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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PD가 스케이트장 빙질 관리"…MBC 블랙리스트의 본질은?

[취재파일] "PD가 스케이트장 빙질 관리"…MBC 블랙리스트의 본질은?
● MBC에 사내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

어제(8일)는 온종일 '블랙리스트'라는 단어가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대한민국을 뒤흔든 문화계 블랙리스트 얘기가 아닙니다. 이번에는 제작거부와 징계 등으로 내홍을 겪고 있는 문화방송 MBC에서 발견된 괴상한 문건 얘기였습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문화방송본부는 기자회견을 열고 '블랙리스트'로 추정되는 문건 2건을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카메라기자 성향분석표'와 '요주의인물 성향'이라는 제목의 문건으로 각각 A4용지 1장과 3장 분량입니다. 문건은 2012년 파업 이듬해인 2013년 7월 처음 작성돼 2014년 2월 최종적으로 수정됐습니다.

● '블랙리스트' 추정 문건에 담긴 내용은?
‘카메라기자 성향분석표’ (전국언론노조 문화방송본부 제공)



'카메라기자 성향분석표'는 2012년 파업 당시 보도를 담당하고 있던 MBC 카메라 기자 65명을 4개 등급으로 나눈 표입니다. 최상위 등급은 별 두 개(☆☆), 2등급은 동그라미(○), 3등급은 세모(Δ), 최하위 등급은 엑스(X)로 표시했습니다.

문건을 보면 특정한 기준으로 기자들을 분류해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2년 파업 참가 여부와 회사 정책에 대한 충성도, 노동조합과의 관계 등이 그 기준입니다. ☆☆등급은 회사의 정책에 충성도를 갖고 있다고 적혀 있는 반면 X등급은 현 체제 붕괴를 원하는 이들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MBC 블랙리스트 추정 문건
‘요주의인물 성향’ (전국언론노조 문화방송본부 제공)
다음은 '요주의인물 성향' 문건입니다. 이 문건은 개별 기자들에 대해 상세히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매우 직설적인데 '게으른 인물', '영향력 제로', '무능과 태만' 등 인신공격성 표현도 등장합니다.

특히 X등급에 대한 설명이 가장 노골적입니다. '격리 필요', '보도국 외로 방출 필요', '주요 관찰 대상' 등 배제 필요성을 적시했고, '욕심이 많아 기회 시 변절할 인원'이라며 회유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 "우리는 등급을 매길 수 있는 쇠고기가 아닙니다"

어제 열린 기자회견에는 김연국 노조위원장 외에 권혁용 MBC 영상기자회장과 X등급으로 분류됐다는 촬영기자 2명도 함께 참석했습니다.

먼저 권혁용 영상기자회장은 블랙리스트 추정 문건에 이름이 적힌 모든 기자가 피해자라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피해자입니다. 이 평가 전체에 대해서 영상기자회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서 피해자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인권의 문제입니다. (중략) MBC 카메라 기자는 등급을 매길 수 있는 그런 소고기가 아닙니다." -권혁용 MBC 영상기자회장-

만 22년 동안 카메라를 든 나준영 기자는 기자들을 성향으로 판단해 분리하려 한 점이 마음 아팠다고 밝혔습니다.

"블랙리스트를 처음 접하고 나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20년 동안 동고동락한 사람들을 어떤 등급으로 분류하고 어떤 성향으로 판단해서 분리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나준영 MBC 카메라 기자-

나준영 기자와 동기인 양동암 기자는 파업 이후 아예 승진의 길이 막혔다고 토로했습니다.

"직업의식을 갖고 방송을 만들었는데 제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강요를 받으며 회사에 다녀야 했습니다. (중략) 2012년 이후로 단 한 번의 승진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MBC에서 가장 최고참 차장 대우일 것입니다." -양동암 MBC 카메라 기자-

● 문건 내용은 현실화됐나?

김연국 노조위원장은 이 문건이 각종 인사평가와 인력 배치에 활용됐다고 말합니다. X등급 기자들은 대부분 징계와 강제 교육을 거쳐 보도국 밖으로 쫓겨났고, 쫓겨나지 않은 기자들은 한직으로 물러났다고 했습니다. 해당 기자들은 승진이나 연수 심사에서도 연거푸 탈락했다는 게 노조 측 설명입니다.

이 문건들을 '블랙리스트'로 규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노조 측은 당시 보도국장이었던 현 김장겸 MBC 사장에게까지 보고됐을 걸로 강하게 의심하고 있습니다.

● 누가 문건을 작성했나?

노조 측은 해당 문건의 메타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제3노조인 MBC 노동조합 소속의 카메라 기자가 문건의 최초 작성자라고 밝혔습니다. (제3노조는 2013년 설립된 단체로 제1노조인 전국언론노조 문화방송본부와는 대척점에 서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건은 특정 개인이 혼자 작성한 문건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덧붙였습니다. 최초 작성자가 카메라 기자 전반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다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다고 말했습니다.

김연국 노조위원장은 여러 사람이 조직적으로 이 문건을 업데이트했을 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3노조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정황은 발견된 것이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 문건 작성자 "선배들의 만행을 기록으로 남겼을 뿐"

기자회견 이후 문건 작성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모 MBC 카메라 기자가 자신의 SNS를 통해 입장을 밝힌 것입니다. 해당 기자는 문건을 자신이 작성한 것은 맞지만, 선배들의 만행을 적극적으로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을 뿐 누구에게 공개하려고 만든 문건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해당 기자는 2012년 파업 당시 전국언론노조 문화방송본부 소속 노조원이었습니다. 그는 파업에 참여해 6개월 넘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지만 노조원들이 파업 적극 참여자와 소극 참여자를 구분하는 등 편 가르기를 해 마음고생을 했고, 결국 2013년 노조를 탈퇴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함께 6개월이 넘는 파업에 참여하며 고통을 감내한 사람들끼리도 편 가르기를 해서 후배가 선배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 치욕적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중략) 특히 제가 속한 카메라 기자들의 이중적인 행위들을 반드시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OOO MBC 카메라 기자-

또 괘씸한 사람들을 잊지 않으려고 문건을 작성했으며 이를 선배 2명과 공유했다고 말했습니다.

"공개를 위해 만든 것도 아니고, 괘씸한 박쥐들을 절대로 잊지 말자고 선배 2명과 공유한 내용입니다. 아울러 파업에 참여시키면서 자신들은 편하게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하고, 후배들은 파업의 도구처럼 이용하려던 선배들의 만행도 적극적으로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OOO MBC 카메라 기자-

MBC 측도 보도자료를 내고 기자회견 내용을 반박했습니다. 경영진은 노조 측의 주장이 허무맹랑하다는 입장입니다. 경영진과 보도본부 간부들 그 누구도 노조가 공개한 문건을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노조가 허위 사실을 유포한 것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도 밝혔습니다.

● MBC 블랙리스트 사태의 본질은?

노조와 문건을 작성했다고 밝힌 카메라 기자, 경영진의 말을 종합해보면 해당 문건은 파업 이후 작성돼 사내에서 일부 유포된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다만, 이 문건이 여러 명에 의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됐는지 또 실제로 당시 보도본부 간부나 경영진에게 전달됐는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다면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이번 블랙리스트 사태로 노사갈등이 노노갈등으로 확산할 조짐도 보입니다. 작성자가 사측이 아닌 동료 카메라 기자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해당 기자는 제1노조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제3노조 소속입니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양측 노조의 시각은 많이 다를 것입니다.

사태의 본질은 블랙리스트 추정 문건 자체에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본질은 팩트에 녹아 있습니다.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회사에 쓴소리를 낸 직원들이 대거 좌천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 사법부가 여러 차례 경영진의 조치가 잘못됐다고 판단했음에도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사실. 노사갈등과 노노갈등으로 MBC에 난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는 사실. 이번에 공개된 문건이 MBC 노동자 모두에게 상처가 될 거란 사실. 이런 사실들이 본질일 것입니다. 노조 측 법률대리인인 신인수 변호사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수많은 법원 판결을 통해서 MBC 기자, 피디, 아나운서로부터 마이크 빼앗지 말고 그들이 방송하게 하라는 전보발령무효확인, 부당전보가처분결정을 수없이 내렸지만, 경영진은 무시하고 계속 불법행위를 반복했습니다. (중략) 시사교양국에서 20년 넘게 일한 한 피디는 MBC 상암광장 스케이트장 관리 요원을 시켰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피디를 스케이트장에서 음악 틀어주고, 아이들 넘어지면 일으켜 세우고, 빙질 관리하고 그런 일을 시켰습니다. 뻔뻔하게 계속시켰습니다." -신인수 변호사-

미디어 비평지에서 일하는 기자가 아닌 이상 기자가 기자를 취재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취재 현장에서 부딪히는 경쟁자이자 함께 팩트를 찾아 나가는 동료이기도 한 타사 기자들을 취재하고 검증하는 작업은 감정 노동까지 수반하는 괴로운 일입니다. MBC가 하루빨리 정상화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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