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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80년간의 인생 일주

서메리 | 작가 겸 번역가.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저자

[인-잇] 80년간의 인생 일주
요즘 학생들에게는 낯선 말이겠지만, 내가 한창 입시 준비를 하던 2000년대 중반에는 고등학생들이 이과 계열 학과를 멀리하는 '이공계 기피현상'이 심각한 사회 문제 취급을 받았다.

의대와 약대를 비롯한 일부 학과를 제외하면 소위 명문대라고 불리는 대학에서도 이과대 정원 미달이 속출했고, 신문에서는 과학기술 인력의 공백을 염려하는 기사가 연일 보도됐다. 실제로 한 학년에 총 12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던 우리 학교에서 이과 반은 고작 3개에 불과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나는 치열한 내신 관리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이과에서 문과로 전향했다. 전체 학생 수가 100명이 채 안 되는 이과에서는 전교 4등도 2등급을 받을 정도였다. 의대 진학이 어렵다면 차라리 문과로 옮기라는 주변 어른들의 권유가 이어졌다.

고민 끝에 나는 물리 교과서를 내려놓고 국사 교과서를 집어 들었다. 그럭저럭 입시를 치르고 지망했던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이 선택은 나름대로 현명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불과 몇 년 뒤, 나는 이공계 기피현상의 뒤를 잇는 인문학의 위기 한가운데서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를 외치는 인문대 졸업생 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치열한 노력과 눈치게임 끝에 당시로써는 최선의 결정을 내렸건만, 그 결과가 일자리 하나 변변히 구하기 어려운 사회의 잉여 인력이라니. 서류 전형에서 번번이 '광탈'을 맛보던 나와 동기들은 변변한 기술 하나 없는 신세를 한탄하고, 4차 산업혁명의 거대한 물결을 예측하지 못한 채 우리를 꾸역꾸역 문과로 밀어 넣었던 어른들을 원망했다.

하지만 이공계를 기피하던 과거의 사회 분위기는 그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의대 못지않게 높은 인기를 누렸던 공대의 위상은 IMF와 닷컴 붕괴를 겪으며 바닥에 떨어졌고, 건실한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모습을 코앞에서 목격한 사람들은 자연히 안전제일주의 노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시의 부모 세대가 자녀들에게 문과 선택을 종용한 것은 각종 고시나 공무원 시험을 포함한 '안정적인' 직업 선택의 기회가 더 넓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할 당시 우리를 자괴감으로 몰아넣었던 문·이과 문제는 그 이후 줄줄이 대기하고 있던 수많은 변수에 비하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취업과 이직, 퇴사, 결혼, 출산을 비롯한 온갖 문제 앞에서 끝없이 선택을 내려야 했고, 그중 상당수의 결정은 처음 계획과 전혀 다른 곳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몇 년간 취업에 실패했던 친구가 공무원 시험에 덜컥 합격하면서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일도 생겼고, 남들보다 빨리 취직에 성공했던 친구가 직장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사를 택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렇다. 후자는 내 얘기다.)

크고 작은 선택과 그에 따른 변화가 쌓여가면서, 고등학생 때 이과에서 문과로 옮겨온 것이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는 후회에 찬 확신은 점점 옅어져 갔다. 당시에 부모님과 선생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공대에 진학했다면, 어쩌면 대기업에 더 무난히 취업했을지도 모르고 보수적인 조직의 답답한 사무직 대신 수평적인 IT 스타트업에서 진취적인 직무를 맡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지금 이렇게 내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살 수 있게 된 것은 결국 이공계 기피현상에 떠밀려 문과를 택하고, '문송한' 분위기 속에서 사무직으로 취업하고, 끝내 회사를 그만둔다는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재 내가 걷고 있는 길이 정답인지 여부도 지금 당장은 판단하기 어렵다.
서메리 인잇_80년간의 인생 일주
어쩌면 진짜 중요한 것은 선택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를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 일주》에는 80일 안에 지구를 한 바퀴 돌 수 있는가를 두고 내기를 거는 사람들이 나온다.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는 '돌 수 있다'는 쪽에 전 재산을 걸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직접 세계 일주에 나선다.

그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와 인도, 이집트, 싱가폴, 홍콩, 미국의 도장이 차례로 찍힌 여권을 들고 내기가 시작된 날로부터 80일 뒤 출발지인 런던에 도착해야 한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이므로, 그는 기차와 배 시간표를 꼼꼼히 분석하여 계획을 세운 뒤 하인 한 명을 데리고 지체 없이 여행길에 오른다.

당연하게도 그의 여정은 온갖 변수로 얼룩진다. 기차는 툭하면 멈춰 서고, 배는 엔진 고장이나 폭풍을 만나 며칠씩 발이 묶인다. 인디언 떼의 습격을 받거나 억울하게 도둑으로 몰리면서 유치장에 갇혀 시간을 허비하는 일도 생긴다. 하인이 납치를 당하거나 화형 위기에 처한 여인의 사연을 전해 듣는 등 윤리적 딜레마를 안겨주는 사건도 끊이지 않는다. 채 석 달이 안 되는 짧은 여정 속에서도 주인공은 끊임없이 선택의 갈림길에 서며, 때로는 실수로 때로는 자신의 의지로 비효율적인 길을 택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리어스 포그의 여행은 우리네 인생과 닮았다. 최선이라고 믿었던 선택이 최악으로 밝혀지거나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가 나를 비롯한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이라면, 그 어떤 변수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멀쩡히 달리던 기차가 갑자기 멈춰 섰을 때, 차장의 입에서 '선로가 끊어졌다'는 말도 안 되는 설명이 나왔을 때, 그는 지체 없이 기차에서 내려 다른 이동수단을 찾아 나선다. 다른 승객들이 분노와 비난에 목을 매며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그는 근처 마을의 동물 사육사를 찾아가 차분히 협상을 벌이고, 결국 코끼리를 타고 지름길을 통해 선로가 복구된 지점까지 도착한다.

포그는 80일간의 세계 일주에 성공한다. 그러나 지구를 한 바퀴 도느라 거의 전 재산을 써버린 탓에, 내기에서 딴 돈으로도 큰 부를 이루진 못한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 80일의 여행이 80년의 인생 속에서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어차피 지금은 알 수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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