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신고하면 뭐하나. 잠깐 왔다 가버리는데." 지난달 말 '신림동 침입 남성' 사건 당시 경찰에 쏟아졌던 비판. 피의자가 간발의 차로 닫힌 여성 집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모습이 전국에 퍼진 상황에서 "건물 주변에 이상이 없었고 너무 이른 시간이라 CCTV 영상은 확인하지 않았다"는 경찰 해명은 더 큰 공분을 샀습니다. '경찰에게 보호받을 수 없다.' 신뢰가 무너지는 만큼 '내 몸은 내가 지킨다' 정신이 강해지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한 달 뒤, SBS는 하룻밤 사이 귀갓길 여성 2명을 뒤쫓다 경찰에 붙잡힌 30대 남성 김 모 씨에 대해 전해드렸습니다. 여성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바싹 붙어 걷는 김 씨의 모습은 불안감을 느끼기에 충분해 보였습니다. 도움을 청할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던 상황, 두 여성의 대응이 눈에 띕니다.
● 용기 있는 행동에 줄행랑, 하지만…
"이 빌라 사세요? 먼저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가세요." 첫 번째 피해여성 A 씨가 주차장까지 따라온 김 씨에게 용기를 내 말을 걸자 김 씨는 당황한 듯 말없이 빠른 걸음으로 사라집니다. 김 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본 김 씨는 그제야 무사히 빌라 안으로 들어서죠.
위기의 순간 두 여성의 용기에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뒤를 밟은 낯선 남성과의 일대일 상황에서 자칫 더 큰 피해를 당했을 수 있다는 겁니다. 특히 B씨처럼 직접 몸싸움을 벌이는 건 매우 위험하다는 분석입니다. 남성이 흉기를 지니거나 흥분한 상태에서 해코지하려 한다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우선 일대일 상황을 가급적 피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게 가장 좋다고 입을 모읍니다.
● "신고하라고? 오죽하면 직접 나섰을까"
다시 떠오르는 물음표, '경찰을 어떻게 믿고?' 실제로 이번 사건이 알려진 뒤 경찰에 대한 여론의 불신이 다시금 드러났습니다. 신림동에서의 부실한 초동 조치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난 겁니다. "오죽하면 피해 여성들이 직접 나섰을까." 첫 번째 신고가 접수되고 두 번째 피해가 발생할 때까지 약 9시간, 경찰은 도대체 무엇을 했냐는 질타도 나옵니다. 18일 저녁 처음 피해가 발생하고 20일 오후가 돼서야 김 씨를 붙잡은 경위에 의구심을 갖는 이 역시 적지 않아 보입니다.
출동 경찰관과 목격자 등을 만나 당시 상황을 자세히 들어봤습니다.
18일 저녁, "낯선 남자가 집 앞까지 뒤따랐다"는 신고를 받고 암사지구대 경찰관들이 출동합니다. 피해여성 A 씨를 만나 CCTV 영상을 확인했지만, 뚜렷한 신체접촉이나 집 안으로 강제로 들어가려 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고 무엇보다 A 씨가 용의자를 잡는 것 대신 주변 순찰만 강화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게 경찰 설명입니다. 현행법상 용의자를 잡더라도 경범죄 처벌 외에는 별 수가 없던 상황에서 내린 판단이었다고 합니다.
● '나를 보호해주는 경찰', 언제쯤?
신림동 건을 포함해 여러 사건을 접하면서 경찰의 초동 조치에 아쉬움을 느꼈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이번 사건을 취재하면서는 지구대 노력에 새삼 눈길이 갔습니다. 통상 이런 신고가 접수되면 지구대에서 경찰서로 넘겨 처리합니다. 10명 남짓 1개 팀이 교대로 돌아가는 상황에서 사복 잠복조를 운영하며 용의자를 쫓는다는 건 분명 쉬운 일은 아닙니다. 김 씨가 붙잡힐 때까지 피해 여성들에게 꾸준히 진행 경과를 알리고 불안감을 덜어주려 한 점도 돋보였습니다. 물론 당초 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막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있겠죠. 더 큰 피해를 막은 데 이들이 있었단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경찰 초동 조치가 부실하거나 미흡한 사례는 여전히 곳곳에 보입니다. 며칠 전 인천에서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이 신고자가 폭행당하는 걸 뒷짐 지고 방관해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경찰에게 보호받을 수 있다, 맡기면 된다는 믿음은 결국 경찰 조직 스스로가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경찰을 어떻게 믿어?" "신고해도 소용없어" 불신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결코 잊어선 안 될 겁니다. 암사지구대의 노력이 새삼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때를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