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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5·18 유공자다움'을 찾는 사람들

'피해자 위계'의 정치학

[취재파일] '5·18 유공자다움'을 찾는 사람들
다시 세월호 참사가 연상됐습니다. 단원고 유가족, 그리고 일반인 유가족. 2014년 세월호 정국 속, 우리 사회는 참사 피해자를 이렇게 달리 분류하곤 했습니다.

누군가는 '단원고 유가족'이 도심을 점거하고 불법 시위를 한다며 비난했습니다. 시위 전문 집단과 연계돼 있다는 의심도 받았습니다. 종북 좌파 이야기가 또 나왔습니다. '일탈하는 피해자'가 됐습니다. 목소리를 적게 냈던 '일반인 유가족'과 곧잘 비교됐습니다. 일반인 유족은 상대적으로 '진정성 있는 피해자'로 인식됐습니다. 피해자다움, 유족다움이 분류 기준이 됐습니다.

최순실 게이트로 대한민국이 요동치던 2016년 말. 고(故)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는 이런 글귀가 나왔습니다. 2014년 7월 기록입니다. 김기춘 당시 비서실장의 지시로 추정됐습니다.

'세월호 특별법? 국난 초래-법무부·당과 협조 강화. 좌익들 국가기관 진입 욕구 강(强)', '유가족 분리 용어 사용 (단원고 유가족 대 일반인 유가족)', '세월호 유가족 (학생 유가족)외 기타 유가족 요구는 온건 합리적. 이들 입장 반영되도록 하여 중화'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 비망록 일부

경찰의 물대포에 희생된 고(故) 백남기 씨 사건. 진상규명을 요구한 딸이 발리 여행을 다녀왔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당시 이를 앞장서 폭로를 했던 것도 김진태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었습니다.) 발리에 있는 시댁을 찾아간 걸로 밝혀졌음에도, 어느새 피해자다움이 없는 피해자가 됐습니다. 부검을 거부했던 것 역시 유족답지 못한 행동으로 공격받았습니다.

당시 정치권력이 이런 상황에 얼마나 개입했는지 밝히는 건 역사에 맡겨두겠습니다. 김영한 전 수석의 기록처럼, 피해자를 갈라 서열을 매기는 '피해자 위계'는 정치권이 그간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꽤 유용하게 써왔던 정치적 기술이었습니다. "궁지에 몰리면 논란을 만들면 된다."는 건 정치권의 격언과도 같습니다. 참사는 정치를 늘 궁지로 몰았습니다. 피해자다움, 유족다움은 논란을 만들기에 꽤 괜찮은 소재였습니다. 피해자와 유족은 한편에서는 동정의 대상이 됐고, 다른 한편에서는 진정성을 의심받았습니다. 동정하느냐, 의심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정치는 분열을 먹고 삽니다. 분열은 지지층의 '결집'과 동의어와 같습니다. 그간 정치권력은 유족과 피해자를 통해 그렇게 재미를 봐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유한국당 김진태(사진=연합뉴스)
"5·18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는 건 진정한 피해를 보신 분들을 위해서라도 옥석을 가리는 일이다."
-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

40년 가까이 피해자로, 유족으로 살았던 그들을 향해 유공자다움을 검증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왔습니다. 광주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 특수군, 이른바 '광수'가 있다는 의혹을 내세웠습니다. "정말 광수가 있으면 어쩔 텐가. 그런 사람은 유공자여선 안 되는 것 아닌가. 유공자다움을 검증해야 한다는 게 왜 틀린 말인가."

그렇게 피해자 가르기가 반복됐습니다. 그들 입에서 '진정한 피해를 보신 분'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진정한 피해와 거짓 피해. 진정한 유공자와 거짓 유공자. 그들의 그림에 그려진 유공자들은 어느새 위계의 틀이 짜였습니다. 피해자 위계의 지난한 역사.

'극우 망령' 따위의 진영 논리의 표제어를 굳이 소환할 필요도 없습니다. 진영의 문제로 단순화하고 싶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박물관에 안치돼 있던 과거의 기술을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지만원 씨의 개인의 생각이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사적 영역의 극단적인 주장을 공당이라는 공적 영역이 공론장으로 끌고 왔습니다. 그 동기가 어찌 됐든, 정치 타짜들의 기술 때문에 누군가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피해자 위계가 이번만큼은 적극적으로 소비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무적인 일입니다. 다만, 5·18을 둘러싼 여러 논의가 '논란'이란 이름으로 금세 물릴까 봐 걱정입니다. 기자는 사회 감정의 최전선에서 복무하고 있습니다. 늘 논란의 수명이 짧다는 걸 깨닫습니다. 누군가는 지겨우니 그만하자고 하고, 또 누군가는 과거 얘기 그만하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할지도 모릅니다. 이번만큼은 피해자 위계의 역사가 근절됐으면 합니다. 정리하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또 다른 참사를 위해서라도 선례가 됐으면 합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진부한 격언이 유난히 와 닿는 요즘입니다. 대한민국의 상식을 믿습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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