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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MB 재판 ⑩ - '이팔성 비망록'에 꼼꼼히 써놓은 뇌물

이명박 전 대통령이 조금씩 잊히고 있습니다. '국정농단 사건'의 학습효과 때문인지, 전직 대통령 구속이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도 있습니다. 5월 3일,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첫 재판이 시작됐지만, 검찰 조사를 거치며 웬만한 것들이 다 나와 별로 새로울 게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하지만, 재판은 수사 과정에서 나오지 않았던 피고인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검찰과 피고인, 양측 논리가 팽팽하게 맞붙는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알려지기도 합니다. 법정에서 진실에 좀 더 다가설 수 있는 겁니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인기 없는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히지만, 20여 년 이상 제기된 이 전 대통령 관련 의혹의 진실에 좀 더 다가서기 위해 재판 실황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 압수수색 당시 메모를 삼키려 한 이팔성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한창이던 지난 2월 21일 아침. 검찰이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집으로 들이닥쳤다. 이팔성 전 회장의 서재에서 수사관이 명함 정도 크기의 메모지를 발견하자, 이 전 회장은 메모지를 급하게 입으로 집어넣고 삼키려 시도했다. 증거인멸을 막으려는 수사관이 이 전 회장과 실랑이를 벌이다 다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전 회장이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었던 건 어떤 내용이었을까.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사진=연합뉴스)

재판에서 공개된 이 메모에는 이 전 대통령의 사위 이상주 씨에게 14억 5천만원, 형 이상득 씨에게 8억원을 줬다는 내용이 나와 있었다. 이 전 회장이 작성한 비망록은 노트 15권에 달했고, 메모는 그 중 이상주, 이상득 씨에게 넘긴 돈만 추려 정리해놓은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판에서 '김영한 업무일지'와 '안종범 수첩'이 증거로 사용됐다면, 이번 재판에서는 '이팔성 비망록'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뇌물 혐의를 얽어맸다.

● 오렌지주스에 누봉차까지..'이팔성 비망록'

이팔성 전 회장은 '메모광'이었다. 요즘 말로 'TMI(Too much information)'라 불릴 만큼 쓸 데 없이 작은 정보까지도 꼼꼼히 메모해뒀다. 돈을 전달한 시간을 분 단위로 기록했고, 청탁 방법을 자세히 썼다. 그때그때 자신이 느낀 감정까지 담았다.

<이팔성 비망록 中>

2008년 1월 26일. 15시 30분 통의동 MB만남. 약 30분간 대화. 나의 문제를 비롯해서 어윤대 문제 등 기다리라고 했음.
(당선인 신분인 MB를 통의동 사무실에서 면담했다는 내용)

2008년 2월 23일. 12시 20분경 통의동 사무실에서 MB 만남. 약 2시간 동안 대기실에서 웨이팅. 김희중 항상 고마웠음. 지난번 대선 전 이야기함.
(대통령 취임 이틀 전 면담, 이팔성은 이 자리에서 본인이 MB에게 적극적으로 자금 지원 어필했다고 진술)

2008년 3월16일. 잠이 오지 않는다. krx(한국거래소 이사장) 탈락했다. MB가 원망스럽다.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취급하는지. 이상주 변호사 젊은 친구라 그렇게 처신하는지.

2008년 4월 3일. 13:30 청와대로 감. 박(영준) 수석실에 3번 방문했으나 오후4시 넘어서 곽 수석 만남. 박수석은 화났는지 전화도 안 받는다. 저녁 6시 윤 기업은행장 저녁 같이 먹고 OOOO(일식당)에서 저녁 먹고. 20:30분경 010-4XXX-7XXX로부터 전화 옴. 약속시간인 밤 10시가 어렵다고 연락 왔다. 본인은 경기도에 있기 때문에 12시가 좋겠다고. 20:45분경 김OO 부회장과 14층에서 차 마시고 밤 10시경 롯데에서 출발. 22:40분 쯤 3XXX marcia 차 OO엄마 인계받아. 김 부회장으로부터 인계받아 마르샤 차에 싣고 한강호텔주차장으로 향했다. 김 부회장은 뒤에서 기다리고 본인은 오른쪽에 주차하여 기다림. 전화가 왔다. 12시 30분경 도착하겠다고 함 거의 정시에 도착. 나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트렁크만 열어두라고 함. 김 기사 보냈음. 김 부회장 차로 한강호텔을 감. 1억5000이 든 두 가방을 김일호(이상득 비서) 차에 싣고 떠났음. 차를 보려고 했으나 어두워 넘버가 보이지 않고 차종류는 SM5로 보임. 김 부회장과 골목으로 나와 윤용로 행장이 준 책을 받고, 김 부회장이 지난번 14층에서 본 김일호라고 말했음.
(이상득 비서에게 3억이 든 가방을 차량 트렁크에 넣는 방식으로 전달했다는 내용)


● MB측, '비망록' 신빙성 의심

이처럼 돈을 준 정황과 돈을 주고 얻으려는 대가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비망록이 나오자, 이 전 대통령 측은 '이팔성 비망록'의 신빙성을 흔드는 전략을 폈다. 이팔성이 매일 일기형식으로 그때그때 써둔 것이 아니라, 금액을 적어둔 메모를 토대로 하루에 몰아서 비망록을 지어낸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또한 금액 액수 자체도 과장된 부분이 있다며, 국과수에 필압이나 필적을 감정받아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결국 검찰이 비망록 노트 원본을 들고 와 재판부와 변호인 측이 살펴보는 과정도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재판 중 발언)>

"이팔성이 서울시향 들어오기 전에는 저하고 교류가 없었다. 이팔성이 한 번도 저한테 선거운동 때 얼굴 비추지 않았다 저는 별로 관심 없던 사람이고. 당선자 시절 보니까 나를 만나려고 노력 많이 한 건 사실 같은데 보좌관들 매수하고. 나는 '누구를 했으면 좋겠다' 인사문제를 한번도 말한 적 없다. 대통령 자리는 그런 자리가 아니다. 그랬다면 있지 못했을 거다.

이팔성이 나를 궁지로 몰기 위해서 그렇게 진술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한다. 나한테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차라리 이팔성씨를 불러 나와서 거짓말 탐지기를 해서 확인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심정이다."


● 지어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상세한 기록

검찰은 청와대 출입 기록과 호텔 비즈니스룸 결제 내역 등을 통해 이팔성 전 회장의 비망록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했다. 비망록에 따르면 이 전 회장이 2008년 3월 7일, 3월 14일, 4월 3일, 4월 11일 오후, 4월 16일 오후, 4월 18일 오후에 청와대에 들어갔는데, 실제 출입기록을 확인해 봐도 시간대까지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팔성, 이명박 전 대통령


이팔성 전 회장이 이 전 대통령과 사위 이상주 씨에게 맞춤정장을 해준 사실 또한 해당 업체의 결제 내역과 일치했다.

2008년 1월 11일. 이 변호사(이상주)로부터 전화 와 10시경 귀가하므로 (정장) 가봉 요청함. 9시경 끝내고 OO일보사에서 OOO(맞춤 정장 샵 사장) 기다림. 만나서 10시경 22시경 삼청동 공관으로 감. 사위들 두 사람까지 가봉.
(이 전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 시절, 삼청동 안가에서 정장을 가봉하고 자신이 돈을 지불했다는 내용)


이팔성 전 회장은 자신이 느낀 감정은 물론 카페에서 어떤 음료를 시켰는지, 차량 번호와 전화 번호까지 집요하게 기록해뒀다. 그날그날 성실하게 작성하지 않고서는 기록이 불가능할 정도로 보였다.

2008년 3월27일. 성동조선 김OO 부회장 점심. 김일호비서관과 14:00 신관에서 만나기로 약속. cash delivery건. 나는 누봉차 그는 오렌지주스 시킴. 4월2일 세종문화회관 뒤 차도에서 20:00 연락하기로 하고 공중전화로 하겠다고 함. 그의 차는 SM5라고 하고 나는 체어맨5XXX라고 설명. 김OO 부회장에게 미리 얼굴이라도 멀찌감치 보라고 함. 나올 때 차 값 3잔은 내가 계산. 일단 3, 3, 4로 하기로 함.
(이상득 비서와 만나 3억, 3억, 4억을 차례로 전달하기로 이야기한 내용)


2008년,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측근과 가족을 접촉해 한 자리를 얻으려 꿈꿨던 이팔성 씨는 2008년 6월 우리금융지주 회장에 선임됐다. 그는 연임에 성공해 MB 정부가 끝난 뒤인 2013년 6월까지 회장직을 지냈다. 검찰의 공소내용에 따르면, 22억 6천만 원을 이명박 전 대통령 가족에 상납한 대가였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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