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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소신, 의무, 품격…한 미국 보수 정치인의 죽음이 남긴 것들

[월드리포트] 소신, 의무, 품격…한 미국 보수 정치인의 죽음이 남긴 것들
지난해 7월 27일 오바마케어(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한 전 국민 건강보험) 폐지 법안에 대한 표결이 진행 중인 미 상원 본회의장. 여당인 공화당 소속의 80대 원로 의원이 천천히 의장석 쪽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려 반대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말기 뇌종양을 앓고 있었고, 얼마 전 종양으로 인한 혈전을 제거하기 위해 받은 수술 자국은 왼쪽 눈썹 위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건강 때문에 표결 참여가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지만 기어이 수술 뒤 회복되지 않은 몸을 이끌고 참여했습니다. 찬성 49표 대 반대 51표. 그가 찬성표를 던졌다면 가부 동수가 돼 상원의장을 겸임하는 펜스 부통령의 캐스팅 보트 행사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지만 좌절됐습니다. 이로써 집권 초기 트럼프 행정부의 '오바마 지우기' 작업에는 제동이 걸렸고, 원내 다수당인 공화당도 모양을 구겼습니다. 이 정치인은 "대안 없는 오바마케어 폐지에 찬성할 수 없다"며 반대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매케인
1967년 베트남 전쟁 중 작전에 나섰던 미 해군 소속 폭격기 한 대가 월맹군의 공격을 받아 추락하고 폭격기 조종사는 포로로 잡힙니다. 조종사는 낙하산 탈출 과정에서 팔과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치료는커녕 포로수용소에 수감돼 모진 고문과 구타를 당했습니다. 당시 생긴 상처는 평생의 장애로 남았습니다. 알고 보니 이 조종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해군 제독인 이른바 '금수저'였습니다. 이듬해 조종사의 아버지가 미 태평양사령관이 되자 월맹 군 당국은 그의 석방을 제안했습니다. 사령관 아버지와 조종사 아들은 "먼저 들어온 포로들이 석방되기 전에는 나갈 수 없다"며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조종사는 1973년 5년여의 포로 수감 생활을 견디고 나서야 비로소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포로수용소 소장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그를 '소신을 굽히지 않는 존경할 만한 수감자'였다고 회고했습니다.
매케인
2008년 미국 대선. 당시 공화당 후보는 혜성같이 등장한 민주당 오바마 후보에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유세 도중 지지자 가운데 한 명이 오바마의 인종과 성향을 문제 삼아 '오바마는 아랍인'이라고 주장하자 그는 "오바마는 품위 있는 미국 시민"이라며 제지했습니다. "오바마의 성공 자체만으로도 미국인들에게 희망을 줬다"는 그의 대선 패배 후 승복 연설은 명연설로 남았습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미국 국민 모두가 그에게 빚을 졌다"고 추모했습니다.
매케인
이미 아시겠지만 앞에 열거한 세 가지 사례의 주인공은 미국 공화당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입니다. 1년여 뇌종양 투병 끝에 지난 주말, 향년 81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미국에선 전쟁 영웅이자 보수 정치권의 거목인 그의 죽음에 여야, 진보 보수 가릴 것 없이 추모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뉴스 전문 채널에선 그의 삶을 조명하는 보도가 이어집니다. 사실 그를 성공한 정치인으로 정의하기엔 다소 애매합니다. 미국에서 6선 의원이 드문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는 두 번 대권에 도전했지만 각각 예선과 본선에서 고배를 마신 정치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의원 시절 국회 윤리위원회의 조사를 받은 금융 관련 스캔들도 있었습니다. 미국 정치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정치인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미국 국민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삶의 원칙들 때문입니다. 위의 세 가지 사례는 각각 그의 소신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리고 품격을 상징합니다. 보수 진영에서 특히 강조되는 정치인의 덕목이죠. 나오는 말들은 날 것 그대로고 온갖 스캔들로 바람 잘 날 없는 트럼프 시대를 사는 미국 국민들에게 매케인의 소신과 품격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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