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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폭염 속 외국인 농업 노동자 노동환경, '남의 나라 사람 일' 아니다."

한낮 기온이 섭씨 38도를 넘나들던 지난주 화요일, 안산에 위치한 이주노동자 인권단체 '지구인의 정류장' 사무실은 몰려든 외국인 노동자들로 북새통이었습니다. 고장 난 낡은 에어컨 대신 너덧 대의 선풍기가 쉴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지만, 인파의 체온까지 더해져 사무실은 차라리 한증막에 가까웠습니다. 한 달에 하루나 이틀 주어지는 휴일. 이 휴일을 이용해 저마다의 억울한 사연을 들고 사무실을 찾은 이들 사이엔 경기도 이천의 한 농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농업노동자 A씨가 있었습니다.

● 생존을 위협하는 폭염의 농업 노동

경기도 이천시 ○○면 ××리 000-00. A씨의 근로계약서에 적힌 주소를 따라 외국인 노동자들 수십 명이 고용된 이천의 농장 지역을 찾았습니다. 광활히 펼쳐진 벌판엔 변변한 건물도 없이 터널 같은 비닐하우스들만 줄줄이 늘어서 있었고, 그 위엔 열기가 만들어낸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이 더위에 일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비닐하우스를 들여다보니 일렬로 열을 지어 바닥에 웅크린 채 김매기를 하는 이들이 보였습니다.

"쉴 데 없어요. 쉬는 시간 똑같아요". 40도에 가까운 찜통 하우스에서 풀을 뽑던 외국인 노동자는 '더운데 똑같이 일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폭염엔 쉬면서 일하라는 말이 정부 관계자들의 입과 온갖 매스컴에서 흘러나오지만, 외국인 농업 노동자들에게 폭염 속 적절한 휴식은 그림의 떡입니다.
불볕더위에 일하는 외국인 농업 노동자
농업 노동의 경우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에서도 제외돼 있습니다. '근로와 휴식 시간을 명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농업, 축산업, 어업 등의 1차 산업은 특례 업종으로 지정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1차 산업 노동자들에게 7월부터 시행된 52시간 노동 제도는 다른 나라 이야기일 뿐입니다.

폭염 속 야외 노동자 보호를 위해 정부가 권고한 물, 그늘, 휴식의 3대 요소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농촌 하면 떠오르는 원두막이나 큰 나무그늘은 벌판에 펼쳐진 요즘의 대규모 농장에선 찾기 어렵습니다. 태양에 달궈진 컨테이너 가건물 사이로 동남아 노동자들은 쉴새 없이 과일 박스들을 나르고 있었고, 뙤약볕을 견딜 수 없어 얼굴 전체를 둘러친 수건 사이로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가 보였습니다.

꾸역꾸역 일을 마친다 해도 제대로 쉬기 어렵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 숙소 시설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나 관리 감독이 없어, 이들 대부분이 더위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는 비좁은 가건물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화장실과 취사시설, 수납 시설이 좁은 공간에 몰려 있는 이들의 숙소엔 악취와 벌레들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불볕더위에 일하는 외국인 농업 노동자
● 농장주들도 '폭염에 죽을 맛'…폭염 속 농업 노동 환경 개선 정부가 나서야

지난해 폭염에서 축사에서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들이 잇따라 더위를 먹고 숨졌습니다. 올해도 담배 밭에서 일하던 외국인 노동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 다시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폭염 속 농업 노동자들이 극한의 환경에 내몰리는 데에는 한국인 농장주들의 책임도 일정 부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온전히 그들에게 책임을 떠맡기는 건 현실적으로도, 당위적으로도 어려워 보였습니다. 많은 수의 한국인 농장주들도 사상 최악의 폭염에 직격탄을 맞고 있는 또 하나의 피해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농장에서 만난 한 농장주는 "심각하게 농사를 접을 생각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농사 인생 40년 만에 이런 적은 처음"이라는 그는, 올해의 유난한 태양이 작물마저 모조리 태워 죽여 가뜩이나 지고 있는 빚이 더 무거워 질 것을 걱정했습니다. 말라비틀어진 밭고랑만큼이나 깊숙이 패인 농민의 얼굴을 마주하며, 말도 안되는 노동 환경의 책임을 이들에게 오롯이 묻는 것은 '정(丁)의 짐을 병(丙)에게 지우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폭염 대책도 '도농격차'…그늘막 하나 찾기 어려운 농장들

'이번 폭염은 재난'이라는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이 연일 고강도 폭염 대책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농촌의 농장 지역에선 아직 서울의 횡단보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자체 설치 그늘막 하나도 찾아보기 힘든 실정입니다.

농업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선 일회성 처방이 아닌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국제노동기구(ILO) 등 국제기구는 우리나라 농수산업 분야에서 강제 노동과 초장시간 노동 등 인권 침해가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꾸준히 지적해왔습니다. 이와 관련해 최홍엽 조선대 법대 교수는 "농업 노동자가 근로기준법에서 제외돼 무한 노동도 합법인 모순을 근본적으로 손봐야 한다"며 "1차 산업 노동자들에 대한 근로 기준법 조항을 상당 부분 손질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불볕더위에 일하는 외국인 농업 노동자
● "외노자 노동 환경, 내국인 취약 계층 노동환경과 직결"

외국인 농업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이 꼭 '다른 나라 사람들'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외국인 노동자들보다는 적지만, 농촌 지역 농장에는 지역사회의 저소득층 노인들도 상당수 일하고 있습니다. 제가 찾은 이천의 농장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의 할머니들이 일당을 받으며 폭염 속에서 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을 회관에서 만난 지역 주민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할머니들이 이따금씩 일을 하러 간다"며 "밭에서 일하다가 쓰러졌다는 말들이 여름이면 자주 들린다"고 말했습니다. 폭염 속 논밭에서 일하던 노인들이 쓰러졌다는 뉴스를 보고 '집에 계시지 왜 밖에 나와서...'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더위에 논밭에서 일하다 쓰러지는 노인들은 그 더위에 '일하러 나가야만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최홍엽 교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은 다른 나라 사람들 이야기'라는 인식은 편협한 사고라고 지적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가려고 하지 않는 노동 시장의 최하층을 메꾸고 있는데, 이 최하층 노동시장의 환경이 악화되면 그 영향이 한국인 취약 노동계층에게 전이된다는 분석입니다.

최 교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열악한 조건으로 장시간 노동을 해버리게 되면 한국인 사업자 입장에서는 한국인을 써야하는 경우에도 이주노동자를 희망하게 된다"며 "이런 상황에서 고용주들은 한국인 취약계층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보다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방향을 택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입추가 지났지만 더위는 식을 줄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도 외국인을 포함한 농업 노동자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극한 환경에 내몰릴 겁니다. 폭염의 열기는 업종과 국적, 지역을 가리지 않고 덮쳐오는 만큼, 정부의 폭염 대책도 좀 더 폭넓은 범위에서 설계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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