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북적] 네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반 고흐, 영혼의 편지

권애리 기자 ailee17@sbs.co.kr

작성 2019.02.03 07:33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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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175 : 네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반 고흐, 영혼의 편지>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약속해 온 그림을 너에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나중에는 연작으로 보여야 할 그림들이 여기저기 흩어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너 하나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전체 그림을 보게 된다면, 그 그림에서 마음을 달래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나를 먹여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네가 보내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1889년, 빈센트)

"형의 편지는 정말 재미있어. 형이 더 자주 쓰지 않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1888년, 테오)


설 연휴,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차분하게 기해년을 준비하는 시간, 지난 100여 년간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의 친구가 돼준 한 남자가 남긴 편지들을 읽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들인 테오와 빌레미나, 어머니, 고갱 같은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묶은 <반 고흐, 영혼의 편지>입니다.

"나는 그 개의 길을 택했다는 걸 너에게 말해 주고 싶다.
나는 개로 남아 있을 것이고, 가난할 것이고, 화가가 될 것이다."(1883년, 빈센트)


새삼 "고흐 좋아" 얘기하기엔 좀 겸연쩍은 화가죠. 모두가 좋아하는 화가니까요. 그래서 좀 다르게 얘기해 볼까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고흐의 그림만큼 '사진빨'을 받지 않는 그림을 본 일이 없습니다.

대학생 때 미국의 한 미술관에서 열린 고갱/고흐 특별전에서 저는 고흐의 그림을 처음 실물로 접했습니다.그리고 그전에 교과서에서, 도록에서, 감흥없이 여러 번 보았던 그 그림들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살아있는 그림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그림이라기보다, 뭐라고 해야 하지...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의 영혼이 그 거칠게 남은 붓질과 색채를 통해 100년도 훨씬 더 지난 뒤에 태어난 제게 실시간으로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미술관에 함께 갔던 옆에 있는 사람과의 대화보다도 오히려 이 화폭 가득히 내게 말을 걸어오는 그 사람, 고흐와의 대화가 더 생생했습니다.

2019년의 오늘, 누구랑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는 어떤 순간에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점잖은 대화 또는 소통이라기보다, 그냥 벼락 같은 감정들의 폭격에 가까웠습니다.

그후 저는 기회가 될 때마다 고흐의 그림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파리에 가게 될 때마다 어떻게든 오르세 미술관에 갔고, 고흐 미술관에 가고 싶어서 암스테르담에 처음 가보았으며, 3년 전에는 고흐 후기 그림들의 배경이 여전히 그때 그 모습 그대로 곳곳에 남아있는 아를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말을 걸어오는 고흐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영혼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가난하고 외로웠고, 불화와 고통, 정신병으로 점철됐던 그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죠. 고흐의 그림을 실물로 보면, 그렇게 인생을 제물로 바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았던 그림들이라는 것을 그냥, 납득하게 됩니다.

즐겁게, 화려하게, 엔터테인먼트 속에서 스타가 되는 예술가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작품들이 주는 기쁨도 크죠. 그러나 고흐의 그림은 그냥, 다른 세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100년이 더 지난 그림이 여전히 문자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모습을 목격하는 충격을 받은 저는, 이제 그것이 아무리 낡은 관념 취급을 받을지언정, 다른 모습의 삶을 영위하는 예술가를 마음 가장 깊숙한 곳까지 받아들이긴 어렵게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제게 고흐는 그렇게, 아 난 역시 예술가로 살 수는 없을 거 같아...... 그냥 맛있는 거 먹고 행복하게 살래, 라고 마지막 뭔가를 내려놓게 해 준 친구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바보처럼 노려보는 텅 빈 캔버스를 마주할 때면, 그 위에 무엇이든 그려야 한다.
너는 텅 빈 캔버스가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모를 것이다.
비어 있는 캔버스의 응시, 그것은 화가에게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캔버스의 백치 같은 마법에 홀린 화가들은 결국 바보가 되어버리지.
많은 화가들은 텅 빈 캔버스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낀다.
반면에 텅 빈 캔버스는 '넌 할 수 없어'라는 마법을 깨부수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화가를 두려워한다.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텅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1884년 10월, 빈센트)


외로운 사람이었던 고흐는 평생 많은 편지를 썼습니다. 그중에서도, 26살 늦깎이로 백수 화가 지망생이 된 고흐를 이후 평생에 걸쳐 후원해 준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는 고흐가 1890년 37살의 나이로 숨질 때까지 668통에 이르렀습니다.

"내 안에 무엇인가 있다. 그것이 도대체 무얼까? 그런 사람은 본의 아니게
쓸모 없는 사람이 된 경우다. 원한다면 나를 그 가운데 하나로 봐도 좋다.
새장에 갇힌 새는 봄이 오면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어딘가에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도 잘 안다. 단지 실행할 수 없을 뿐이다. 그게 뭘까?
잘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어렴풋이는 알고 있어서 혼자 중얼거린다." (1880년 7월, 빈센트)


장남이지만 '집안의 못난이'로 방황과 탐색을 거듭하던 고흐가 동생이 사준 이론서와 물감을 갖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그의 나이는 26살이었습니다. 지금 시각으로 보든, 그때로 보든, 늦은 출발이죠.
그리고 그후 그와 그림에게 주어진 시간은 11년에 불과했습니다. 초기 그림들을 보면, '이 그림들이 우리가 아는 그 고흐와 같은 사람의 작품?'이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은 단시간에 눈부신 발전과 변신을 거듭합니다.

"인물화나 풍경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깊은 고뇌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화가는 깊이 고뇌하고 있다고,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흔히들 말하는 내 그림의 거친 특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거친 특성 때문에
더 절실하게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자만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런 경지에 이르고 싶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벽스러운 사람,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
사회적 지위도 없고 앞으로도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지도 못할, 한마디로 최하 중의 최하급 사람.....
그래, 좋다. 설령 그 말이 옳다 해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사람,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여주겠다. (1882년 7월 21일, 빈센트)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들을 읽고 있자면, 이 평범한 집안의 형제가 어설프게, 그리고 그만큼 헌신적으로 구축했던 후원 관계가 눈앞에 그려집니다. 정통적으로 창작자의 길을 밟으면서 제때에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이 시대까지의 예술가에게는 자주 후원자, '패트론'이 나타나죠. 차이코프스키에게 폰 메크 부인이 나타난 것처럼요. 모짜르트처럼 아예 음악가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아버지의 조직적인 지휘 아래 가족이 연주여행을 다니며
귀족들에게 '음악 품'을 팔기도 하고요. 하지만 적당히 먹고 살 만한 (오늘날의 표현으로 얘기하자면 '중산층')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방황하다 뒤늦게 화가가 되겠다는 뜻을 굳히고 거의 독학에 가까운 그림공부를 거듭하며 화풍을 구축해 나간 고흐는 20대 후반에 그냥 아무 것도 아닌 백수가 됩니다. 잘 다니던 화랑을 때려치우고 수입이 끊겼지만, "나는 예술가, 그리고 분명히 언젠가 위대한 작품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확신은 아직 고흐의 가슴 속에만 있을 뿐이고요. 세상은 보통 이런 상태의 사람을 예의바르게 표현할 때 '몽상가'라고 부릅니다. 굳이 예의를 차리지 않을 때는, 그냥 '미친 놈'입니다.

고흐는 아직 세상에 내놓은 결과물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동생 테오에게 얹혀살기 시작합니다. 귀족도 아니고, 꽤 높은 연봉을 받는 유능한 갤러리 직원이긴 하지만 큰 부자도 아니고, 본인 먹고 살고 가정을 꾸리면 적당할 만큼 버는 동생의 '후원'을 받아야 하는 겁니다. 집안에 이런 큰 형이 있다고 하면... "저집 차남이 착실히 벌어서 제 밥벌이도 못하는 장남 미친 놈까지 건사하잖아. 저걸 어째...."하는 소리를 듣겠죠. 표면적으로는 부정할 수 없이 딱 그 상태로,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릅니다.

"언젠가는 <감자 먹는 사람들>이 진정한 농촌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감상적이고 나약하게 보이는 농부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대상을 찾겠지.
그러나 길게 봤을 때는 농부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달콤하게 그리는 것보다,
그들 특유의 거친 속성을 살려내는 것이 더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다.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있고 먼지로 뒤덮인 푸른색 스커트와 상의를 입은 시골 처녀는
날씨와 바람, 태양이 남긴 기묘한 그늘을 갖고 있을 때
숙녀보다 더 멋지게 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숙녀들이 입는 옷을 걸친다면,
특유의 개성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또한 농부는 일요일에 교회에 가려고 신사복을 차려입었을 때보다
작업복을 입고 밭에 나가 있을 때가 더 좋아 보인다.
이와 비슷하게, 농부의 삶을 담은 그림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세련되게 그리는 것은 잘못이다.
농촌 그림이 베이컨, 연기, 찐 감자냄새를 풍긴다고 해서 비정상적인 게 아니다.
마구간 그림이 거름 때문에 악취를 풍긴다면 훌륭하다고 해야겠지. 바로 그게 마구간이니까."(1885년 4월 30일, 빈센트)


그 10년 동안, 고흐는 온 몸과 마음을 내던져 그림을 그렸습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떤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가. 삶과 그림에 대한 태도와 철학도 점점 자리를 잡아갑니다. 그리고 그 철학과 열정이 실제로 구현되기 시작한 결과물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들이 급속도로 테오의 화랑에 쌓여갑니다. 팔리지 않기 때문이죠. 고흐는 현대 회화로 오는 첫 문을 열었던 혁신적인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본 모습을 그리자. 그것이 고흐의 생각이었습니다. 성경이나 신화 속의 인물, 또는 화려한 귀족이 포즈를 잡은 우아한 모습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이 생생하게 움직이는 모습, 민중, 내 주변의 사람들을 그리자. 그들을 그리는 내가 받은 인상, 나의 느낌, 내가 그들의 삶으로부터 발견한 감동을 내 그림을 볼 사람들의 영혼에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이미 누구나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고 익히 알고 있는 조화와 이상, 균형이 잡힌 '옛날 그림'들을 그리는 것보다
훨씬 값진 일이라는 그의 예술관이 바로 현대 회화의 첫 포효입니다.

고흐는 특히, 살아있는 동시대 농민들의 생활상을 그들이 땀흘려 일하는 밭에서, 현장에서 담아냈던 밀레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 자기가 아는 서양 미술의 화풍과 확연히 다른 일본 판화 '우키요에'에 마음을 빼앗겨서 자신이 그리는 그림에 그로부터 소화한 형식을 녹였습니다. 그리고, 빛과 순간에 집중했던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색채에 천착합니다. 마침내 인상주의에서 더 나아가, 자신이 바라본 생과 영혼과 자연의 정수를 화폭에 담고 싶다, 는 열망으로 자신이 미친 듯이 그어대고 있는 그 순간의 붓질 자국을 그 상태 그대로 남깁니다.

이렇게 여러 영향들을 '나만의 것'으로 소화해 발전시켜 나간 걸작들이 계속해서 외면받는 상황 속에서, 고흐는 자신의 이같은 노력과 철학, 그림에 대한 의지, 내가 왜 이런 그림들을 그리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동생에게 털어놓습니다. 동생만은 계속 자신의 그림을 높이 평가해서 생활비와 물감을 살 수 있는 돈을 보내줘야만 자신이 살 수 있기도 하고, 사랑하는 동생에게만은 이해받고 싶으니까요. 보란 듯이 자신의 그림이 괜찮은 값에 팔려서 동생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내가 아프기 때문에 너무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화가라는 초라한 직업을 흔들림 없이 유지해야 한다고 다짐한다.
건강을 위해 정신병원에 좀더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1890년 5월 4일, 빈센트)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시간순으로 엮은 이 책은 뒷부분으로 갈수록 마음이 아파와 자꾸만 접게 되는 책입니다. 고흐가 조금씩 비평가와 동료 화가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하자, 테오는 기쁘게 그 사실을 알려옵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열렬하게 자신의 예술관과 화가로서의 굳은 의지를 피력하던, 우울이나 가난에 매몰되지 않고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얼마나 성실하게 정진했는지 다각도로 나타나던 빈센트의 편지들은 점점 암울한 절망 사이를 오락가락하기 시작합니다. 광기가 짙어지고, 미묘하게 말이 줄어듭니다.

그 편지들 사이사이에 고갱과 갈등을 빚고, 홀로 남겨지고,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거듭 입원하며 깊어지는 마음의 병을 견뎠던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낭독에서는, 그렇게 가장 가슴이 아픈 대목들 말고, 짙어져 가는 암흑 속에서도 고흐의 색채들이 점점 더 어떻게 광휘를 발해갔는지, 그리고 정신이 들 때마다 고흐가 얼마나 끝까지 희망과 의지를 놓치지 않으려 했는지 말해주는 대목들을 골라 읽었습니다.

"음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을 달래주는 어떤 것을 그리고 싶다. 그리고 영원에 근접하는 남자와 여자를 그리고 싶다.
옛날 화가들은 영원의 상징으로 인물 뒤에 후광을 그리곤 했는데, 이제 우리는 광휘를 발하는 선명한 색채를 통해 영원을 표현해야 한다." (1888년 9월 3일, 빈센트)


테오 반 고흐는 형의 그림이 팔리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형이 언젠가 가치를 인정받을 날이 올 거라고 굳게 믿으며 형을 응원했습니다. 점점 마음의 병이 깊어가는 고흐를 계속 북돋워주고, 애타게 고흐의 회복을 기다렸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온통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들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여러 번 되풀이 읽다 보니, 그렇게 형을 걱정하고 기다린 이 동생, 테오의 편지들이 점점 더 마음에 들어옵니다.

고흐가 세상을 떠난 지 6개월 만에, 충격을 받고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진 동생 테오도 서른 세 살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고흐의 그림들과 이 편지들은 첫 돌도 갓 지난 아들과 함께 남겨진 테오의 아내 조안나 봉거가 다른 남자와 재혼한 뒤까지도 평생 고집스럽게 지켜내고 관리한 끝에 비로소 세상에 제대로 알려졌습니다.

이 유일무이한 화가, 세상에 단 한 사람, 고흐가 주고받은 편지들에서 결국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건, 광기를 이긴 예술, 그리고 그 예술을 살린 가족 간의 사랑입니다.

"형이 완성한 작품들을 생각해 봐. 그런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소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형은 더 이상 뭘 바라는 거야? 뭔가 훌륭한 것을 창조하는 것이 형의 강렬한 소망 아니었어? 이미 그런 그림들을 그려낼 수 있었던 형이 도대체 왜 절망하는 거야? 게다가 이제 곧 더 훌륭한 작품을 만들 떄가 다시 올 텐데 말이야.
퓌비 드 샤반, 드가, 그리고 다른 화가들을 봐도 그렇잖아? 형이 의지만 있다면 아주 빠른 시일 안에 다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 형이 작업실로 돌아가서 습기 때문에 그림에 곰팡이가 핀 걸 봤을 땐 절망감을 느끼기도 했겠지. 나도 무척 속이 상했어.
하지만 우리 희망을 갖기로 해. 형의 불행은 분명 끝날 거야." (1889년 5월 2일, 테오)

"형이 또다시 앓아누웠다고 페이롱 씨가 알려줬어. 불쌍한 형,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아 얼마나 맘이 아픈지 몰라.
저번에는 다행히 오래가지 않고 일찍 회복되었으니, 이번에도 빨리 회복될 수 있기를 정말 간절히 바라고 있어.
형만 건강해지면 우린 이제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어. 사랑하는 형, 집사람이 힘든 시간을 넘기고 아주 예쁜 아들을 낳았어. 아이는 많이 울어대지만 건강해.
조(조안나)가 몸을 회복할 때쯤 형이 와서 우리 아들을 볼 거라 생각하면 얼마나 기쁜지 몰라.
전에 말한 대로 우린 아이를 형의 이름을 따서 빈센트라 부를 거야. 이 아이 역시 형처럼 강직하고 용감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어." (1890년 1월 31일, 테오)


*출판사 '위즈덤하우스'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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