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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154 : 그분이 오셨다!!-이기호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오빠 강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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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문제의 그룹 3.....사천원에 팔고 있는 그룹 3.....나는 마우스 휠을 돌려 내 소설책에 붙은 코멘트를 가장 먼저 확인했다.

'49. 이기호/병맛 소설, 갈수록 더 한심해지는, 꼴에 저자 사인본 (4000원-그룹 1, 그룹 2에서 다섯 권 구매시 무료 증정)' "


이 시대 최고의 라임 맞고 리듬 좋은 이야기꾼, 이기호의 5년 만의 신작입니다. 이기호 작가의 데뷔작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처음 읽고 '건필해 주세요! 이대로 계속 성장해 대가가 되세요!' 통성기도... 는 아니고 마음 깊이 기원한 지 어느 새 10년이 넘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는 이기호 작가는 뜨거운 초심은 여전히 굳게 부여잡은 채 그동안에도 착실히 몇 단계를 또 클리어하고 걷고 있는 느낌이라, 정말로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나는 어두운 안방 천장을 바라보며 중고나라 사이트 이야기를 했다. 박형서는 사천원이고, 나는 원 플러스 원 같은 취급을 받았다고...

"그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네...사람들도 많이 보는 사이트인데...갈수록 더 한심해진다니...좀 심하지 않니?"


아내는 누워 있는 내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다시 벽 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그냥 잊고 자... 당신 책이나 박형서 책이나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소설 깨나 읽어본 사람 같더라구. 한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지? 병맛이니, 꼴에 저자 사인본이니....."

아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혹시... 내가 아는 사람 아닐까? 일부러 나한테 모욕을 주려고... 난 왠지 꼭 그럴 것만 같거든....."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거 무슨 모욕죄 같은 거에 해당하지 않나? 남의 인격을 무시하고, 명예훼손하고, 비방하고, 그걸 공공연하게 드러내고....뭐 그러면 걸린다고 하던데....나는 아내가 대꾸하든 말든 계속 구시렁거렸다. 아내는 몇 번인가 한숨 내뱉는 소리를 내다가 어느 순간 휙 등을 돌려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인터넷 그만하고 소설이나 쓰라고! 소설을 안 쓰고 있으니까 그런 것만 보이지! 소설가가 소설 못 쓰면 그게 모욕이지, 뭐 다른 게 모욕이야!"

아내의 큰 목소리 떄문에 방바닥에서 자고 있던 둘째 아들이 자던 모습 그대로, 그러니까 오른손만 번쩍 치켜든 자세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얼른 두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혹시 박형서가 올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계속, 줄기차게, 쉬지 않고 해댔다."


시적이고 함축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생생하고 재치 넘치는 생활 묘사, 읽는 자체로 박자를 타게 되는 경쾌하고 경제적인 문장. 그리고 이 독보적인 유머감각...과 함께 낄낄낄 웃으며 이야기를 따라 모퉁이를 돌다 보면, 별안간 평소에 적당히 피해가던 세상과 스스로의 실체를 불편한 마음으로 대면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뭘 하다가 어? 하고 뭐가 지나간 듯 해서 내려다보니까 그게 뭔진 모르지만 살을 벤 거여서 피가 스물스물 조금씩 배어나올 때 있잖아요. 바로 그런 일을 당한 느낌입니다.

이 책에 실린 첫번째 단편 <최미진은 어디로>의 일인칭 화자 '나', 또는 이기호 작가 본인, 또는 그 둘 모두인지 아닌지 헷갈리게 (고안된) 이 사람에게 이런 모욕을 안겨준 중고나라의 열심회원 '제임스 셔터내려'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최미진과 제임스 셔터내려와 이기호 무료증정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질까요?

통화를 하고 있는 내 앞으로 겨울 점퍼를 껴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나는 계속 전화기를 든 상태에서 다른 한 손으로 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내밀었다. 그는 내 손에 들린 담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다시 광장 반대편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계속 담배꽁초를 줍고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우리 미진이도 잘 모르잖아요......"


사람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람답게' 만드는 두 가지 감정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측은지심'과 '수치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기호 작가는 그냥 그렇게 믿고 지나가고 싶은 나,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래, 그래도 내가 측은지심이랑 수치심은 좀 있지, 그러니까 그냥 적당히 사람다운 사람이지, 나 정도면" 하고 믿고 지나가고 싶은 나. 우리. 작가 자기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작가입니다.

이 책에 실린 중단편들은 모두 반전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게 은근하면서도 확고한 반전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헛웃음이 나는 모퉁이마다 나의 선의와 상대의 악의가 나의 악의와 상대의 선의로 반전이 되고, 결국 선의도, 악의라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먼지뭉치 같은 게 돼서 너와 내가 마주치게 된 그 고비들 위에 흩어지는 느낌입니다.

내 모습은 이 소설의 인물들 같지 않고, 내 처지는 이 사람들이 처한 것보다 더 선명하고 명확하고.. "좀 낫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도록, 책장 너머로 읽고 있는 얼굴에다 갑자기 커다랗게 확대경을 확 들이댑니다. 이런 게 아마 삶과 세상과 관계의 전체적인 그림을 좀더 넓고 깊게 조망하는 작가의 시선이라는 게 아닐까, 그 먼지뭉치들을 먼지뭉치들로 똑바로 인식하고, 집어들고, 고찰하고, 마음 깊이 받아들이면서 또 한 걸음 전진한 작가의 오늘이 보여 독자로서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교회오빠 강민호는 어떤 사람일까요. 어느 날 갑자기 히잡을 쓰고 출근하기 시작한 고향 후배 윤희는 교회오빠 강민호에게 뭐라고 말했을까요.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소녀 시절의 아내를 키워줬다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의 딸 한정희가 오갈데 없게 됐을 때 기꺼이 받아들여 아껴주던 어느 날, 정희가 다니는 학교의 선생님은 왜 '나'에게 연락해 왔을까요.

정말 이렇게 알알이 꽉 들어찬 재미있는 소설을, 통렬한 인식으로 이끄는 굽이굽이들에 이만큼의 웃음과 흡인력을 배치한 이야기를..'정말 좋은데 뭐라고 설명할 방법은 없고' 그저 읽지 않으면 독자의 손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ㅎㅎ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마저 절묘한 반전들을 폭발시키는 이기호 작가의 맺음말 들려드리며 이 소갯글 마칠까 합니다. 웃기고 울린 그 말 끝에, 작가는, 어쩌면, 이 세상에 문학이 있어야 하는 바로 그 이유를 누구보다도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자네, 윤리를 책으로, 소설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책으로, 소설로, 함께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보기엔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네.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우리가 소설이나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네. 이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다네. 진실이 눈앞에 도착했을 때, 자네는 얼마나 뻔하지 않게 행동할 수 있는가? 나는 아직 멀었다네."

*낭독을 허락해 주신 출판사 문학동네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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