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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악질경찰'과 '세월호'…'진정성'과 '상업성' 사이

[취재파일] '악질경찰'과 '세월호'…'진정성'과 '상업성' 사이
한동안 어떤 남성의 클로즈업 이미지가 앞판을 가득 채운 티셔츠가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별이 박힌 베레모에 사자 갈기처럼 흩어진 머리카락, 살짝 치켜뜬 채 전방을 주시하는 강렬한 눈빛, 거친 수염. 얼굴마저 준수해서 심지어 스타벅스 커피잔에까지 등장한 사진 속 주인공은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입니다.

목숨을 걸고 자본주의에 저항했던 공산주의 혁명가와 스타벅스라니.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조합입니다. "체 게바라는 왜 스타벅스 속으로 들어갔을까?"

캐나다 출신의 철학자 조지프 히스와 앤드류 포터는 한 책에서 이렇게 답합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주류'에 맞서 개성을 강조하는 이른바 '반문화'야말로 현대 소비사회를 지탱해 온 강력한 '동력'이었다. 책의 제목은 이들이 내놓은 예리한 분석보다 더 날카롭고 더 도발적입니다. '혁명을 팝니다'. 무엇이든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 소비자본주의의 위력을 실감케 하는 제목입니다. 
체 게바라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혁명을 팝니다'의 저자 중 한 명인 앤드류 포터는 몇 년 뒤 더 대담한 주장을 내놓습니다. 혁명을 넘어 누구나 '선'으로 여겨 온 가치인 '진정성'에 '거짓말'이라는 이름표를 붙입니다. 제목이 '진정성이라는 거짓말'입니다.

이 책에서 포터는 '진정성'의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진정성'이라는 것이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매우 모호한 개념이고, 이 때문에 우리가 '진정성'을 갖고 하는, 혹은 스스로는 진정성을 갖고 했다고 믿는 많은 행동들이 결과적으로는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 '상업영화'에 첫 등장한 '세월호'…'악질경찰' 둘러싼 '진정성' 논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여전히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세월호 참사가 최근 극장가의 뜨거운 화제로 떠올랐습니다. 20일 개봉한 영화 '악질경찰' 때문입니다. 제목에 드러나듯 '악질경찰'은 부패한 경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범죄영화'입니다. '아저씨'로 617만 관객을 모았던 이정범 감독의 작품입니다.
영화 '악질경찰' 스틸컷
영화의 내용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의 행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주요 인물이 세월호 참사 관련자로 등장합니다. 이를 놓고 말들이 많습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굳이 그 인물이 세월호 참사 관련자여야 할 필연성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언론시사를 통해 처음 내용이 공개된 직후부터 우려가 흘러나왔습니다. 스크린에 '세월호'가 등장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동안 '세월호'를 다룬 영화들은 모두 세월호 참사 자체가 '주제'였습니다. 규모 면에서도 모두 수익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소규모 독립영화이거나 다큐멘터리였습니다.

반면 '악질경찰'은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고 스타 감독과 스타 배우를 모아 '수익'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상업영화'입니다. 시종일관 욕설이 난무하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범죄영화' 속에서 세월호가 '소재'로 소비되는 것이 정당하냐는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그 배경엔 '사회 악'을 드러내는 영화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자극적인 '설정', '장치'로 국가적 트라우마를 이용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깔려 있습니다.

감독과 만나 이런 우려들에 대한 얘기를 나눴습니다. 감독은 가슴속에 계속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끓어오르는 뭔가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부담스러운 소재였지만,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감독으로서, 어른으로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했습니다. '세월호'가 '소재'나 '설정'이 아니라 숨어있는 주제였고, 그 주제를 본인에게 익숙한 범죄영화라는 형식에 담은 것이 '악질경찰'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인터뷰 내내 감독은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꽤 여러 차례 반복했습니다. 이런 내용은 여러 매체들을 통해 보도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개봉한 뒤 관객들 사이에선 의견이 갈리고 있습니다. 
세월호
역시 핵심은 "이 영화에 세월호가 왜 나오느냐?"입니다. 한쪽 진영에선 '세월호 팔이' '세월호 우려먹기'같은 자극적이고 적대적인 표현들을 쏟아냅니다. 다른 진영에선 자극적인 '청소년 관람불가' 범죄영화에 세월호가 등장하는 것 자체가 거북하다고 불쾌감을 쏟아냅니다. 반면, 우리 사회의 거대악을 드러낸다는 큰 틀에서 보면 어색하기만 한 설정은 아니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논란이 진행되는 방향에 따라 영화의 성패도 갈릴 것으로 보입니다.

'악질경찰' 속 '세월호'가 '진정성'과 '상업성' 사이에서 정확히 어느 지점에 놓여있는지는 영화를 만든 이들 외엔 알 수 없습니다. 관객은 그저 각자의 눈으로 보고 느낀 대로 판단할 뿐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말로 진정성/상업성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서두에 소개한 책을 떠올린다면, 진심으로 만들었어도 관객들이 상업적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그 '진정성'은 결국 '거짓말'이 되고 말 테니까요.

결과는 예단할 수 없지만, 시사 직후부터 이어진 관계자들의 '진정성' 호소에도 불구하고 여지없이 벌어진 논란은 분명한 사실 하나를 되새기게 합니다. 재미든 설득이든 감동이든 공감이든, 목적이 무엇이든 영화는 결국 말이 아니라 '영화'로 그걸 해내야 한다는 것. "그 어려운 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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