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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1년 만에 돌아온 레드카펫 아래 체불임금

[취재파일] 1년 만에 돌아온 레드카펫 아래 체불임금
지난해 10월, 국회 의원회관 앞 잔디밭 광장에서 영화를 전공하는 대학생 A씨를 만났습니다. 영화인으로서의 진로를 꿈꿨다는 A씨는 심각한 진로 고민에 빠졌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일했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 "사인했잖아, 아니면 그만둬"…레드카펫 아래 '열정 페이'

A씨는 지난해 9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출품작들을 검수하는 비정규직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작품들을 일일이 돌려보고 검수하는 작업이라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기 일쑤였지만, 연장근로수당은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법적으로 A씨가 받아야 할 연장근로수당은 시간당 적어도 1만 1천원. 하지만 A씨가 받은 돈은 시간당 3천원도 안됐습니다.

[A씨/부산국제영화제 비정규직 노동자] : 9시 반까지 야간근무라고 하나, 더 초과근무를 하면 7천원이 나오고 11시 반까지 근무를 하면 만원이 나왔어요. '네가 사인을 했으니까 이대로 일을 할 거면 아니면 그만두라'고 했어요.

● '열정페이'는 예사…대놓고 '근로기준법 안 지키겠다' 명시까지
[취재파일] 1년 만에 돌아온 레드카펫 아래 체불임금
A씨의 제보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민주당 이용득 의원실이 노동조합 '청년 유니온'과 함께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 비정규직 146명의 근로계약서를 전수 분석했습니다. 그랬더니 절반에 가까운 67명의 기본급이 법정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 측은 "자율적인 영화제 분위기상 근로시간을 엄격하게 운영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습니다. '창의적인 활동'을 위해 밥 먹고 커피마시고 휴식하는 시간을 일일이 측정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일했던 많은 비정규직 스태프들은 근로시간 측정과는 별개로, 영화제 개막일이 다가올수록 장시간 야간 노동에 내몰리는 일이 잦아졌다고 털어놨습니다. 화려한 영화제 세트장이 완성돼 가고, 붉은 레드카펫이 행사장 여기저기에 깔릴수록 '열정페이'만 받는 스태프들이 밤을 지새는 날은 늘어만 갔습니다.

더 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난해 6월 열린 부산푸드필름페스타는 근로계약서에 대놓고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연장근로수당이 없고, 4대 보험도 안 된다는 문구가 우리나라 6대 영화제 중 하나라는 부산푸드필름페스타의 근로계약서에 버젓이 명시돼있습니다. 근로계약서를 자문한 박사영 노무사는 "70년대 공단 근로계약서를 보는 것 같다"고 평했습니다.
[취재파일] 1년 만에 돌아온 레드카펫 아래 체불임금
● 국정감사 지적받고 "시정하겠다"…1년 만에 드러난 체불임금 5억 원

이번 실태조사를 함께한 청년유니온의 나현우 기획팀장은 영화제 스태프들의 척박한 노동 현실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나 팀장은 "영화제 스태프들이 노동법의 사각지대에서 일한다는 이야기는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영화계가 워낙 좁다보니 스태프들이 구체적인 상황을 선뜻 용기 내 제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용기를 낸 A씨와 다른 스태프들의 제보로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국내 영화제들의 노동법 위반 실태가 다뤄졌습니다. 이용득 의원실 요청으로 우리나라 6대 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경기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대한 특별근로감독도 지난해 11월과 12월에 진행됐습니다.

특별근로감독 결과 이들 6개 영화제에서 지난 한 해 동안 스태프 541명에게 임금을 체불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스태프들에게 진작 지급됐어야 할 연장·야간·휴일근로수당 등 5억 9713만원이 체불돼 있었던 겁니다. 적발 이후 3억 7천여 만 원이 뒤늦게 지급됐고, 나머지 금액에 대해서도 지급 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영화제들은 유명 배우와 감독을 초청하는 데 많게는 수천만 원의 돈을 쓰기도 합니다. 하지만 화려하게 초청된 이들이 밟고 지나가는 레드카펫 아래엔 진작에 치러졌어야 할 스태프들의 땀의 대가가 묻혀 있었습니다.

● 어느덧 20년 넘은 한국 영화제 역사…우리 영화제가 지속가능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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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대 영화제인 부산국제영화제가 처음 열린 것이 1996년입니다. 어느덧 영화제 역사가 20년이 넘어가게 됐습니다. 이 기간 동안 우리 사회도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영화제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영화제가 처음 자리 잡고 성장하는 과정에 스태프들의 대가 없는 노동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 감춰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들 중 하나로 발돋움했고, 다른 영화제들도 세계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부조리한 노동현실을 언제까지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겁니다. 부조리한 노동실태가 계속 불거져 나오는 것은 영화제의 이미지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영화제 인력 수급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우리 영화제의 지속가능성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때문에 영화제에 지원금을 대는 지방자치단체와 노동 당국의 지속적인 관심과 감시가 필요합니다. 이번 특별근로감독 이후 각 지자체는 향후 영화제의 노동 실태에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아래 소개할 지자체들의 답변이 올해 영화제에서 잘 지켜질지 지켜봐야 하겠습니다.

<영화제 노동실태 관련 각 지자체 답변 내용>

서울특별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외 10여개 영화제 지원)
-서울시 영화제 지원 공모과정에서 노동관련법령 위반예방 안내 강화, 이행여부 철저히 점검하겠음.
-향후 노동관련법령 위반 또는 부당 노동행위 등으로 논란을 일으킨 영화제는 지원대상 선정에서 제외 또는 지원규모 축소하도록 검토.

부천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지원)
-영화제 보조금 지급시 초과근무수당과 4대 보험 관련예산이 영화제측이 제출한 예산계획에 포함되었는지 확인,검토하여 반영하겠음.

부산광역시 (부산국제영화제 지원)
- 부산국제영화제-부산광역시, 체불임금 지급 및 스태프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협의해 나가기로 공식약속.

*자료 : 청년유니온


이와 더불어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영화제를 지탱해 온 스태프들에 대한 지원책도 필요합니다. 이들이 어느 정도 고용 안정성을 가진 상황 속에서 일회성 인력이 아닌, 전문성을 가지고 계속 일할 수 있는 영화 전문 인력으로 성장하도록 제도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전북대학교 인문영상연구소가 지난 2007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유럽의 250개 영화제가 회원으로 참여한 '유럽 영화제 위원회'는 1999년 이후 스태프 교류 프로그램을 마련해 영화제 스태프들에게 고용의 연속성을 마련해주고 있습니다. 이번 특별근로감독 이후 국내 지자체들도 이와 같은 모델을 참고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 또한 잘 지켜지는지, 또 이런 모델이 확산되고 자리잡으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지속적으로 취재하겠습니다.

<영화제 스태프 고용 개선 관련 지자체 답변 내용>

제천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지원)
-장기적으로 보조금 및 자부담 예산의 증액을 통해 인건비 예산을 안정화하고 연중사업 개발과 외부단체와의 협업 등 스태프의 장기 고용을 통해 고용안정화를 도모하며, 근로기준법을 바탕으로 운영규정을 다시금 정비하여 노동환경을 개선하겠음.

경기도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지원)
- 연간 채용 계획을 수립하여 비정규직 근로자의 실업급여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비정규직 근로자의 노동조건을 개선.
*자료 : 청년유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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