 인간의 중간자적 존재라는 뜻을 갖춘 이름처럼, 데미안은 거의 초월적인 도움을 통해 알에 갇힌 친구를 넓은 세계로 인도한다.

안타깝게도 소설 밖 세상에는 데미안이 없다. 삶의 매 단계에서 지독한 혼란을 경험하는 현실의 싱클레어들이 시기적절하게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싱클레어와 같은 혼란을 겪지만, 데미안 없는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가혹하거나 너무 무신경하다. 삶의 부조리와 자신의 한계 속에서 답을 찾기 위해 발버둥 치는 타인의 모습은 '중2병'이나 '관심종자'같은 가벼운 말로 쉽게 폄하된다. 하지만 중2병을 겪는 이도, 그 모습을 비웃는 이도, 결국에는 자신의 알 속에서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 한 명의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다.

데미안은 없다. 천사 같기도 하고 악마 같기도 한 전지전능한 전학생이 우리 인생에 타박타박 걸어 들어와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편리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전쟁의 총성이 난무하는 《데미안》의 결말에서, 작가 헤르만 헤세는 우리에게 한 줄기 희망을 선사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그리고 서로의 데미안이 될 수 있다. 미숙한 자신과 타인의 모습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대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한 인간이 알을 깨고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도록 이끌어줄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원고를 집필하며 헤세가 하고 싶었던 말은 결국 이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싱클레어 안에는 데미안이 웅크리고 있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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