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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그날 이태원 클럽의 예거밤이 '파란색'이었다면

[취재파일] 그날 이태원 클럽의 예거밤이 '파란색'이었다면
'예거밤'이라는 술이 있습니다. 독일에서 유명한 '예거마이스터'라는 알코올 원액으로 만드는 일종의 칵테일입니다. '전문 사냥꾼'이라는 뜻의 예거마이스터는 민트 등 각종 향료 56가지를 넣어 만듭니다. 쉰 개가 넘는 향료가 첨가됐으니 그만큼 향이 강합니다. 약초향과 비슷한 향을 풍기는 예거마이스터는 알코올 농도가 35% 정도로 높은데 원래 기침 등을 치료할 목적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예거마이스터에 '레드불' 같은 고 카페인 에너지 드링크를 섞으면 예거밤이 됩니다. 예거마이스터의 '예거'와 '폭탄'이라는 뜻의 단어를 합쳐 만든 이름입니다. 특유의 향은 남고 단맛이 더해지면서 알코올 농도가 낮은 일종의 폭탄주가 되는 겁니다. 

● 이태원 클럽에서 건네 마셨던 예거밤…그리고 검출된 수면제
예거마이스터 칵테일
지난해 3월 17일 새벽 3시 33분, 36살 회사원 장 모 씨는 서울 이태원의 한 클럽에서 22살 여성 김 모 씨에게 다가갔습니다. 장 씨는 "술을 한 잔 사주겠다"며 예거밤을 권했습니다. 자신도 예거밤이 든 술잔을 손에 든 채였습니다. 그러나 술을 마신 김 씨는 곧 정신을 잃었습니다. 장 씨는 김 씨를 자신의 차량 뒷좌석에 태우고 강남의 한 모텔로 이동했습니다. 김 씨는 이튿날 홀로 모텔에서 깨어났습니다. 상황을 인지한 뒤 경찰에 신고해 혈액 검사 등을 실시했습니다. 김 씨의 혈액에서는 수면유도제로 쓰이는 향정신성의약품 성분인 졸피뎀이 검출됐습니다. 김 씨가 졸피뎀이 함유된 수면제를 처방받거나 복용한 적이 없었음은 물론입니다.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은 경찰은 피의자가 된 장 씨의 집과 차량을 수색했습니다. 장 씨의 방에서는 졸피뎀 알약과 쓰고 남은 알약 케이스 등이 발견됐습니다. 경찰은 장 씨가 병원에서 졸피뎀 성분이 포함된 수면제를 8차례 처방받은 것도 확인했습니다. 장 씨의 책상 서랍에서는 갈색병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병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에서도 졸피뎀이 검출됐습니다.

김 씨는 이태원 클럽에서 장 씨가 건넨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었다는 것까지 기억한다고 진술했습니다. 이후 모텔까지 오게 된 과정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했습니다. 반면 장 씨는 자신이 김 씨에게 건넨 예거밤에 졸피뎀을 넣지 않았을뿐더러 성관계 또한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알약 형태인 졸피뎀을 김 씨 모르게 가루로 만들어 예거밤에 타고 이를 마시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고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는 장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알약 형태의 졸피뎀이라도 크기가 매우 작다는 점, 김 씨가 예거밤을 마신 장소가 조명이 어둡고 춤추는 사람들이 많아 분위기가 어수선한 클럽 안이었던 점, 예거밤이 검은색을 띠는 짙은 색상의 칵테일이고 술잔의 입구가 넓은 점 등을 감안하면 피고인이 졸피뎀을 피해자 몰래 넣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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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한 약물은 왜 무색무취한가…'약물 변색 법' 첫 발의

이런 약물 성범죄를 막기 위한 논의가 국회에서 시작됐습니다. 바른미래당 정책위의장이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채이배 의원은 어제(10일)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SBS 8시 뉴스는 하루 전인 그제 이 소식을 보도했습니다. 위에 언급한 이태원 클럽 사건과 같은 사례가 최근 많아짐에 따라 이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법으로 두자는 취지입니다. 마약류를 제조할 때 다른 사람의 의사에 반해 투약하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안전조치를 총리령으로 정하는 안(제21조의 2항) 등을 신설하는 내용의 법안입니다.
[취재파일] 그날 이태원 클럽의 예거밤이 '파란색'이었다면
눈길을 끄는 대목은 '색소 화합 의무화' 부분입니다. 채이배 의원은 "범죄에 이용될 수 있는 약물에 대해서는 알코올과 만났을 때 서서히 녹도록 하거나 피해자가 마약류 복용을 인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대폭 높이도록 기술적 조치를 취하는 것을 시행규칙으로 추진할 계획"이라고 SBS와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최근 '물뽕'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GHB(감마 하이드록시낙산)의 경우 물이나 술에 탔을 경우 무색무취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 감별이 어려운데 이런 약물의 오남용을 제약 공정에서부터 방지하도록 하겠다는 취지입니다.

'향정신성의약품이 알코올에 닿으면 순간적으로 색이 변하거나 거품을 내도록 한다'. 언뜻 봐서는 과연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미 시행하고 있는 제도입니다. 우리나라의 보건복지부 해당하는 후생노동성의 관리 아래 2015년부터 일본 제약회사들이 자율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조치입니다. 아래 약품은 로히프놀(푸르니트라제팜)이라는 수면제인데 호주에서는 마약으로 지정돼 있고 그밖에 선진국에서도 매우 엄격히 규제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한 제약회사는 실제로 이 약물에 파란색 식용 색소를 화합해 알약으로 가공하고 있습니다. 알약의 단면을 잘라보면 파란색이 특히 더 눈에 띕니다. 물이나 음료에 타도 파란색이 확연히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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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에 타면 색깔이 변하는 약물…일본에서는 이미 시행 중

물론 실용화까지는 해결해야 할 단계들이 많습니다. 먼저 약물을 관리감독할 보건복지부와 실제 공정을 진행하는 제약회사와 충분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SBS 취재진이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을 비롯한 여러 명의 국내 교수진에 문의한 결과 식용 색소를 약물에 혼합해 정제하는 건 기술적으로 크게 어렵지 않다는 의견을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단, 실무적인 협의를 심도 있게 진행해야 한다는 데에도 의견을 모아졌습니다. 한국 약제학회 회장이자 아주대학교 약학대학장인 이범진 교수는 SBS와 인터뷰에서 "색소가 약물의 배합 변화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다양한 음료라든지 오남용을 일으키는 환경에서 그 색깔을 유지하고 방지하는 데까지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충분한 논의를 거쳐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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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주로 생산되는 약물의 경우 법안의 효력이 미치기 어렵다는 한계도 있습니다. 다국적 제약회사의 주도로 해외에서 만들어진 뒤 완제품으로 수입되는 약물의 경우 국내법이 제약 공정에 관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국내 제약업체에만 색소 화합 등을 의무화할 경우 생산 비용 증가 등에 있어 역차별 논란이 나올 수 있는 지점입니다. 채이배 의원 측은 이런 경우 국내로 약물이 반입된 뒤 추후 조치할 수 있는 방안이 있는지 논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합법적 테두리를 벗어나 불법으로 유통되는 약물의 경우 이 법으로는 통제가 어렵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졸피뎀 같은 향정신성의약품은 사람의 중추신경계에 작용하기 때문에 오용하거나 남용하는 경우 인체에 심각한 위해를 끼칠 수 있어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로 지정되고 관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의사의 처방을 받지 않은 향정신성의약품 소지나 투약은 엄연한 불법입니다. 그러나 거래는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향정신성의약품을 인터넷이나 SNS를 통한 직거래로 사고파는 사람들이 적발되는 경우도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 1년 만의 판결…이태원 클럽 약물 성범죄 사건의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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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태원 클럽 약물 성범죄 사건의 결말입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여성에게 졸피뎀을 탄 예거밤을 먹인 뒤 성폭행한 혐의로 36살 장 모 씨에게 징역 4년형을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장 씨에게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와 아동·청소년 관련기관 등에 5년간 취업 제한을 명령했습니다. 강간과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을 장 씨가 모두 위반했다고 판결한 겁니다.

재판부는 약물을 술에 타지 않았다는 장 씨의 주장을 모두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장 씨가 클럽 안에서 만난 여성에게 졸피뎀을 투약해 성관계를 할 계획을 가지고 클럽을 간 것이라면 미리 졸피뎀 알약을 가루 형태로 만들어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재판부는 판단했습니다.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는 장 씨 주장도 당시 정황을 볼 때 상식적이지 않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사건 당일 최저 기온은 0.5℃ 정도로 쌀쌀했는데 피해자 김 씨는 외투와 지갑이 든 핸드백 등 소지품을 모두 클럽 안에 둔 채 다음날 모텔에서 발견됐습니다. 김 씨가 자발적으로 장 씨의 요구에 응했다면 자신의 소지품을 가지고 장 씨를 따라 나왔을 거라는 겁니다.

이 사건은 여러 가지를 시사합니다. 만약 장 씨의 집에서 졸피뎀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혹은 장 씨가 졸피뎀을 병원에서 처방받지 않고 불법 거래로 구입해 경찰이 경로를 추적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유죄 판결은 쉽지 않았을 거로 보입니다. 향정신성의약품을 이용한 범죄는 추적이 쉽지 않습니다. 약물의 검출 기간이 짧아 피해자가 신고할 무렵에는 이미 검출이 어려운 경우도 있고 심지어 피해자가 약물로 의식을 잃어 피해 사실 자체를 인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번 이태원 클럽 사건은 가해자를 찾아 처벌한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 3개월 동안 161명…대한민국에 빠르게 퍼지는 약물 성범죄

국내 약물 성범죄 사건은 해마다 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발생한 약물 성범죄의 경우 정확한 통계조차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2015년 국립과학 수사연구원이 분석한 자료를 바탕으로 보면 약물 성범죄로 의심할 수 있는 사례는 최근 4년 동안 2배로 늘었고 그중 졸피뎀 등이 가장 큰 비중으로 나타난 걸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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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물 성범죄가' 이렇게 증가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요? 일각에서는 이른바 '솜방망이 처벌'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장 씨의 경우 강간죄의 권고형 범위(징역 2년 6월~5년)와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죄의 권고형 범위(징역 3년~5년 9월)를 다수 범죄 처리 기준(제1범죄인 강간죄의 상한과 제2범죄인 마약류 관리법 위반의 2분의 1을 적용)에 근거해 징역 4년형을 내린 걸로 보입니다. 현행 국내 형법에 따른 처벌을 가정해도 형법 제299조에 따라 징역 3년 이상의 유기징역형이 가능한 수준입니다.

그러나 가까운 일본과 미국의 법을 적용하면 형량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일본은 '약물에 의한 데이트 강간'의 경우 형법 제278조 제2항으로 무기징역 또는 6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보다 무거운 처벌입니다. 미국은 이보다도 훨씬 엄격합니다. 미국 연방법은 '데이트 강간 금지법(Date-Rape Drug Prohinition Act of 2000)' 조항을 따로 둬 별도 규정으로 처벌하고 있습니다. 이 법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물뽕'으로 알려진 GHB 등을 데이트 강간 약으로 규정하고 이를 소지하기만 해도 징역 3년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런 약물을 장 씨처럼 예거밤에 몰래 타다가 적발되면 어떻게 될까요? 최대 20년까지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고 미 연방법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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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물 성범죄를 막기 위한 논의가 시급한 시점입니다. '클럽 버닝썬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 경각심이 고조된 가운데 경찰이 지난 3개월 동안 집중 단속을 실시한 결과 약물 이용이 의심되는 성범죄와 불법 촬영 또는 유포 혐의로 검거된 사람은 161명에 달했습니다. 이번에 발의된 법에 대한 다각도의 논의와 더불어 처벌 강화에 대한 논의가 병행돼야 범죄 예방의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대처가 늦으면 늦을수록 범죄는 어느새 독버섯처럼 자라나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2019.06.09 8시 뉴스)[단독] "술에 '물뽕' 타면 변색"…약물 성범죄 방지 법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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