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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아침밥이란 무엇인가

[취재파일] 아침밥이란 무엇인가
지난달 말, 수도권의 한 아파트단지 주민들이 이용하는 내부 게시판에 올라온 글 한 편이 한동안 각종 커뮤니티와 SNS를 뜨겁게 달궜다. 자신을 아파트 주민이라 밝힌 글쓴이는 "아침에 집밥을 먹고 싶은데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며 근처 이웃들 가운데 "가정에서 먹는 밥과 국, 반찬 2~3가지를 아침 7시까지 배달해주면 6,500원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정혜경 취파용
삽시간에 여러 커뮤니티로 퍼져나간 글. 달린 댓글도 함께 퍼 날라졌다. 이웃 주민으로 추정되는 이들은 요즘 물가로는 그 정도 가격에 배달까지는 어림도 없다는 조언은 물론, 비슷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 공산품 도시락 서비스 정보도 제공했다. 글쓴이는 기존 가정집에서 하고 남은 밥과 국, 반찬 두어 가지 정도를 받는 수준이라 가격을 일부러 낮게 책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성'이라는 지칭은 어디에도 없는 짧은 글. 그러나 이 글이 즉각 여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촉발한 감정은 '분노'였다. 이 글을 기화로 많은 네티즌들이 스스로가 겪은 이른바 '철없는 남성'과 관련한 경험담을 공유하기 시작하며 논란에 불을 더 지폈다.

어쩌면 글쓴이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미 '젠더적'으로 소비되고만 글. 다양한 연령의 주변 지인들에게 "화제가 되고 있는 글"이라며 보여줬다. 소규모 공동체 공유경제의 작동 방식을 나타내는 일면으로, 크게 문제 될 것 없지 않느냐는 감상도 있었다.
정혜경 취파용
● 아침밥의 적정한 대가는 얼마일까?

서울시 물가 정보 홈페이지에서 찾은 '한식' 메뉴별 외식비용의 평균을 구해봤다. 글쓴이의 조건인 "가정에서 먹는 밥과 국, 반찬 2~3가지"에 가장 부합할 만한 '된장찌개 백반'과 '김치찌개 백반'의 2019년 6월 평균가격은 각각 5,715원과 5,923원.

배달 기사 노동조합인 라이더유니온에 따르면 서울 및 수도권 내에서 통용되는 '배달' 기본 단가는 1.5km당 3천 원. 비수도권으로 확대될 때는 500m 단위로도 계산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한다. 인근 아파트 주민임을 고려해 적용한 배달 비용은 대략 500원에서 1,000 원 정도. 글쓴이가 제시한 6,500원에 가까워진다.

물론 하루 한 끼라는 점에서 사업체의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없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통상 업무시간 외인 '아침' 시간을 노동에 투여해야 한다는 점도 마찬가지. 보수적으로 잡은 현 시가를 적용해서도 글쓴이의 제안은 '짠 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른바 식사 대용으로 최근 각광받고 있는 '간편식' 비용은 얼마 정도일까. 마켓컬리에 따르면 판매율이 높은 '샐러드/도시락' 상품 평균 가격은 대략 4,000원 후반에서 5,000원 초반. 4만 원 이하 주문 시 배송료 3,000원이 더해진다. 이렇게 구입한 도시락은 해동 조리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른바 '국물'이 없다는 점에서도 완전히 조건에 부합하진 않는다.
정혜경 취파용
● 아파트 단지 '밥 나눔' 글이 젠더 이슈가 되기까지

그러나 적정 단가에 미치지 않는 비용을 제시한 것만이 '상당수 일부'에게 이 글을 '분노'로 소비하게 한 전부는 아닐 것이다. 여러 조건의 간명한 나열에 불과한 이 글에서 '분노'가 어린 지점은 바로 '아침', 그리고 '집밥'이라는 키워드다.

지난해 11월 발간된 질병관리본부의 2017년도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아침 식사 결식률은 27.6%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해당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05년보다 7.7% 포인트 높은 수준이다. 노동 인구와 노동 시간 증가, 1인 가구의 증가 등 다양한 원인이 작용한 결과겠지만 이 조사가 말하는 뚜렷한 현상 한 가지는 '세대별 아침밥 생산 노동의 감소'라 하겠다.

고래(古來)로부터 이 노동의 주체가 '여성'이었다는 점이 '집밥' 키워드에 얽힌 분노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도시락을 포함한 간편식 시장 규모가 2012년 1조 원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서 올해 말엔 4조 원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되는 규모로 확장할 동안에도 여전히 검색창에 '아침밥'과 '이혼 사유'를 입력하면 여러 고민 상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실제 가사 사건을 다수 담당한 현직 판사는 "이혼 소송의 원고든 피고든 상관없이 남편 측 준비서면에서 아내가 (아침) 밥을 해주지 않는 것을 마치 귀책 사유와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했다.

● 저녁도 점심도 아닌, '아침밥'이라서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1인 가구 보고서(2019)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발간한 2019 한국 1인 가구 보고서에 등장한 데이터도 흥미롭다. 보고서에 따르면 1인 가구가 당면한 문제를 성별로 나눠봤더니 여성 1인 가구가 '안전, 위험'에 대한 걱정이 두드러지게 컸던 반면 남성 1인 가구는 '외로움'과 더불어 '식사 해결'의 걱정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월 여성가족부 주최로 열린 남성 1인 가구 간담회에서도 참석자들이 자신들이 겪는 문제로 가장 먼저 언급한 것 역시 '홀로 밥을 먹는 것'이었다. '밥 먹는 문제'에 대한 토로를 그것도 여성가족부 장관 앞에서 '문제'로 지적했다는 것. '밥'과 '밥 짓는 노동'이 맥락없이 젠더 이슈가 되었다고 보기 힘든 이유가 여기 있다.

말하자면 '집밥'이란 곧 '직접 차린 밥'이고, 이는 통상 '여성의 노동으로 정성껏 차려진 밥'이라는 고정된 성 역할에서 비롯한 자유 연상이 아직 그리 어색하지만은 않은 사회라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선, 특히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삶에서 가장 먼저 포기하기 쉬운 '아침밥'의 가치가 더욱 절상된다. 다시 말해 집에서 차린 아침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특별한 노동이 공급될 수 있는 환경에 놓인 이들이며, 이른바 '맞벌이'가 대세가 된 요즘 세태에도 기꺼이 아침밥 짓는 노동에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이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비용 면에서 더 싸고, 더 균질하고, 더 간편한 업체들의 아침밥 서비스 대신 굳이 이런 절상된 가치를 누리는 몇 안 되는 가정의 (통상 여성의 노동으로 생산되는) '집밥'을 공유하길 요청했다는 점. 그러나 심지어 시가보다 더 낮은 가격을 제시했다는 점이 이 글에 쏟아진 분노의 원천이 아니었을까?
식사 음식 밥 아침 점심 저녁 식단 (사진=픽사베이)
● 아침밥이란 무엇인가

'밥 먹었냐', '언제 밥 한번 먹자', '밥은 먹고 다니냐'와 같이 유독 '밥'과 관련한 인사말이 자연스러운 한국 사회에서 '밥'은 누구나 제각각의 철학과 역사가 배어있는 소재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유독 여성들에겐 이 '밥'이라는 소재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트리거로 작용하는 사례가 많다.

골프채로 아내를 폭행해 죽음에 이르게 한 지방의회 전 의장은 평소 아내가 차려준 '성의 없는 밥상'에 대한 분노를 담은 사진을 올렸고, 최근 베트남인 아내를 폭행하는 영상이 공개되면서 체포된 남성은 아내가 '밥상에 수저를 잘못 놓았다'는 이유로도 폭행을 행사했다. '아내' 또는 '엄마'의 본분이 '밥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겐 '미흡한 밥상'은 쉽게 응징과 처벌의 이유가 되고 만다.

남는 밥과 반찬을 대가를 지불하고 먹고 싶다는 글쓴이의 욕구를 결코 나무랄 순 없을 것이다. 다만 사장될 뻔했던 이 글이 '분노'로 소비된 것은 분명 '현상'으로 특기할 만하다. '집밥' 특히 '아침밥'에 트리거가 눌린 여성들의 외침. 무력한 남성들에 대한 분노. 이 '과민 반응'은 외려 그간 응축돼 있던 분노에 대한 방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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