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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박종철 고문치사 당시 지휘관 '31년 만의 고백' (더저널리스트)

※ SBS 뉴스의 새로운 컨텐츠 '더 저널리스트(THE JOURNALIST)'. 이번 순서는 최근 영화 1987로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취재하고 있는 기획취재부 김종원 기자입니다. 김종원 기자는 당시 가해자들을 추적하다가 박종철 열사가 모진 고문으로 숨졌을 때 수사단장을 맡고 있던 전 모 씨를 만났습니다. <편집자 주>

■ 영화 '1987'이 화제입니다. 당시 가해자들을 추적하면서 드디어 한 사람을 만났다고요.

1987이라는 영화가 나오고 흥행을 하면서 사람들의 관심도 커졌습니다. 지난해는 박종철 열사 30주기였고 올해는 31주기로 많은 인터뷰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은폐돼있던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데 기여했던 당시 의인들, 영화에서는 배우 하정우 씨가 맡았던 최환 검사라거나 유해진 씨가 맡았던 교도관 분들에 대한 인터뷰는 굉장히 많이 나왔어요. 그런데 고문에 직접 가담했던 고문 경찰관들에 대한 인터뷰는 없더라고요.

그들은 지금 뭐 하고 있을까? 31년이나 지났는데 그동안 어디서 무슨 생활을 했으며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추적하기 시작했는데 사실 이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이분들이 31년간 은둔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다시 찾는 과정도 굉장히 어려웠는데요. 그중 일부에 대한 근황을 알게 됐습니다. 몇 분은 제가 직접 찾아가서 만나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그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이해가 더 잘 되실 텐데요. 당시의 경찰 직제로 설명을 드리자면 제가 이번에 만난 분은 한마디로 말해서 당시 남영동에 있는 대공분실의 2인자였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경찰청장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당시에는 경찰의 최고 수장을 치안본부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영화에서 배우 우현 씨가 맡았던 당시 강민창 치안 본부장이 경찰의 최고 수장이었고 그 밑에 여러 분과가 있었습니다. 분과 중에 대공 수사를 하는 대공 담당 처장이 배우 김윤석 씨가 연기한 박처원이라는 인물입니다. 박처원이 남영동의 1인자였고 그 바로 밑에서 수사단장을 맡았던 전 모 씨를 어렵게 수소문을 해서 만나 뵐 수가 있었습니다.

■ 이번에 만난 사람이 30년 넘게 은둔 생활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던가요.

주소만 입수한 채로 그분을 찾아가는데 지방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인터넷에 주소를 입력해서 지도를 찾아봤더니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닌 도로가 나왔습니다. 전화번호도 입수했는데 핸드폰이 아닌 집 전화더라고요. 그래서 유선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는데 없는 번호라고 나와서 사실 '가지 말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사실 살아 계신지도 모르고 주소도 명확하지 않고 전화도 결번이라 지방까지 굳이 내려가야 하나 고민되더라고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가보자'해서 갔는데 인터넷 지도가 잘못됐던 거더라고요.

찾아갈 때도 산길에 눈이 쌓여 있었어요. 그 길을 차로 한참 올라가다가 더 이상은 차도 올라갈 수 없는 길이 나와서 스텝과 함께 한참을 걸어 올라갔습니다. 300m 정도를 걸어 올라가니까 빨간 벽돌집 하나가 나오더라고요. 명패도 없는 그 집을 보자마자 '아, 이곳이구나'라는 직감이 들었어요. 그냥 빨간 벽돌집인데 안에 인기척도 안 느껴지고 사람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집 앞에 눈은 쓸려져 있는 것을 보고 문을 두드렸는데 처음에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집 주위를 돌면서 안에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다가 할아버지 한 분이 안에 계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본인은 다리가 불편해서 나오질 못하니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들어가서 "방송에서 나왔다"고 말씀을 드리자마자 무슨 일 때문인지 직감하셨는지 "말을 하기 싫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처음에는 인터뷰를 거절하셨어요. 그래도 집에 오랜만에 사람이 찾아와서 그런지 조금씩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시더라고요. 하지만 녹음이나 인터뷰 형식은 원치 않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한마디로 꽁꽁 숨겨진 은둔 생활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박종철 열사 사건이 터지고 경찰에 사표를 낸 뒤 서울에 있는 집과 재산을 처분해서 지금 살고 있는 땅을 산 거예요. 만평이 좀 넘는 땅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데 몸을 다치기 전까지는 한 번도 인부를 동원한 적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이유가 31년 동안 아무 일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과거의 생각이 계속 떠올라 견디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나마 혼자 일을 할 때는 그런 생각이 안 나서 그랬다는 겁니다.

[전 모 씨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수사단장]
"여기 와서 이 동네 사람들하고 누구 만나지도 않고 20년을 사는 동안 여기서 만나는 사람 딱 세 사람이야. 농약을 사야 되니까 농약상, 보일러를 해야 되기 때문에 보일러 상, 그다음에 중국 요릿집 이렇게 딱 세 집이지. 핸드폰도 없거든 나는. 일간지도 30년을 보지 않았어. 신문도 안 봐요. 큰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면서 죄책감으로 그냥 자중하며 지금까지 살았어요."

■ 당시 고문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처벌받기도 했는데 이 사람이 처벌을 면한 이유는 뭔가요?

당시 사회적으로 박종철 열사 사건은 한마디로 '난리가 났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큰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경찰이 특정 인물을 봐주고 그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남영동의 2인자였던 전 모 씨는 구속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려면 먼저 그가 경찰로 근무할 당시의 이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 씨는 4.19가 터진 이후 교사를 하다가 경찰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경위로 경찰 생활을 시작했는데 경위 계급장을 달자마자 일선 경찰서가 아닌 경찰학교에 발령받았다고 해요. 경찰학교에서만 강의한 게 아니라 당시 연세대나 서강대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시간강사로 강의까지 했습니다. 한마디로 경찰 교육자로서 이력만 있었던 겁니다.
[단독] 박종철 고문치사 지휘관 '31년 만의 고백' / 더저널리스트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사경력이 없는 전 씨가 1986년 말에 남영동 대공분실 수사단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전 씨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남영동은 처음부터 대공분실 쪽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계속 업무를 이어왔다고 합니다. 박처원이나 그 밑의 유정방, 박원택, 조한경 등 대공분실에서 학생들 또는 민주투사들을 심문하고 수사한 수사관들도 마찬가지인 상황이었죠.

그런데 이런 기관에 2인자로 수사경력이 하나도 없고 학자 스타일인 전 씨가 간 겁니다. 그래서 전 씨 본인도 이유가 궁금했는데 당시 학생 운동이 워낙 크게 번지던 시기라서 고문만으로는 해결이 안 됐나 봐요. 그런데 전 씨가 마르크스에 대한 논문도 썼고 대학생들도 많이 가르쳐봤으니 사상전환을 시키라는 의미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전 씨 이야기에 따르면 본인은 수사에 개입을 하고 이럴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단독] 박종철 고문치사 지휘관 '31년 만의 고백' / 더저널리스트
■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숨진 날 이 사람이 회고한 당시 남영동의 상황은 어땠습니까?

한 번은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남영동에 와서 대공분실 사람들 전체와 식사를 하는 만찬 자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강 치안본부장이 공개적으로 전 씨한테 "전 단장이 오고 나서 검거율이 많이 떨어졌다"라고 공개 질타를 했다고 해요. 사실 요즘도 군대 같은 조직에서 공개 질타를 받으면 크게 다가올 수 있거든요. 그런데 당시 1980년대처럼 엄혹한 시기에 경찰의 수장이 부하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질타를 했다는 건 한마디로 '더 잡아가 고문해라' 이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실제로 그런 압박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배우 김윤석 씨의 카리스마 있는 연기로 화제가 됐던 박처원 같은 인물은 대공 수사만 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전 씨의 역할이었던 교화 등은 내부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 씨는 본인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부임 5개월 차에 박종철 열사 사건이 터진 겁니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열사가 사망했던 날에 대해 전 씨가 회상했는데요. 그날 오전에 사무실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는데 유정방 과장이 뛰어들어왔다고 합니다.
[단독] 박종철 고문치사 지휘관 '31년 만의 고백' / 더저널리스트
[단독] 박종철 고문치사 지휘관 '31년 만의 고백' / 더저널리스트
그때 전 씨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박처원 처장을 찾아갔는데 그때 박 처장이 자리를 비웠다고 해요. 그래서 지금으로 말하면 경찰청장인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찾아가서 대학생이 쓰러졌다는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경찰에 비상이 걸렸고 본인은 수사 책임을 물어서 바로 사직서를 냈다는 게 전 씨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그 사직서가 바로 수리되진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직위해제 됐다가 1년이 지난 1988년도 경찰을 그만둔 것으로 확인됐고 전 씨는 그날 하루가 급박하게 돌아갔다고 기억했습니다.

[전 모 씨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수사단장]
"당시에 나는 생각했어. 내 일생 동안 경찰하면서 경찰하는 동안에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 그걸 회피하려고 하면 비겁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 책임을 지고 경찰직을 물러나는 거 밖에 더 다른 길이 있어? 공직에서 사표를 쓴다는 것은 공직에서 사망 신고를 하는 것과 같은 거야."

우선 당시 검찰 수사에서 전 씨가 기존에 있던 대공분실 식구들에게 좀 무시를 받는 입장이 아니었는지 직접 확인했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쓰는 말로 하면 이른바 '은따(은근한 따돌림)' 같은 위치가 아니었는지 검찰이 전 씨에게 물어봤을 정도로 대공분실에 그런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실제로 수사 쪽에서 일한 적 없는 사람이 부임한지 5개월 밖에 안 된 상태에서 실질적으로 고문이나 조작, 은폐에 가담하지 않았을 거라고 당시 검찰은 판단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전 씨가 유일하게 구속이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 씨는 이제 나이가 85세가 됐습니다. 저희가 만났을 때 건강이 정신은 굉장히 맑으신데 이제 다리가 좀 많이 불편한 상태였고 과거에 대한 생각을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본인이 어쨌든 수사에 책임이 있는 수사단장이었고 직속 부하들이 무고한 대학생을 죽음에 이르게 했기 때문에 31년간 죄책감에 한시도 시달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전 모 씨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수사단장]
"내가 죄인이지… 왜 그것을 못 막았나. 그런 죄책감을 가지고 사는 건 틀림없어."

◆ SBS 김종원 기자 / 기획취재부
김종원기자 마무리 이미지
전 씨 이외에 당시 수사관들이나 그들을 직접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도 계속 취재를 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기사화가 가능하다면 기사로도 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 영화 1987에 등장했던 인물들이나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에 관련된 대공분실 수사관이나 경찰 관계자 또는 근황을 알고 계시는 분들에 대해 제보를 주시면 찾아가서 정중하게 요청하고 상황을 물어봐서 기사화하도록 하겠습니다.

(기획 : 정윤식 / 구성 : 안준석, 장아람 / 촬영 : 정상보 / 편집 : 이홍명, 한수아 / 음성대역 : 최종률 연극연출가 겸 배우 / 내용정리 : 박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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