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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별을 노래한 시인…윤동주 탄생 100주년, 돌아보는 그의 삶

[리포트+] 별을 노래한 시인…윤동주 탄생 100주년, 돌아보는 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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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서시 //
내일(30일)은 윤동주 탄생 100주년입니다. 1917년 12월 30일 태어난 윤동주 시인은 '서시', '쉽게 씌어진 시', '별 헤는 밤' 등 주옥같은 시를 남기고 29살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습니다. 일본의 차디찬 형무소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자 했던 윤동주 시인, 오늘 리포트+에서는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삶을 되돌아봤습니다.
윤동주의 삶
■ '동주야 해처럼 빛나라', 어린 시절부터 시를 썼던 윤동주

윤동주 시인의 아명(兒名)은 '해환'이었습니다. '해처럼 빛나라'는 뜻으로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어린 시절 이름입니다. 윤동주의 동생 일주에게는 '달환', 갓난아기 때 세상을 떠난 막내에게는 '별환'이라는 아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1925년 4월 4일 윤동주는 명동 소학교에 입학했고 5학년 때에는 같은 반 친구들과 함께 <새명동>이라는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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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랫줄에 걸어 놓은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 땅 지돈가?
윤동주, 오줌싸개 지도(1936) //
윤동주 시인은 소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문학적인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당숙으로 시인이자 영문학자였던 故 윤영춘 씨는 "명동 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동주는 빠짐없이 동시를 발표했다"며 "그는 어렸을 때부터 문학적 소질을 여실히 나타냈다"고 윤동주 시인을 기억했습니다.

■ 자기반성을 멈추지 않았던 그, '시가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

윤동주는 22살이던 1938년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재학 중에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 등을 발표했습니다. 1941년에는 졸업 기념으로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려 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자신이 존경하던 이양하 교수와 친한 후배였던 정병욱에게 시집을 먼저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려울 거라는 이 교수의 권고에 윤동주는 시집 출판을 단념하게 됩니다. 이 시집에 담긴 시들은 세상에 알려지지 못할 뻔 했으나 후배 정병욱의 보관본으로 빛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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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윤동주, 별 헤는 밤 中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 data-captionyn="N" id="i201130145"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71227/201130145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1942년 윤동주는 고종사촌이자 평생의 벗이었던 송몽규와 함께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동경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송몽규는 교토 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윤동주는 <쉽게 씌어진 시> 등 5편의 시를 친구에게 보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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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中 //
일제 강점기에 유학 생활을 하면서 느꼈을 윤동주의 고뇌는 당시 쓴 시에도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유학 첫해 여름 방학이 되자 윤동주는 고향에 돌아와 보름간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윤동주 시인의 살아생전 마지막 귀향이었고 친구에게 보낸 시 역시 우리에게 알려진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됐습니다.

■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29년의 짧은 생애…

1943년 7월 10일 송몽규가 먼저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됐고 4일 뒤 귀향길에 오르기 위해 차표를 사고 짐까지 부쳐 둔 윤동주도 같은 혐의로 검거됐습니다. 당시 일본 경찰이 윤동주 시인의 책과 작품, 일기 모두 압수해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합니다. 1944년 윤동주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됐는데 매달 일어로 쓴 엽서 한 장씩만 고향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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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윤일주 / 윤동주 시인의 동생]
"옥중에서 매달 한 장씩만 일어로 허락되던 엽서에 '붓 끝을 따라온 귀뚜라미 소리에도 벌써 가을을 느낍니다'라고 쓴 나의 글월에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준다. 고마운 일이다.'라는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故윤영춘 / 윤동주 시인의 당숙]
"동주는 나더러 '아저씨, 염려 마시고 집에 돌아가서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께 곧 석방되어 나간다고 일러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생전에 그를 만난 최후의 순간이었습니다."
출처: 연세대학교 윤동주기념사업회 //
1945년 2월 윤동주의 엽서는 도착하지 않았고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는 전보가 고향 집에 배달됐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9살이었고 해방 6개월을 앞둔 시점이었습니다. 시신을 인수하기 위해 일본으로 간 윤동주의 아버지와 당숙은 송몽규로부터 "매일같이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공식적인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윤동주 시인도 일본의 끔찍한 생체실험 대상이었다고 그의 가족들은 입을 모읍니다.

윤동주 시인의 육촌 동생인 가수 윤형주 씨는 SBS 주영진의 뉴스브리핑과의 인터뷰에서 "후쿠오카 형무소에 한국 학생들이 많이 구금돼 있었는데 당시 바닷물 증류수를 영양제라고 속이고 매일 한 대씩 그들에게 주사했다"며 "이런 일들이 종전 직전에 일본에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성찰로 마지막까지 일본에 저항했던 윤동주 시인의 숭고한 정신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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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윤형주 / 윤동주 시인의 육촌 동생]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은 언어까지 말살 당했습니다. 그때 윤동주 시인은 끝까지 우리말로 시를 썼습니다. 또 죽음 앞에서도 일본 사람들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던 청년입니다. 이런 그의 삶이 오늘날 우리가 따르고 싶은 모습이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기획·구성: 송욱, 장아람 / 디자인: 정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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