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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톰 브라운과 유치원 비리 그리고 국민 정서


(출처=톰 브라운 공식 홈페이지)
톰 브라운(Thom Browne)은 세계 패션의 중심인 미국 패션계에서도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히는 디자이너다. 한때 배우를 꿈꿨고, 뉴욕에서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매장의 판매 사원으로 일했다. 이후 디자이너로 변신했고 국내에는 폴로(Polo)의 디자이너로 알려진 랄프 로렌 (Ralph Lauren)과 함께 일하며 남성복 디자이너로 두각을 나타냈다. 2006년 '패션계의 오스카'로 불리는 CFDA(미국패션디자인협회) 올해의 디자이너, 2008년 남성 패션지 GQ가 뽑은 올해의 디자이너에 선정되며 정상의 반열에 올랐다. 자신의 이름을 딴 세계적 명품 브랜드를 가진 그의 나이는 올해 우리 나이로 53살에 불과하다. 국내 백화점 명품관만 가 봐도 가장 목 좋은 곳에 위치한 그의 매장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 브랜드의 백팩과 스니커즈가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사악한 가격 덕분에 매번 침만 삼키고 있다.

그 '톰 브라운'이 며칠 전 느닷없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 국회 국정감사에 사립유치원 이슈가 도마 위에 오른 날이었다. 국정감사 참고인으로 출석한 한 사립유치원 원장이 입은 옷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캄캄한 새벽부터 이렇게 일한다"며 머리에 쓴 헤드 랜턴에 눈길이 쏠렸지만 이후에는 옷에 관심이 집중됐다. 셔츠 깃 부분의 빨강, 흰색, 파랑으로 이뤄진 이른바 'RWB스트라이프'가 명품 브랜드인 톰브라운의 상징이라는 이유에서다. 일부 누리꾼의 수사력 덕에 같은 디자인의 셔츠가 63만 원이라는 사실도 SNS를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새벽마다 힘들게 일한다면서 63만 원짜리 셔츠 입고 다니냐는 냉소 어린 질타가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톰 브라운' 논란은 다음날 이 원장의 해명으로 일단락됐다. 한 방송사가 "시장에서 4만 원 주고 산 옷"이라는 원장 인터뷰를 내보내면서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의 억울한 표정도 함께 전파를 탔다. 톰 브라운에 주목했던 일부 인터넷 매체도 '알고 보니 짝퉁'같은 기사를 쏟아냈다. 정품이냐 짝퉁이냐를 떠나 한바탕 촌극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사립유치원 원장, 톰 브라운 셔츠
● '톰 브라운 사건', 그저 해프닝일까

그러나 '톰 브라운 사태'를 단순히 해프닝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구석도 있다. 이 유치원장이 국정감사장에 선 건 사립유치원 경영자로서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원장은 거의 평생을 유치원 운영과 교육에 몸담았다고 했다. 새벽마다 헤드 랜턴을 쓰고 유치원 마당의 풀을 뽑고 텃밭을 가꾼다고 호소했다. 그런 원장에게 '헤드랜턴'은 "우리가 이렇게 몸 바쳐 일하고 있다", 혹은 "우리는 비리의 온상이 아니다"라는 항변의 도구이자 스스로를 표현하는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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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헤드 랜턴은 대중에게 와닿지 않았다. 그저 '쇼의 도구'로 비쳤을 뿐이다. 대신 '톰 브라운 셔츠'만 남았다.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정품이고 짝퉁이고를 떠나 이제 대중에게는 무엇을 해도 곱게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앞에서는 '아이들 교육'을 외치면서 일부 세금으로 지원된 교비를 부도덕하게 사용하고, 여론이 좋지 않자 사유재산을 내세우며 폐원 또는 휴업을 거론하는 일부 사립유치원 원장들의 행태에 여론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일부 선량한 사립유치원 원장님들의 억울함과 당혹감도 이해는 간다. 우리나라 어린이 교육의 7할 이상을 담당하는 사립유치원이 어느 날 한 국회의원의 폭로와 언론 보도로 '공공의 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갑질에 도둑질에 횡령까지, 온갖 나쁜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최근 쏟아지는 여론의 관심과 분노는 부패한 공직자나 탐욕스러운 재벌, 악랄한 범죄자에 쏟아지는 수준, 혹은 그 이상이다. 실제 어떻게 유치원을 운영해왔는지는 뒤로 하더라도 아마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입고 나온 옷값까지 화제에 오르는 판이니, 당사자 입장에선 '마녀사냥'이란 느낌도 가질 만하다. "5천만 원이 간첩신고 포상금인데 비리유치원 신고 포상금이 수 억"이라며 "우리가 간첩보다 더 비싼 몸값인 걸 이제 알았다"는 이 유치원장의 발언에는 그런 인식이 담겨 있다.

그러나 대중의 반응은 대체로 사실의 무게에 비례한다. 이런 대형 이슈의 경우에는 대부분 그렇다. 설사 일부라고 하더라도, 이번에 알려진 사립유치원 비리 실태는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국가 지원금 섞인 교비로 명품백과 성인용품을 구매하고, 교육청 감사에 걸려 원장직에서 잘려도 다른 자리를 만들어 원장 노릇 계속하는 행태에 마치 재벌의 축소판 같은 친인척 경영 시스템 (시스템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등은 사실상 법을 무시하고 비웃는 '무법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일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사례가 많았다. 이후 대응도 최악에 가까웠다. '죄송하다'며 뒤로는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를 막아달라고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냈고 (기각됐다) 구구절절 해명은 변명에 가까웠다. 이러니 헤드 랜턴을 쓰고 읍소해도 국민 귀에 들릴 리 없다.

이번에 알려진 유치원 비리 가운데는 일정 부분 제도의 미비에 기인한 부분도 있다. 과거 국가 재정으로 어린이 교육을 모두 감당하기 어려웠던 시절, 상당 부분을 사립 유치원에 의존했다. 법적 잣대가 공공 기관에 적용되는 그것과 같을 수 없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에선 부조리 또한 오랜 역사와 구조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부조리를 합리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변화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과 규범에 어긋난다면, 부조리와 그 부조리를 양산한 구조 역시 비판하고 개선해야 마땅하다.

적폐와 부조리를 지적하고 개선하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복잡한 사회 주체의 이익과 입장이 상충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부조리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때가 많고 알면서도 쉽사리 칼을 댈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때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동력이 되는 건 꾸밈없고 분명한 시민 다수의 '여론'이다. 유치원 비리가 사회악으로 떠오른 건 그것이 정경유착이나 사법 농단 같은 거악에 우선해서가 아니다. 때마침 계기가 마련됐고 여론이 고조되면서 차례가 빨리 왔을 뿐이다. 이번에 알려진 실태를 살펴보면 어차피 한 번은 쨌어야 할 종기였다.
비리유치원 규탄 집회 (사진=연합뉴스)
● 진짜 '乙'은 사립유치원 아닌 학부모

이번에 유치원 비리 사태를 취재하면서 한 학부모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사태 초기 원장의 개인 비리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고 있던 학부모는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면서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해당 원장이 계속 유치원을 운영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아 재차 물었더니 대안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물론 정상화가 전제되어야겠지만 유치원이 문을 닫으면 아이를 보낼 데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의 마지막 말이 인상 깊었다. "어쩔 수 없잖아요. 저희가 을이니까요."

유치원 비리 사태의 '진짜 을(乙')은 누구일까. 아침마다 헤드 랜턴을 쓰고 유치원 텃밭을 가꾸다 일순간 지탄받는 사립유치원 원장들일까, 화나고 미워도 유치원 문 닫을까 전전긍긍하는 학부모일까. 아니면 아이들일까. 사실 '누가 더 피해자냐' 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원장도, 교사도, 학부모도, 또 세금을 내는 국민 그 누구도 피해보지 않는 대한민국 유치원 교육의 정상화다. 그 대전제 앞에선 톰 브라운 셔츠가 정품이고 짝퉁이고 여부는, 문제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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