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끊이지 않는 '남북 군사 합의' 논란…관건은 '이행'

김태훈 국방전문기자 oneway@sbs.co.kr

작성 2018.11.21 08:4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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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끊이지 않는 남북 군사 합의 논란…관건은 이행
남북이 비무장지대 안의 GP 10곳씩을 시범적으로 파괴 및 철거하고 있고, JSA도 비무장화 작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하늘에는 비행 금지구역, 동·서해 NLL 주변에는 완충 수역, 접적(接敵) 지역에는 사격 및 기동훈련 금지를 선포했습니다. 한강하구 중립수역은 남북이 공동어로를 할 수 있도록 공동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남북 9·19 군사 합의에 따른 조치들입니다. 청와대와 여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은 불가침 조약에 버금가는 획기적인 방안이라고 칭송하고, 야당 등 보수진영은 북에 대문을 열어주는 이적(利敵) 행위라고 맹비난하고 있습니다. 진영에 따라 제 이익에 맞춰 같은 합의 내용을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9·19 합의는 진보진영이 말하듯 획기적인 불가침 조약도 아니고, 보수진영이 주장하는 친북 이적행위도 아닙니다. 남북간 군사 합의는 지금까지 허다했고, 이번 합의가 조금 균질적이지 못해도 한미연합전력이 버티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운용적 군비 통제인 군사적 신뢰 구축조치가 대단히 빠른 속도로 시작됐을 뿐입니다. 성공하면 남북 화해를 향한 획기적 사건이 되고 실패하면 2017년에 버금가는 대치 상황으로 되돌아갑니다. 중요한 건 진영 입맛에 맞는 논리가 아니라 9·19 합의의 성공을 위한 이행입니다.

● 유럽안보협력회의와 시나이 협정의 성공…관건은 이행!

앞서 언급했듯이 9·19 군사 합의는 운용적 군비 통제(arms control) 중 군사적 신뢰 구축조치(confidence building measures)입니다. 군사적 신뢰 구축조치를 운용적 군비 통제의 전(前) 단계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군과 학계 전문가들은 대체로 운용적 군비 통제에 포함시킵니다. 군비 통제는 양측이 군사력의 운용을 조절하는 운용적 군비 통제와 물리적으로 군사력에 손을 대는 구조적 군비 통제로 구분됩니다. 구조적 군비 통제가 본격화되면 군축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운용적 군비 통제의 대표적인 해외 성공 사례는 1, 2차 세계대전 이후 말 그대로 대륙 전체가 폐허가 돼버린 유럽에서 나왔습니다. 알바니아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와 미국, 캐나다 등 35개국이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를 결성하고 협의한 끝에 2년 만인 1975년 8월에 헬싱키 최종합의서를 채택했습니다. 유럽 국가들이 자발적으로 병력 2만 5천 명 이상이 참가하는 훈련은 21일 전에 사전에 통보하고, 이런 훈련에 참관인을 초청하며, 군 인사 교류를 추진한다는 내용입니다.

헬싱키 최종합의서가 착실히 이행되자 또 2년여 간 논의를 해서 1986년 9월에 스톡홀름 협약을 내놨습니다. 그리고 1992년 3월에 비엔나 협약 92가 채택됐는데 주요 내용은 병력 9천 명, 전차 250대, 항공기 200소티 이상 훈련은 42일 전 통보 의무화와 지상군 1만 3천 명 이상 참가 훈련 시 참관인 초청 의무화입니다.

이슬람권의 전통적 강국인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의 시나이 군비 통제 협정도 유명합니다. 4차 중동전쟁이 끝나고 미국의 중재로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1973년 11월 휴전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어 시나이반도 군비 통제를 위한 협상이 시작됐고 2달 만인 1974년 1월 제1차 시나이 군사력 분리협정이 체결됐습니다.

시나이반도에 완충지대를 두고 3등분 해서 가운데는 유엔 긴급군이 비무장 완충지대로 관리하고, 동서 양쪽은 각각 이스라엘군과 이집트군이 군사력 배치 제한지대로 운용하는 방식입니다. 1차 협정이 잘 이행됨에 따라 1975년 9월에는 제2차 시나이 군사력 분리협정이 체결됐습니다. 비무장 완충지대와 군사력 배치 제한지대가 확대, 조정된 겁니다.

● 9·19 합의의 평가 기준도 이행!

언뜻 보면 유럽안보협력회의 19년 만의 성공과 시나이 협정 2년의 성과가 남북 9·19 군사 합의보다 나을 바가 없습니다. 9·19 합의는 체결 속도와 내용 면에서 유럽과 북아프리카의 협정들을 뛰어넘었습니다.

하지만 유럽안보협력회의와 시나이 협정이 성공한 군비 통제로 평가받는 건 속도와 내용이 아닙니다. 성실하고 완전한 이행입니다. 9·19 합의의 평가 기준도 당연히 이행 여부입니다. 김남부 안보기술연구원 북한본부장은 "남북이 그동안 체결한 합의서가 245개이고 그 가운데 군사 분야가 12개인데 내용은 모두 9·19 합의만큼 훌륭했다"며 "하지만 한 번도 지켜진 적 없고 그래서 이번 선언과 합의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9·19 군사 합의의 의의는 진보진영 주장과 보수진영 주장의 중간 어디쯤 있는 것 같습니다. 9·19 합의는 긴 여정의 출발점입니다. 남북이 철저히 합의를 이행해서 신뢰를 구축하면 9·19 합의는 역사적인 남북화해의 디딤돌이 될 테고, 이행을 못 해서 실패하면 또 한 번 북에 속는 난처한 사례로 기록될 겁니다. 9·19 합의는 냉정하게 합의를 이행할 대상이지 샴페인을 터트릴 일도, 무턱대고 비난할 일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