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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백두산, 북한 쪽에서 올라가보면…

[취재파일] 백두산, 북한 쪽에서 올라가보면…
2008년 9월 무렵이다. 필자는 당시 민간단체의 방북을 따라 북한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이 방북에서 북한 쪽에서 백두산을 올라가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갖게 됐다.

평양의 순안공항에서 고려항공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양강도 삼지연 공항에 착륙했다. 9월 초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삼지연의 날씨는 상당히 쌀쌀했고, 공항 주변의 나무들은 구소련 영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침엽수림 일색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키 큰 침엽수림 일색의 풍경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백두산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잠시, 선두 차량이 움직이자 포장이 안 된 길에서 일어나는 흙먼지로 인해 주변 풍경 감상은 처음부터 포기해야 했다.

몇 시간을 달려 천지 바로 아래쪽 초소에 도착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날씨는 무척이나 좋았기 때문에, 천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백두산은 역시 예사로운 산이 아니었다. 천지가 바라다보이는 곳까지 올라가니 안개가 뿌옇게 끼고 부슬부슬 비마저 내리는 것이었다. 아랫동네와 천지 주변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같이 백두산에 오른 일행들이 1회용 비옷을 꺼내 입었다. 날씨가 안 좋지만 그냥 내려갈 수는 없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에 나오는 백두산을 중국 땅이 아니라 우리 한반도를 통해 올랐기 때문이다. 북쪽 안내원이 있어 애국가를 부를 수는 없었지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소리 높여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백두산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남다른 의미를 갖는 산이다.

● 백두산에 오른 김정은… 북한에게 백두산은 어떤 의미인가?
백두산 오른 김정은 (사진=연합뉴스)
김정은이 지난주 다시 백두산에 올랐다. 눈 덮인 백두산을 배경으로 천지를 바라보며 찍은 김정은의 사진이 북한 매체에 일제히 보도됐다. 김정은이 ‘혁명의 성산 백두산’에 올랐다고 제목을 뽑은 북한 매체의 보도를 보면, 북한 또한 우리처럼 백두산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에게 백두산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사실, 북한에게 있어 백두산은 김일성 일가의 혁명 전통 뿌리라는 정권의 정통성과 연관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김일성이 백두산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하며 북한을 해방시켰고, 그 피를 이어받은 김정일과 김정은이 북한 주민들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 북한의 선전 논리이기 때문이다.

● 허구로 점철된 백두산의 북한 사적지들

다시, 2008년 9월로 돌아가 보자. 천지에 오르기 전 방북단은 백두산 일대의 관광지들을 여기저기 둘러봤다. 이른바 김일성 항일 혁명 투쟁의 사적지들이다. '동상'의 나라 북한답게 백두산 곳곳에 각양각색의 김일성 동상과 항일 무장 대원들의 움직임을 형상화한 동상들을 끊임없이 볼 수 있었다.

백두산에 가면 빼놓지 않고 들리게 되는 밀영집. 김일성이 백두산에서 항일 투쟁을 하던 근거지로 김정일이 태어났다고 북한이 주장하는 곳이다. 북한이 기리는 혁명 성지의 핵심인 이곳에서 안내원들이 방문객들에게 김일성의 백두산 항일 투쟁에 대해 입이 마르도록 선전하고 있었다.
백두산에 새겨진 선전 문구
하지만, 이같은 선전은 거짓말이다. 김일성이 항일 무장 투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1930년대를 거치면서 일제의 거세진 토벌 때문에 만주나 국내에서의 항일 무장 투쟁은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고, 김정일이 태어난 1942년에 김일성이 백두산에서 항일 투쟁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김일성은 1942년 당시 소련으로 피신해있었기 때문에,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태어났을 리도 없다.

백두산과 관련해 북한이 선전하는 또 하나의 거짓말 중에 '구호나무'라는 것이 있다.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 시절 부대원들이 김정일의 출생을 앞두고 새로운 민족 지도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나무에 새겨 놓은 글자들이 1980년대 후반부터 발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백두산 밀영집을 방문했을 때 내심 구호나무을 구경할 것을 기대했는데, 웬일인지 북한 안내원들이 구호나무를 보여주지 않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 했다. 차에 타기 직전 구호나무를 보고 싶다고 얘기하자, 북한 안내원들이 반색을 하며 필자를 구호나무 보관처로 데려갔다. 구호나무는 유리관 안에 보관돼 있었다. 덕분에 필자는 말로만 듣던 ‘허구’의 구호나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 김씨 일가 신성성 완화돼야 외부와 교류 가능

김정은이 한겨울에 백두산에 오르며 백두산의 이미지를 자신과 중첩시키려는 것은 백두산 항일 무장 투쟁의 정통성이 자신의 피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북한 주민들에게 선전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가공의 허구 위에 서 있는 이러한 상징 조작은 외부에서 객관적 사실이 전파되는 순간 설 곳을 잃게 된다.

혹시 핵 문제나 북미 관계에서 돌파구가 생긴다 해도 북한이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개혁 개방에 나설 수 있을까? 극단적인 우상화와 허구에 기반한 김씨 일가의 신성성이 완화되지 않는 한 북한이 외부 세계와 교류하기는 힘들다. 북한이 외부 세계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김씨 일가가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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