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학교폭력 가해자에게 쓰는 편지

장재열|비영리단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을 운영 중인 상담가 겸 작가

SBS 뉴스

작성 2019.05.30 11:00 수정 2019.07.04 14:5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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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때렸던 당신, 잘 지내나요? 당신도 최근 여러 유명인이 과거의 일로 연예 활동을 하차하거나, 소속된 그룹에서 탈퇴하는 기사를 보았겠지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의 시선이 과거의 주먹질을 단죄하는 모습으로 급격히 바뀐 것, 그게 아무렇지 않았던 당신에겐 생소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도 궁금했습니다. 어떤 당신은 자신이 가해자라는 것을 아득히 잊은 터라 남 일처럼 보았을 수도 있겠지요. 또 다른 당신은 아주 조금, 마음이 찔렸을지도 모릅니다. 나에게도 언젠가 저런 일이 벌어지면 어떡하지. 살짝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또 다른, 무척 뻔뻔한 당신은 이렇게도 말하더군요. "연예인 같은 직업이 제일 불쌍하다. 10년 전 일이라며"

27년 전 내 목을 졸라 실신시켰던 다섯 명의 당신들. 안경 없이는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시력의 나를 괴롭히려고, 안경을 굳이 부러뜨렸던 21년 전의 또 다른 당신. 11년이라는 시간 동안 학교폭력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스쳐 갔던 많은 당신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지난밤엔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배는 나오고 머리가 벗어졌지만, 여전히 그때 얼굴을 간직하고 있더군요. 회사원이 되고, 아빠가 되고, 누군가의 좋은 남편이 된 당신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보통의 삶을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더군요.

저요? 저도 그럭저럭 잘 지냅니다. 때때로 그 시절이 생각나지만 지금은 기억 속의 한 장면이라, 그다지 아프거나 고통스럽지는 않아요. 세월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것도 같네요. 죽는 게 나을 만큼 공포에 떨었던 날도, '그랬던 어떤 날들'이 되기도 하는군요.

다만, 어쩌다 보니 저는 상담가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직업이 직업인지라, 이유 없이 맞고, 빼앗기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매일 마주하곤 합니다. 그들은 남자일 때도, 여자일 때도, 10대일 때도, 30대 후반일 때도 있지만, 또한 모두 다른 방식으로 괴롭힘을 당했지만, 나의 어느 날과 똑 닮아있음을 느낍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참 어렵습니다. 여전히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요. 14살 때의 폭력 탓에 28살이 된 지금까지도 면접장에서 덜덜 떠는 구직자를 볼 때면, 20년 전의 강압이 여전히 뇌리에 남아 가는 직장마다 따돌려지는 38세의 사회인을 볼 때면 생각합니다. 이 트라우마는 어떻게 해야 끝이 날까?

오래도록 생각했습니다. 어렴풋이 알아낸 사실은 이거였어요. 학교폭력 피해자들의 머릿속에는 '사회의 인과법칙'이 붕괴되어 있다는 것을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 우리는 너무 어릴 때 그 논리가 머릿속에서 깨져버린 겁니다. 너무 오랫동안 '이유 없이 그냥' 맞았으니까요. 인과에 대한 믿음이 깨져버리면,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할 수 없게 되지요.

열심히 노력하면 잘 될 거라는 믿음도 가지기 어렵게 되고, 친절하게 살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평범한 논리도 '나만은 해당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단순히 누군가 앞에 서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몸은 두려움에 휩싸여 사시나무 떨듯 오들거립니다. "야, 발표 한 번 한다고 아무도 네 뒷담화 안 해."라는, 지극히 논리에 맞는 말을 주변에서 해줘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인과라는 법칙이 깨어져 있으니까요.

그 깨어진 인식을 재건하는 경험을 얻지 못하면, 무논리의 두려움이라는 굴레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도 있습니다.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거였어요. 내가 겪은 '이유 없는 폭력'보다 세상의 더 많은 부분은 그래도 이유나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것. 그 증거들을 지속적으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우리를 회복되게 하지요.

그래서 당신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혹여 언젠가 당신은 기억조차 하지 못한 과거가 들추어지거든, 그것으로 당신이 비난받고 위기에 처하거든, 담담히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다른 놈들도 많은데 왜 나만 재수 없게?"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당신이 언젠가 큰 벌을 받기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당신의 주먹질에 의해 부수어졌던 인과의 법칙을 회복할 권리가 있을 뿐입니다. 시간이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각자가 뿌린 씨앗은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세상의 룰'을 목격하는 것만이, 우리에겐 세상에 대한 공포를 벗어날 열쇠가 됩니다.

당신의 사과를 바라지 않습니다. 당신이 처절한 고통 속에 살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언젠가, 만약에, 당신이 한 일에 대해 돌려받을 위기가 오거든 세상을 원망하지만 말아주세요. 피해자인 척하지 말아 주세요. 이유 없이 매일이 위기였던 우리의 삶보다, 언젠가 마주할 당신의 위기는 적어도 이유라도 있으니까요.

우리가 당신에게 불려가 맞았던 것이 강요된 '지난날의 의무'였듯, 언젠가 마주할 징악을 억울해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가해자였던 당신이 져야 할 '다가올 날의 의무'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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