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인터넷 발레 동영상 교육이 4차 산업혁명?

정부 주도 '제2벤처 열풍'의 그림자

노동규 기자 laborstar@sbs.co.kr

작성 2019.06.24 10:11 수정 2019.06.25 16:36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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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벤처 모어댄의 최이현 대표가 지난 15일 문재인 대통령의 스웨덴 국빈방문 행사 중 하나인 '한-스웨덴 소셜벤처와의 대화'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북유럽 순방 때 함께 간 경제사절단 면면이 이례적이다. 대한상공회의소를 통해 발표되는 명단은 보통 기업집단 순위로 줄 세우기 마련인데 이번엔 스타트업 기업들을 앞세웠다. 대통령을 따라간 118명의 경제 기관 단체인 가운데 절반 가까운 53명이 스타트업 업계 인사였다. 스타트업 육성을 통해 '제2 벤처붐'을 일으키겠다는 정부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부 목표는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 원 이상 비상장 신생기업)을 20개까지 늘리겠다는 거다. 혁신 창업을 통한 성장이 목표라면서 각종 창업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올해 정부가 마련한 14개 부처의 '창업지원 사업' 관련 지원금만 1조 1,180억 원에 이른다. 유니콘을 "만들어내겠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저금리로 자금을 빌려주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그냥 줘 버리는 지원금 형태가 늘다보니 당연히, 부작용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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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창업 훼방 '지원금 사냥꾼'● "'나랏돈 창업' 제일 좋은 때…요즘 누가 빚져가며 창업합니까?"

인터넷엔 창업지원금을 받게 도와준다는 자칭 '컨설턴트'들이 넘쳐난다. 10만 원짜리 1시간 대면상담부터, 1만 원대 온라인 상담까지 수두룩하다. 창업 희망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한 사이트를 통해 이달 초 직접 창업 상담을 받아봤다.

"지금이 나랏돈으로 창업하기 제일 좋은 때입니다. 요즘 누가 빚져가며 창업합니까?" 이른바 '창업 액셀러레이터' D 씨의 말이다. 스스로 산업통상자원부와 일하는 컨설턴트이자 정부의 여러 창업지원 심사에 참여해왔다고 밝힌 D 씨는 최근에도 "한 3,000만 원 받아줬다"며 '실적'을 자랑했다. 확인 결과, D 씨는 실제 경남 한 지자체 창업지원 사업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D 씨는 "팀을 꾸려 지원하면 심사위원들이 더 좋게 본다"거나, "지방엔 '선수'가 없기 때문에 뽑히기 쉽다"며 "사업자등록만 지방에 내고 지자체 지원 사업을 노리라"는 따위 '팁'도 소개했다. "좋은 사업 아이템이 있어도 사업계획서를 못 써 심사위원 눈에 못 드는 경우도 많다"며, 돈만 더 내면 사업계획서 대필까지 가능하다고 유혹했다.

D 씨는 무엇이 미래 유망 사업인지는 "심사위원들도 잘 모른다"고 단언한다. 각 부처와 지자체에 책정된 지원금은 중구난방 넘쳐나는데 이를 어떻게든 소진해야 하니 전문성 떨어지는 심사위원들이 심사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당장의 '수익성'이 우선이고, 애초 정부가 기대한 '혁신 창업' 취지는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다.

D 씨가 최근 지원금을 타도록 도와준 사업은 '대학교 안 공유 전동 킥보드 사업'이라 했다. "원래 있는 사업인데, '공유' 이름 붙이고 적당히 앱으로 킥보드 위치를 실시간 확인되게 하니 4차 산업혁명으로 평가받더라"고 D 씨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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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NS로 빵 파는 '푸드 테크' 기업…"발레 동영상이 4차 산업혁명"

스타트업 업계에선 이런 정부 지원금을 노려 수시로 사업을 벌였다 접는 '사냥꾼'과, 지원금으로 연명하는 '좀비기업'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이종배 의원이 제공한 정부 자료를 바탕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앱을 통한 반려동물 돌봄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P사의 경우 지난해 2월 이후 사실상 휴면상태다. 이 서비스에 정부 자금 1,750만 원이 들어갔다. 업체 대표는 "(지원금은) 안 갚아도 되는 돈 아니냐"며 "지금은 새 지원금을 받아 다른 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명 커피프랜차이즈의 앱의 예약 주문을 흉내 낸 이 업체의 새 사업은 "앱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이용자 후기가 자자하다.

C사는 인터넷 동영상으로 발레를 가르친다. 지난해 중소벤처기업부 '기술혁신형 창업기업 지원 사업' 4차 산업혁명 분야에 지원해 정부 돈 1억 원을 받았다. 인터넷으로 발레를 가르친다면서 업체 홈페이지 발레 동영상은 제대로 재생되지 않는다. 운영은 부부가 하는데, 지원금 1억 원 가운데 3,760여만 원을 인건비로 사용했다. 사이트 상 발레 소개 글은 포털사이트 백과사전에서 그대로 베꼈다. 마케팅 비용으로 1,500여만 원을 들였다는데, 찾는 이가 드물어 효과는 사실상 없어 보였다. C사 측은 "보통 무용학원에서 배우는 발레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배우는 게 4차 산업혁명"이라고 주장했다.

SNS를 통해 빵을 파는 S사 역시 중소벤처기업부 초기 창업패키지를 통해 6,400만 원을 지원받았다. 제조 과정에 우유와 계란 등을 덜 넣어 '먹었을 때 속이 편한 빵'을 만든다는 이유로 '바이오·의료 분야'로 분류됐다. 사업계획서엔 스스로를 '푸드 테크' 기업이라 칭하고 지원금을 받았다. 제빵업계 관계자는 "밀가루에 물, 소금, 이스트만 갖추면 빵"이라며, "우유와 계란, 버터를 빼거나 비율을 조절했다고 '푸드 테크'며 '바이오·의료 분야'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기자가 만난 S사 직원조차 스스로를 '바이오 기업' 직원으로 여기고 있지 않았다.

국민 세금을 지원받은 기업 실태가 이렇지만 중소벤처기업부는 올해도 창업지원에 9,975억 원을 집행할 예정이다. 정부 지원금 총액의 89.2%에 달하는 금액이다. '묻지 마'식 세금 살포가 유니콘 기업 육성에 얼마나 효율적일지는 따져보지 않은듯 보인다. 이종배 의원은 "상당한 수준의 예산을 옥석도 가리지 않은 채 무차별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세금낭비일 뿐 아니라 유니콘 기업의 탄생에도 기여하지 못한다"며 "'묻지 마' 식 정부지원에 앞서 민간의 스타트업 투자 생태계 조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스타트업에 정말 필요한 건…

전문가들은 창업을 '실업 대책'의 하나로 여긴 정부의 접근 방식부터가 문제라고 우려한다. 미국 인디애나 대학의 도널드 쿠랏코 교수에 따르면 성공적 창업지원의 열쇠는 '수요 맞춤'이다. 지원 대상의 수요에 맞는 지원이 중요하다는 거다. 반면, 현 정부의 창업 지원은 사실상 창업을 강요하는 '수요 창출'이라는 얘기다. 적재적소에 맞춤한 지원을 하기보다, 창업에 별 뜻 없는 사람들마저 '어떻게 하면 정부 돈을 당길까' 궁리하게 만든다.

유명 포털사이트를 공동 창업한 한 벤처 전문가는 "한국 환경이 실리콘 밸리와는 다르기 때문에 정부 지원금이 스타트업 성공의 마중물로서 중요한 측면이 있다"면서도 "반면 스타트업 기업을 나태하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고 경고한다. "고객 반응을 좋게 얻어 가능성을 보여 투자 유치를 하거나 매출을 올려가는" 사업의 기본을 잊게 만든다는 것이다.

정부의 무차별적 지원이 민간의 자연스러운 투자 생태계를 교란하는 측면도 있다. 스타트업 입장에서도 창업 초기단계를 지나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하기 위해선 지속적인 투자 유치와 자금 회수가 필요한데 이는 정부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정부의 창업지원이 초기창업 지원금 살포에 집중된 사이 국내 민간 벤처투자는 여전히 초라한 수준이다. 스타트업 정보 분석기관인 '스타트업 게놈'에 따르면 지난해 기업인수합병을 통한 국내 벤처투자 회수금액은 670억 원 수준이다. 글로벌 스타트업들이 회수한 260조 원의 0.0003%에 불과하다.

스타트업 창업이 활발한 나라를 보면 창업이 꼭 정부 주도로 이뤄지는 건 아니다. 김희욱 런던정치경제대학(LSE) 연구원은 "이스라엘이나 말레이시아는 우리보다 경제규모가 작아도 스타트업이 잘 되는 나라"라며 "정부 지원도 중요하지만 기술과 혁신을 높이 사는 교육, 도전과 실패 편견 없이 응원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 연구원은 "중구난방으로 분산된 스타트업 지원 사업을 통합해 유망한 스타트업들이 꼭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정비하고 낡은 규제를 없애야 제2 벤처붐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