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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어벤져스' 열풍의 이면…극장가의 '잔인한 4월'

[취재파일] '어벤져스' 열풍의 이면…극장가의 '잔인한 4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어벤져스를 키워내고
벚꽃과 중간고사를 뒤섞고
영화관 가는 길을 미세먼지로 채운다.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의 한 구절을 살짝 바꿔 본 겁니다. 황무지를 방불케 하는 메마른 감성에 불현듯 시상(?)이 떠오르게 한 건 타 방송사의 동료 기자에게 전해 들은 짧은 얘기였습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측에서 "개봉 전날 열리는 언론 시사에 언론사마다 딱 1명씩만 참석이 가능한데, 그 회사에서 3명이나 신청을 했다"며 연락을 해 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알아보니 영화 담당 기자인 본인 외에 다른 프로그램을 만드는 PD가 두 명 더 신청서를 넣었더랍니다. 아시다시피 각 방송사마다 뉴스 외에도 영화를 다루는 프로그램들이 꽤 많습니다. 연예 프로그램도 있고, 영화 소개 프로그램도 있고요. 그러니 그분들도 취재를 위해 시사회에 참가 신청을 한 건데, 배급사가 '각 사별 딱 1명'으로 T.O를 정하면서 난감한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셋이 모여서 가위바위보를 하라는 건지, 사다리를 타라는 건지,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이후 상황은 더 묻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얘기를 듣고 나서 내내 기분이 개운치 못합니다. 영화 담당을 몇 년째 하면서 영화의 언론시사회 신청 조건에 '회사별 딱 1명'이라는 '원칙'은 처음 들어보는 탓입니다.

이전에도 언론의 취재 열기가 높아 좌석 부족이 우려되는 작품들의 경우 시사회에 약간의 제한을 두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IMAX관처럼 특수상영관에서 열리는 판타지나 히어로물의 시사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기본 신청 인원을 최소 2명 정도는 보장하는 게 관행이었습니다. 그랬는데도 좌석이 부족할 경우엔 배급사 측이 상영관을 더 마련해서 늦게 신청한 취재진은 일반상영관에서라도 볼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그런데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각 언론사의 동료 기자와 PD들이 '딱 1장' 있는 티켓을 놓고 치열한 사내 '예매 전쟁'을 벌여서 승리해야만 시사회 취재가 가능한 셈입니다.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내한 기자간담회
개봉 전부터 극장가를 뒤흔들고 있는 '어벤져스'의 위력을 생각하면 배급사 측의 행보를 이해 못 할 바는 아닙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예매가 시작된 지난 16일, 국내 최대 극장업체인 CGV 사이트가 저녁 6시부터 1시간 넘게 접속 장애를 겪었습니다. 예매 사이트 오픈 시간이 6시로 알려지면서 남보다 빨리 이 영화를 보려는 관객들이 동시에 몰린 탓입니다. CGV 측에 따르면 이날 저녁 몰린 접속자 수는 같은 시간대 평균의 6배에 달했습니다.

이런 예매 전쟁 결과,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예매 시작 3일 만에 120만에 육박하는 예매량을 기록했습니다. 지난 3일 개봉해 줄곧 박스오피스 1~2위를 달리고 있는 영화 '생일'이 보름 동안 모은 총관객 수(89만 명)보다 30% 이상 많은 숫잡니다. 개봉 전 열기만 놓고 보면 지난해 1천100만 넘는 관객을 모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뛰어넘습니다. 배급사 측의 철저한 보안과 '엠바고' 요청으로 영화에 대한 정보도 거의 알려진 게 없는 상태인데도 이렇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년 이맘때면 반복돼 온 어벤져스의 '4~5월 독주'가 올해는 어느 해보다 거셀 거라는 예상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축포를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지켜보면서 한국 영화계는 우울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 극장가에서 4월은 예전부터 '잔인한 달'이었습니다. 봄바람에 실려 온 꽃향기를 따라 답답한 실내보다 야외를 찾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기인 데다, 각급 학교의 중간고사 기간까지 겹쳐 극장을 찾는 발걸음이 뚝 떨어지는 탓입니다.
영화관 (사진=연합뉴스)
올해는 유난히 잔인합니다. 4월에 개봉한 국내외 영화들을 통틀어 18일 현재까지 좌석판매율이 10%를 넘은 영화는 '생일'(10.6%)이 유일합니다. 좌석판매율은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좌석이 100개인 극장 안에 관객이 몇 명 앉아 있느냐를 뜻합니다. 그 수치가 10%가 안 된다는 건, 거의 모든 영화관의 90% 이상이 비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4월이니까" "4월엔 원래 관객이 없잖아" 쉬운 변명으로 대충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벤져스'의 등장으로 이런 변명은 유효기간이 다했습니다. 해마다 어벤져스가 개봉하는 4월 마지막 주는 대학가의 중간고사가 시작되는 주입니다. '최악의 악재'를 안고 시장에 뛰어드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어벤져스는 개봉도 하기 전부터 관객들이 예매 전쟁을 벌이고, 천만 넘는 관객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최근엔 '극장을 찾는 관객이 없는 게 아니라, 관객들이 찾는 영화가 극장에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쏟아졌습니다. 전통적으로 시장이 작다는 이유로 큰 영화들은 잘 나서지 않고, 그러다 보니 4월 극장가엔 늘 스타도 없고 제작비도 작은 중소형 영화들뿐이라는 겁니다. 경쟁력 있는 영화가 적으니 관객들은 더 외면하고, 그 결과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는 악순환이 이어진다는 거지요.
영화관 (사진=연합뉴스)
꽤 그럴듯한 분석이라고 여겨졌는데, 올 4월 극장가를 보면서 다시 혼란스러워집니다. 올 4월엔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볼만한 영화들이 꽤 있었습니다. 소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실 관람객들의 극찬 속에 대단한 입소문을 일으킨 '생일', 김윤석 배우의 감독 데뷔작으로 베테랑 배우의 연기 내공이 고스란히 담긴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은 '미성년' 등.

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3월 말 개봉이긴 하지만, '겟아웃'의 조던 필 감독이 만든 화제작 '어스', 연기파 배우 에단 호크의 '인생 연기'라는 찬사까지 받은 '퍼스트 리폼드' 등 작품성과 화제성을 두루 갖춘 웰 메이드 작품들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극장마다 좌석의 10%도 못 채우고 텅텅 비었습니다.

사회성 있는 주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꿰뚫는 통찰, 현실에 대한 풍자 등 꽤 다양하게 차려진 밥상을 여지없이 물리던 관객들이 어벤져스에 이렇게까지 열광하는 걸 보면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객들이 찾는 영화'는 대체 어떤 걸까요? 이제 영화의 살길은 2시간 남짓 웃고 즐기며 신나게 보고 나오면 충분한 오락, 화려한 볼거리뿐인 걸까요? 그런 시장에서 한국 영화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미세먼지 가득한 날 하늘처럼 잔뜩 흐려서 앞이 잘 안 보입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시사가 열리는 상영관은 좌석 수가 600석이 넘습니다. 그 큰 상영관으로도 쏟아지는 취재 신청을 감당할 수 없어 '사별로 딱 1명'이라는 초유의 규정까지 만들어 낸 영화를 유심히 보면서 한 번 고민 해 봐야겠습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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