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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제주 4·3 사건, 70년이란 시간이 지나

[취재파일] 제주 4·3 사건, 70년이란 시간이 지나
취재를 하다 보면 얼른 끝내고 뒤도 돌아보고 싶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반대의 사례들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생애에 걸쳐 발생한 사건을 고작 며칠, 불과 몇 시간 이야기를 듣고 떠나기엔 미안하기도 하고 못내 아쉽기도 한 취재들이 대체로 그렇습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지난 한 달 동안 이처럼 의미도 있고 여운도 남는 현장을 다닐 수 있었는데, ‘이별이 아쉬워 쓰는 취재파일’이란 테마로 뉴스에 담지 못한 내용들을 조금 더 풀어보려 합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바로 '제주 4·3 사건'입니다.

● 여전한 상처
제주 4·3 사건, 희생자 위령단
2박 3일간의 출장을 앞둔 전날 저녁. 4.3 사건을 경험한 할머님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섭외는커녕 제가 누군지 설명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70년이란 시간이 지나다 보니 연로하신 탓에 제 말소리를 잘 듣지 못하시기도 했고, 한편으론 제겐 너무나 생소한 제주도 사투리와 억양이 불쑥불쑥 나오면서 대화가 뚝뚝 끊기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아무도 섭외하지 못한 채 저는 다음날 아침 제주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이야기를 이어가는 와중에 잠시 ‘형님’에 대해 설명을 드려야겠습니다. 방송 기자들이 현장에 나갈 땐 보통 카니발이나 스타렉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이 안에는 영상 취재 기자, 오디오맨, 그리고 저 같은 취재기자가 탑승합니다. 이 차를 운전해주는 분들을 형님이라 부릅니다. 형님까지 이렇게 넷이 하나의 팀처럼 현장에 이동해 취재 및 제작을 합니다.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 현지에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도 형님이었습니다. 다행히 형님은 제주도 출신이어서 전날 섭외를 실패한 할머니들의 연락처를 알려주면 능숙한(?) 제주도 말씨로 저를 대신해 섭외까지 도맡았습니다. 형님이 아니었으면 제주에 가서도 '4.3 사건'의 근처에 이르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도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4.3 사건은 남한 단독 선거에 반대한 남로당원들이 무장봉기를 일으키면서 대립이 본격화됐는데, 무장대는 산으로 숨고 군과 경찰, 민간단체로 구성된 토벌대는 해안가에 머물며 무장대와 충돌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산간지역과 해안가 사이에 있는 ‘중간산지역’은 충돌의 무대가 됐습니다.

낮에는 토벌대가 올라와 무장대에 협조한 마을 주민들을 찾는다며 탄압하고, 밤에는 무장대가 내려와 토벌대에 협조했다며 주민들을 힘들게 한 겁니다. 제가 만난 고순호 할머니도 토벌대에 맞아 허리뼈가 튀어나와 등이 굽었고, 무장대의 죽창에 찔려 사경을 헤맸습니다. 70년이 지나도록 할머님의 몸엔 그 상처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고순호 할머니를 인터뷰를 하는 와중에 이웃에 있는 다른 할머니들도 방송국 카메라가 신기하셨는지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뭣 때문에 왔느냐며 물어보시기에 4.3 사건을 취재하러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이내 이야기를 풀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토벌대한테 목이 잘렸어. 어릴 땐 아버지 몸이랑 목이랑 떨어져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까 토벌대가 와서 아버지 목을 잘랐던 거야."

"우리 남편은 무장대 죽창에 찔려 죽었고, 우리 아버지는 토벌대 총에 맞아 돌아가셨어. 4.3때문에 우리 집안 남자들은 씨가 말랐어."


담담하게 쏟아내는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비현실적으로 들렸습니다. 내 몸 하나 다치지 않았더라도 저런 식으로 가족을 잃었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웃들이 이처럼 모두 4.3 사건의 피해자라면, 어디까지가 ‘4.3’이고, 어디서부터 ‘4.3 이후’인지 정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7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저는 4.3의 끝자락에서 그 날들을 취재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만큼 상처의 기억은 제주 곳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제주 4.3 평화공원(사진=연합뉴스)
4.3 사건 당시 제주도민은 19만 명 정도였는데, 희생자는 3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4.3 사건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수면 위로 올라왔습니다.

"4.3이 끝나고, 고향을 떠났어. 시내로 이사 와서 지금까지 살았지만, 내가 '4.3 피해자였다'고 말한 건 최근이야. 왜냐하면 너도나도 토벌대고 무장대였으니까, 오랫동안 무서워서 말도 못하고 살았던 거야." -고순호 할머니 인터뷰 中-

프로이트의 <히스테리 연구>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 언어가 행동을 대신할 수 있다. 즉, 언어의 도움만으로 효과적으로 감정을 소산 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은 오랜 시간을 한마디 말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4.3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누구에게도 피해 경험을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하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조차 없었던 겁니다.

물론 피해자들이 적극적으로 입을 열지 못했던 데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극도로 경직됐던 한국 사회의 분위기 탓도 있을 겁니다. 분단 이데올로기를 동력 삼아 유지됐던 독재정권들에게 '4.3의 피해자'는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여정부에서야 4.3 사건에 대한 정부차원의 진상조사가 이루어졌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서 국가권력의 잘못이었다며 피해자들과 제주도민에 사과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덕분에 피해 경험이 막힘없이 드러날 수 있었지만, 이마저도 4.3의 상처를 어루만지기엔 부족하다고 평가받습니다.

진상조사를 통해 우리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에 대해 '4.3 사건'이란 이름을 붙이고, 개념화 혹은 실체화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성격 규정은 안 된 상탭니다. 즉, 우리는 '4.3'에 대해 '사건'이라 부를 뿐, '학살'이었는지, 아니면 '항쟁'이었는지, 그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지 여전히 이름 지어줄 수 없는 겁니다.('4.19'나 '6.10'과 비교해보면 어떤 의미인지 금방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성격 규정이 안 됐다는 의미는 곧 책임에 대해서도 물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한 학살이었다면, 미군정(군)과 이승만 정부(경찰)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텐데, 분단의 이데올로기에 더해 동맹국의 눈치까지 봐야 하는 상황에선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죠. 결론적으로 4.3에 대한 사과는 이루어졌을지 몰라도 사회적 차원의 반성은 단연코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4.3의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읽다 보면, 그녀가 바라는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마주할 때 마땅히 지녀야 할 윤리’가 나옵니다. 현대사회에선 타인의 고통조차 미디어를 통해서 소비되고 있고, 그로부터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허무한 결론에 이를 수도 있지만, 그녀는 ‘본다’는 행위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길 바랍니다.

70년이 지나 4.3에 대해 취재하며 저 역시 국가권력이 저지른 과오를 한 사회가 외면할 때 개인이 경험할 고통의 크기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리포트나, 취재파일을 통해서 또는 직접 제주를 경험함으로써 다른 누군가도 4.3을 가로질러 무언가를 응시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저처럼 이별이 못내 아쉬울 겁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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