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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팍팍한 삶에 시골 의사가 건네는 한 마디 위로…"괜찮아, 안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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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198 : 살거나 혹은 안 살거나…<괜찮아, 안 죽어>

"할매."
"왜?"
"괜찮아, 안 죽어요."

내 말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할매는 별말 없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는 진료실을 나가는 할매의 뒷모습을 보며 '오, 아직도 이 말이 먹히네' 라는 유치한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진료실을 나서려던 할매는 천천히 몸을 돌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인사를 하시려나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마주 보는데 할매가 말한다.

"다 죽어, 사람은."


삶과 죽음이 한순간에 갈리는 사투의 현장 응급실에서 응급의학 전문의로 10년을 일했던 의사가,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헷갈릴 정도로 느리고 평온해뵈는 시골 동네 의원에서 10년을 일하면서 겪어온 사람들과 삶에 대한 기록을 모은 책, 김시영 작가의 <괜찮아 안 죽어>가 이번주 북적북적의 선택입니다.

노란 색상의 화사한 책 표지에는 뒤돌아보며 인사하는 작가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책상 위에 놓인 건 아마 진료기록일까요, 이런저런 단상을 기록하는 노트일까요. '오늘 하루도 기꺼이 버텨낸 나와 당신의 소생 기록'이라는 부제가 제법 근사합니다.

"나는 한때 아프다고 말하는 사람들, 살기가 녹록지 않다고 투정하는 사람들에게 '괜찮아, 안 죽어'라는 결론을 내어 주는 것이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라고 믿었다. 그렇게 제한된 결론 속에 스스로를 가두며 끊임없이 벽을 쌓는 동안 세상은 더욱 넓어졌고, 나는 점점 좁아지는 틈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나를 살려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서 '괜찮아 안 죽어'라는 소리를 듣던 사람들이다... 어쩌면 여기 모여 있는 글들은 죽을 듯 나락으로 떨어지던 나를 살려낸 내 사람들이, 나를 시켜 써놓은 소생 기록인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보면 그간 지켜본 수십, 수백 건의 죽음을 통해 들여다 본 인생의 무상함이라든가...굉장히 심각한 이야기만 담아놨나 싶을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시골 동네의원에서 만나는, 그냥 집에서 푹 쉬면 나을 것 같은 사소한 증상의 할매, 할배들과 매일 같이 툭닥툭닥거리는 일상의 단상 모음에 좀 더 가깝습니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 격인 할매들, 우리가 익히 아는 박막례 할머니도 있지만 책에서 소개하는 이름 모를 할매들마다 매력 터집니다. 새삼 우리네 할머니들 중엔 숨은 고수도, 재주꾼도, 이야기꾼도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할매들에게 또 듬뿍 사랑받는 '원장 선상님'이 작가입니다.

"내가...어... 가다가... 가만... 생각해... 보니께... 내가... 그니께... 원장님헌티... 새해... 인사를... 안 했어." 겨우 그 말을 하려고 헐떡거리면서 저 계단을 다시 올라온 거냐고 물으니 숨이 차서 대답은 못 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인다. 순간 나도 모르게 무모한 이 할매의 손을 잡고 또 한마디 하고야 만다."

"이 양반은 만날 저 옷만 입고 다니시나 싶은 무채색 패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핑크색 바구니가 할매의 손에 들려 있다.... 내 신경을 그토록 건드리던 영롱한 핑크빛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어라? 바구니를 두고 가셨네. 할매, 이거 가져가셔야지.
아 그거 놓고 가는 거여.
뭐예요 이게.
화이트데이.
네? 아 화이트데이! 화이트데이는 내일이잖아요.
그래? 그럼 내일 까서 먹어."

"그런데 언제부턴가 할매가 혼자 병원에 온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이유를 묻자 할배가 밭에서 넘어지면서 다리를 다쳤는데, 알고 보니 뼈에 금이 갔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오늘, 할매가 또 혼자 약을 타러 왔다. 나는 안부 인사 겸 지나가는 말로 묻는다...

할아버지는 어떠세요? 걸어다니실 만한가, 이제?
글씨, 아마 한 석 달은 된 것 같은디... 그 망할 영감탱이가 그렇게 혼자 가버린 것이."


나는 아직 나쁜 의사지만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덜 나쁜 의사가 되고 싶고 그러려고 노력한다, 입으로는 늘 괜찮다고 사람은 쉽게 안 죽는다고 말하지만 스스로도 괜찮지 않을 때가 많긴 하지만 선량한 나의 할매, 할배 같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위안과 감사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작가의 말에 크게 고개 끄덕이며 공감했습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동력이 되어주는 건, 언제나 성질 나쁜 나를 견디고 때로는 감싸주고 툭툭 말을 건네주는 선량한 나의 사람들 같습니다.

*낭독을 허락해주신 출판사 21세기북스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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