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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난방기 동파로 물바다된 아파트…보상은 '세입자 100%'?

[취재파일] 난방기 동파로 물바다된 아파트…보상은 '세입자 100%'?
겨울이면 수도관이나 배관 동파로 고생하는 이웃들을 주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보통은 ‘날씨가 많이 춥구나’하고 생각하는 정도에서 그칩니다. 하지만 동파가 ‘내 일’이 되어 눈앞에 닥쳤을 땐 문제의 복잡함과 성가심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수도관이나 난방기 배관이 동파돼 누수라도 생기면 아랫집, 심하면 그 아랫집에까지 피해가 갑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물이 아래층으로 흐르도록 설계된 건물이 어디 있습니까? 임대인 책임 아닙니까?’라고 소리쳐봐도 '피해 보상'이라는 현실의 벽에 가로 막힙니다. 심지어 아랫집에선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닦으려 밟고 올라가다 깨져버린 책상 유리까지 모두 보상해내라고 재촉합니다.

그런데 임대인은 ‘관리를 안 한 당신의 잘못이니, 피해 복구 비용 전부를 부담하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비용이 수 백만 원에 달한다면, 세입자는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월세를 내며 살아가는 세입자들 가운데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들은 “지금 수중에 있는 돈이 얼마지”하며 발만 동동 구르게 됩니다.
 
다음은 일을 시작한 지 일 년도 채 안된 25살 A씨의 이야기입니다. A씨는 지난달 12일 직장에서 오피스텔 관리인의 전화를 받고 ‘손이 덜덜 떨렸다’고 말합니다. 관리인은 A씨 집의 난방기 배관이 동파됐다고 말했습니다. “집이 물바다가 됐다. 물이 흘러 아랫집들까지 물바다가 됐다. 수 백만 원에 달할 피해액을 모두 보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A씨 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창문이 열려있더라”는 겁니다.

A씨는 창문을 열고 간 적이 없다며 반박했습니다. 하지만 관리인의 이야기를 들은 임대인은 “창문을 열어 놓은 채 사흘간 집을 비워둔 건 기본적 관리 책임을 다 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관련된 피해를 모두 보상하라”고 말했습니다.

● 발목 잡는 '임대차 계약서'?
배관 동파.. 세입자 책임?

‘임차인의 관리하에서 시설물이 고장 났을 때는 계약이 끝나기 전까지 해당 시설물 등을 원상복구 해놓도록 한다.’ 임대차 계약서에 쓰여있는 이 조항은 임대인이 A씨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돌리는 근거로 사용됐습니다. A씨 손으로 직접 서명한 임대차계약서였습니다. 그날 저녁 퇴근 후 집에 돌아간 A씨는 물에 젖어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얼음장 같은 방에서, 퍼내고 남은 물을 모두 닦고 젖은 가구들을 대충 정리한 뒤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갔습니다.
 
“시설물이 고장 났을 때 임차인은 이를 원상복구 해놓은 뒤 나가야 한다”고 명시되어있는 임대차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면 수리 비용을 100% 내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는 걸까요? 답부터 드리자면 그건 아닙니다.

안서연/ 법률구조공단 안서연 변호사
"원칙적으로 임대인은 목적물을 임차인이 잘 사용ㆍ수익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특히 A씨의 경우에는 난방이나 배관ㆍ수도, 즉 건물의 기본적인 구성 부분이기 때문에 임대인이 임차인한테 잘 사용할 수 있도록 수리를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임대인에게는 임차인이 시설물을 불편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특히 임차인이 단기간에 망가뜨리거나 파손하기 힘든 주택의 '기본 구성 부분'의 경우 더 그렇습니다. 법무부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주택임대차표준계약서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4조 3항. 임대인과 임차인은 계약 존속 중에 발생하는 임차 주택의 수리 및 비용 부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한다. 다만, 합의되지 아니한 기타 수선 비용에 관한 부담은 민법, 판례 기타 관습에 따른다.
-임대인 부담: 난방, 상하수도, 전기 시설 등 임차 주택의 주요 설비에 대한 노후, 불량으로 인한 수선은 민법 제 623조, 판례상 임대인이 부담하는 것으로 해석됨
-임차인 부담: 예컨대, 고의, 과실에 기한 파손, 전구 등 통상의 간단한 수선, 소모품 교체 비용은 민법 제 623조 판례상 임차인이 부담하는 것으로 해석됨

 
즉, 난방이나 상하수도, 전기 시설과 같이 생활에 필수적이고 관리 비용이 많이 드는 이른바 ‘주요 설비’는 기본적으로 임대인이 관리해야 합니다. 시설 노후나 건물 구조 등 불가피한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는 임대인이 해결하는 것을 기본으로 합니다. 

● '주요 설비' 관리, 기본적으로 임대인 책임은 맞지만…
배관 동파.. 세입자 책임?
그렇다고 임대인이 수도관이나 난방기 등의 동파를 100% 책임져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수도관 동파 문제가 복잡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함께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요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노후 정도를 살펴봐야 합니다. 아래는 서울시가 지난 2011년 보일러 등 동파 책임과 관련해 임대인과 임차인 사이 분쟁을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합의 가이드라인입니다. 보일러나 수도관 등의 연식을 1년에서 7년 사이로 나누었습니다. 

-1년 미만: 감가상각률 0% (세입자 100% 부담)
-1년 이상~2년 미만 세입자 배상액: {구입가-(구입가x0.14)}x1.1 
-2년 이상~3년 미만 세입자 배상액: {구입가-(구입가x0.29)}x1.1 
-3년 이상~4년 미만 세입자 배상액: {구입가-(구입가x0.43)}x1.1 
-4년 이상~5년 미만 세입자 배상액: {구입가-(구입가x0.57)}x1.1 
-5년 이상~6년 미만 세입자 배상액: {구입가-(구입가x0.71)}x1.1 
-6년 이상~7년 미만 세입자 배상액: {구입가-(구입가x0.86)}x1.1 
-7년 이상: 감가상각률 100% (임대인 100% 부담)

서울시가 공정거래위원회의 소비자 분쟁 해결 기준을 참고해 보일러를 몇 년 동안 사용했는지에 따라 감가상각률을 적용한 겁니다. 시설이나 장비가 더 오래될수록 임대인의 부담 비율이 커지고, 연식이 얼마 되지 않은 설비일수록 임차인의 비용 부담 비율이 높아집니다. 임차인의 관리 소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겁니다.

서울시는 '7년'이 넘은 시설ㆍ설비의 경우, 임차인이 관리 의무를 다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더라도 임대인이 100% 피해를 보상하는 기준으로 정해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는 “해당 표는 상담시 ‘권장’하고 있는 것일뿐, 임차인 과실을 면밀하게 따져본 뒤 부담 비율을 결정하는 게 옳다”고 덧붙였습니다.)
 
두 번째는 집의 구조입니다. 시설뿐 아니라 건물이나 집이 어떻게 돼있는지, 기본적으로 동파에 취약한 구조로 돼있는 건 아닌지도 복구 비용 부담을 결정하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날씨가 추울 때 여러 집이 함께 동파됐다면 집의 구조 자체가 한파에 취약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난 2013년 이와 관련한 판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동파로 B씨가 살던 수도관이 파손됐습니다. 임대인은 B씨에게 관리 부실 책임을 돌렸고, 수도관 수리비 92만원을 제한 뒤 보증금을 돌려줬습니다. B씨는 부당하다며 A씨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승소했습니다. 본래 아파트 베란다 창이 홑겹인 탓에 수도관 동파가 잦고, B씨네 집의 수도관이 동파됐을 때 이웃 집 3~4곳도 같이 동파가 발생한 점이 인정된 겁니다. 재판부는 동파가 아파트 구조상 문제로 발생했다고 보고 집주인이 수리비를 부담하는 게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셋째, 이 모든 것은 임차인이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했느냐 여부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 의무(선관주의의 의무)’란 세입자가 일상에서 본인의 물건을 관리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임대인과 임차인의 책임 비율을 따질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요소입니다. 겨울철 수도관이나 난방기 동파를 막기 위해서 물을 켜놓는다든지, 난방기 수도 밸브를 살짝 열어둔다는 등의 조치들이 모두 ‘선관주의의 의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임차인, '선관주의 의무 다했다' 증거 남겨야
배관 동파.. 세입자 책임?
법률구조공단 안서연 변호사는 "밖에 나갈 땐 창문을 닫아두고, 수건으로 수도관을 감싸두는 등 세입자로서 할 수 있는 일반적인 수준의 주의 의무를 모두 수행했다는 증거를 남겨둬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동파의 위험이 있는 추운 날씨에는 시설물 관리 의무를 다 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을 만한 모습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촬영해 남겨두는 것을 추천했습니다.
 
위에 등장했던 A씨의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A씨는 결국 몇 주간의 실랑이 끝에 임대인과 5:5의 비율로 시설 수리 비용을 내기로 했습니다. 결국 A씨가 정말 창문을 열어 놓았던 건지, 기본적인 관리 의무를 수행했는지 입증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배관이 동파된 A씨 집 난방기는 20년 된 난방기입니다. 서울시에서 제시하는 감가상각 비율로 따지면 A씨는 단 한푼의 수리 비용도 내지 않아도 됩니다.)
 
“동파를 막으려 계량기에 끼워둔 수건까지 찍어야 하다니, 세상살이 뭐가 이리 각박하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임대인과 임차인 가운데 한 명이 울며 겨자먹기로 억울하게 피해 보상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증거를 남기는 일이 더 편할 겁니다. 임대인과 임차인 양쪽 모두에게 관리 책임이 있는 만큼, 자신의 의무를 다 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쪽이 비용 부담을 몽땅 뒤집어쓰는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 "양자 협상은 도저히 불가능"…도움 필요할 땐?

임대인과 임차인 양자간 협상이 쉽지 않을 때는, 서울시 전월세보증금지원센터(02-2113-1200~8)나 법률구조공단(국번없이 132)에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법률구조공단에서 관련해 무료 상담을 받을 수 있고, 서울시의 경우에도 상담센터를 이용하는 데 천 원 정도밖에 들지 않습니다. 상담센터만으로 조정이 힘들 경우엔 서울시상가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서울시엔 변호사와 법무사, 공인중개사 등 10명으로 구성된 정식 분쟁조정위원회가 있습니다. 수도관 동파 등 시설물 파손 및 고장 당시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한 뒤 합리적인 조정안을 제시해주는 곳입니다. 경기도청에서도 임대차분쟁조정 관련 법률상담을 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답은 돌고 또 돌아 '동파주의'라는 간단하고 오래된 네 글자로 돌아옵니다. 다소 허무한 결론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관리 책임이 임대인에게 있다 해도 관리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면 세입자도 피해 복구 비용을 일부 부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더해 혹시나 벌어질 수 있는 임차인과의 분쟁에 대비해 증거를 남기는 것. 그리고 분쟁이 발생했을 땐 지자체나 무료ㆍ저가의 법률상담센터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한때 '즐거운 나의 집'이었던 곳의 좋은 기억을 망치지 않도록 해주는 방법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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