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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 위해 살아온 '김용현의 삶'…망설임 없이 밝힌 이유

[SBS 스페셜 ] 요한, 씨돌, 용현 2부 ③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았던 그의 진짜 이유는?

16일 방송된 SBS 스페셜에서는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에도 없었던 요한, 씨돌, 용현'이라는 부제로 세 개의 이름을 가진 한 남자의 두 번째 이야기가 공개됐다.

한 남자의 인생을 찾아 제작진이 찾아간 곳은 일본이었다. 다큐멘터리 감독 사카타 마사코 씨는 "내 남편은 그렉 데이비스 기자다"라고 말했다. 그는 독재 정권의 폭력에 분노한 시민들이 모인 자리에 함께 했었다.

그리고 그렉 데이비스가 1987년 6월에 촬영한 사진 속에서 어디에나 있었을 그의 모습을 찾아냈다. 그는 세례명 요한, 자연인 씨돌로 불렸던 용현이었다.

1987년 겨울 경북 포항의 임분이 할머니는 아들 정연관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의문 투성이의 죽음에 가족들을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나타난 요한이 정연관 상병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알려줬다.

요한이자 용현이었던 그는 정연관 상병의 사망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결국 진상이 규명되었고 요한은 정 상병의 곁을 떠났다. 이에 임분이 할머니는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랑 인연을 끊으려고 그랬는지도 모르겠다"라고 했다. 그리고 임분이 할머니의 아들은 TV 속에서 사라진 요한을 보았다고 했다. TV 속에서 그가 본 것은 바로 자연인 씨돌이었다.

작은 생명도 귀하게 여기던 용현은 1995년 최악의 참사였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에 함께 했다. 그는 생존자를 구할 정도로 활약했다. 이에 민간 구조단장은 "당시 취재를 크게 했다. 그런데 그렇게 활약했던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빠졌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한 발짝 물러섰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용현은 구조를 마치고 봉화치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용현은 3년 전 봉화치 마을을 떠났다. 2019년 그는 어디에 있는 걸까.

우리는 병원에서 용현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전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그의 오른팔과 다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생각도 말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이에 주치의는 "용현 씨는 뇌출혈이 크게 발생했다"라고 했다. 산속에서 홀로 일하던 그는 뇌출혈로 쓰러졌고 등산객에 의해 구조되었다. 이에 의사는 "본인이 갖고 있던 스트레스가 악화되며 뇌출혈로 쓰러지게 된 거다"라며 "용현 씨의 뇌는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하다. 우측 반신 마비는 평생 가지고 살아야 한다. 오른쪽의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재활치료가 꼭 필요하다"라고 했다. 뇌출혈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요한으로도 씨돌로도 돌아갈 수 없었다.

용현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왼손으로 글을 써 표현했지만, 이 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는 7년 전 봉화치 마을에서도 무언가를 열심히 써 내려갔다. 당시 그가 어떤 내용의 글을 썼는지는 미스터리다. 주변인들에게도 그는 글의 내용을 함구했다.

그리고 제작진은 그의 원고를 보관 중이라는 곳을 찾았다. 제작진이 찾은 곳은 작은 출판사였다. 대표 장종권 씨는 "그분의 원고는 한 마디로 산중일기이다. 그런데 필체를 읽어내기가 어려워 처음에는 책을 만드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항상 작은 것을 나누는 그 마음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책으로 만들고 있다"라고 했다. 용현이 쓴 책은 무려 2천 페이지에 달한다. 용현의 글은 봉화치에서 겪은 30년을 시간을 그대로 담겨 있었다.

또 용현의 글 속에서는 노무현 변호사, 김승훈 신부 등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 학생의 고문으로 인한 사망을 알리고 80년대 6월 항쟁을 촉발시킨 사제이다.

1982년 김승훈 신부는 서울의 작은 성당의 신부로 부임을 하며 용현과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는 용현이라는 본명을 숨기며 세례명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민주화 운동이 뛰어들었다. 특히 그는 민주화 운동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을 위한 일에 앞장섰다. 이에 제작진은 용현의 구체적인 활동들을 찾아 나섰다.

민주화 운동의 현장, 그곳에는 늘 용현이 있었다. 그리고 용현은 자식을 죽음으로 몬 군사정권에 대한 합당한 죄를 묻는 현장에도 맨 앞에 서 있었다. 그 날 용현은 백골단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김승훈 신부는 고문 피해를 입은 용현에게 가장 먼저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용현의 글귀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김승훈 신부가 용현을 소개해준 신현봉 신부를 만났다. 신현봉 신부는 "요한이 수배령이 내려졌다. 김승훈 신부를 찾아갔는데 자기도 수배령이 내려서 나한테 가보라고 했단다. 그렇게 날 찾아왔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김승훈 신부의 청에 용현과 3년을 함께 생활했다. 그리고 신현봉 신부는 "처음에는 용현을 부탁에 의해서 돌봐줬지만 하는 행동을 보고 그렇게 없는 이들을 위해 도와주고 진실하게 누군가를 도우려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게 됐다"라고 했다.

용현은 남을 위해서 어떤 대가도 없이 몸을 던졌다. 그리고 그는 신현봉 신부가 부임지를 옮기게 되며 봉화치로 거처를 옮기고 자연인이 된 것이다. 당시 맨발로 걷던 용현은 지극한 심한 고통을 이기기 위함이었다. 폭력과 고문의 후유증을 가진 용현에게 봉화치와의 만남은 큰 선물이었다. 그렇게 그는 자연인 씨돌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땔감이 된 나무에게도 미안함을 전했다. 자연에게 받은 만큼 되돌려 주고 싶은 마음에서인지 그는 매일 한 시간씩 산불 감시를 했다. 이에 지난 30년간 봉화치는 단 한 차례도 산불 피해가 없었다.

또한 용현은 정선에서 일어난 토종벌 폐사 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히기 위해 앞장섰다. 그가 추구하는 진실은 하나였다. 자연과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자신의 오랜 신념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이에 사람들은 요한, 씨돌, 용현을 잊지 못한다.

용현을 잊지 못하는 재야 운동가 장기표 선생은 자신을 묘사한 글을 보며 감격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또한 그는 "용현 씨는 자기가 그리는 이상 사회를 실천하고 실현했던 사람이다. 이게 진짜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이다"라고 떠올렸다.

또한 용현의 이웃사촌이었던 옥희 할머니는 용현의 현재 소식을 듣고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옥희 할머니는 "한 이웃에 있을 때 친척 같고 자식같이 지냈었다. 너무 안 됐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제작진은 정연관 상병의 가족들을 만나 용현 씨가 남긴 글을 전했다. 이에 정 상병의 형은 "요한이는 아직까지 연관이하고 이 사건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고 있지는 않았네. 난 잊고 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걸 보니 잊고 있지 않았네"라고 했다. 이어 그는 "정말 이렇게 생각할 줄 몰랐다. 진상규명 후에 연락이 안 되는 건 우리가 제대로 보상해준 게 없어 섭섭한 마음에 연락을 끊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에 정말 놀라고 있다"라고 그동안의 오해를 고백했다.

임분이 할머니는 "내가 손에 가진 게 없어서 요한한테 보답을 못해줬다. 그래서 섭섭했을 거라고 생각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요한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

임분이 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용현을 만나기 위해 이동했다. 그는 "사람 사는 게 참 희한하다. 요한이 만날 때 슬픈 마음으로 만났는데 이제는 웃어지려나 모르겠다. 고마운 게 많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제대로 표현을 못했다. 그때는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라며 지난날을 아쉬워했다.

15년 만에 임분이 할머니는 너무도 변해버린 요한과 만났다. 임분이 할머니와 아들을 만난 요한은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이에 임분이 할머니와 아들은 요한에게 미안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잠시 후 요한은 정 상병의 사진을 끌어안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임분이 할머니 가족이 자신의 가족 같아서 그렇게 도왔다고 말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웃으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용현은 자신만을 위해 싸우는 세상에서 억울하고 서러운 이들을 위해 앞장섰고, 꺼져가는 생명에 안타까워하며 참사의 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삶을 선택했다. 그는 어디에나 있었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7년 전 그를 만났던 제작진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질문하지 못했던 그 질문을 촬영 마지막 날 했다.

이큰별 PD는 "요한, 씨돌, 용현으로 사는 동안 많은 이들을 했다. 그런 일들이 정작 본인에게 도움되거나 관계되는 일이 없었다. 왜 그런 삶을 살았나?"라고 물었다. 이에 용현은 크게 웃더니 망설임 없이 왼손으로 답을 써 내려갔다.

그의 답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 그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답을 했다. 그는 자신을 위한 시간보다 남을 위한 시간을 보낸 삶에서 뜨겁지 않은 순간은 없었다. 이제 자신을 위해 살아갈 시간이다. 앞으로 그가 살아갈 날들은 도전의 연속일 테지만 그는 뜨겁게 하루하루를 이겨낼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렉의 아내 마사코는 용현에 대한 사연을 듣고 크게 감동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에 참 혀 했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싶었다. 그리고 이 사람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인생을 따라가면 다양한 삶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용현뿐만 아니라 이날의 몇 백, 몇 만 명이 삶이 더 있었다는 것.

그때 용현은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싸우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에게는 각각의 인생과 드라마가 있었다. 이 땅에 민주주의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뿌리가 되어 묵묵히 헌신한 이름 없는 이들. 뜨거웠던 그 거리의 수많은 용현들은 별처럼 찬란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 별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반짝이는 빛을 내고 있을 것이다.

(SBS funE 김효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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