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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원내대표 우상호'의 결정적 다섯 장면

[취재파일] '원내대표 우상호'의 결정적 다섯 장면
정당의 ‘원내대표’는 중요한 사람이다. 굵직한 선거와 당의 살림살이를 총괄하는 당 대표가 총사령관이라면, 정당 내 국회의원들의 리더로서 원내 활동과 협상을 이끄는 원내대표는 야전사령관에 비유된다. 한국 정치사에 원내대표라는 단어가 생겨난 지난 2003년부터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된 요즈음에 이르기까지, 그 무게감과 중요도는 점점 더 커져 왔다. 국회 상임위 활동과 협치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요즘은 더욱더 그렇다. 기자가 지켜본바, 적어도 정치를 계속하고 싶어 하는 국회의원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원내대표가 되기를 꿈꿨다. 

다만 그 중요도와 무게감만큼 대중의 인지도가 정확히 비례하지는 않는 게 또 원내대표라는 직책이다. 당 대표만큼 TV에 자주 나오는 정치인이기는 하지만, 특별히 정치에 관심이 많지 않고선 원내대표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얼마만큼 중요한 사람인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직까지 그리 많지 않다는 얘기다. 임기가 1년에 불과하고 당 대표에 비해 보통 선수(選數)나 인지도가 떨어지는 정치인이 맡게 된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우상호는 나름 성공한 원내대표라 부를 만하다. 높은 인지도는 물론이고 임기 1년 동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이라는, 굵직하다 못해 거대한 현안을 성공적으로 풀어내며 무사히 임기를 마쳤다. 20대 국회 개원 이후 선출된 교섭단체 원내대표 가운데 1년 임기를 마친 이는 우상호가 유일하다.

격동의 시기를 거친 지난 1년 한국 정치를 돌아보면 ‘임기를 마쳤다’기보다는 ‘살아남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인다. 같은 기간 민주당을 출입하면서, 기자는 그의 눈과 입, 말과 행동을 매개로 격변하는 정치판을 취재했다. 이제는 평의원이 된 그의 입을 빌려 ‘원내대표 우상호’의 결정적 다섯 장면을 추려 봤다.

● 1. 우상호, 원내대표가 되다

2016년 5월 4일, 우상호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4.13 총선으로 거대 야당이 된 민주당의 20대 국회 첫 원내대표였다. 정말 오랜만에 다수당이 된 데다 대선을 한 해 앞둔 시점이라 누가 원내대표가 되는지에 관심이 쏠린 선거였다.

아슬아슬했다. 1차 투표에서 경쟁자인 우원식 의원에게 4표 차로 졌다. 40대 36. 예상 밖의 결과였다. 다행히 결선 투표가 남아 있었다. 1, 2위 후보 이어진 결선 투표 스코어는 63대 56, 일곱 표 차 역전승이었다.
원내대표 당선 직후. 예상 밖 승리에 다소 어색하게 웃고 있다.
우상호 전 원내대표는 “질 줄 알았다”고 회상했다. 1차 투표에서 얻은 표가 생각보다 적었기 때문이다. 근소하게나마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선거였다. 낙심을 해서는 “(우) 원식이 형 축하해드려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예상 밖으로 이겨서 기쁘면서도 당황했다”고 한다.

그가 처음 원내대표가 되기로 결심한 건 꽤 오래 전인 지난 2013년이었다. 18대 대선 패배 이후 당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내홍에 휩싸였다. ‘386모임’ 해체를 선언하고 2선에 물러나 있었다. “내가 지도부가 돼서 한 번 이 당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이 꿈틀댔다. 최종 결심은 민주당이 국민의당과 분당(分黨)됐을 때 했다. 분당을 막고자 이리 저리 물밑에서 뛰어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물밑에서, 뒤에서 설득하는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당이 ‘깨지고’, 허무한 심경으로 동료 의원들과 술을 마시다 “내가 한 번 하겠다”고 선언했다. 동료 의원들도 부추겼다.

그리고 우상호는 목표를 이뤘다. 3선 의원이 된 직후였다. 원내대표가 되겠다는 건 첫 번째 목표였다. 다른 진짜 목표를, 그는 이뤘을까.

● 2. 김재수 농림부 장관 해임건의안 통과

2016년 9월 24일,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 대한 국회 해임건의안이 가결됐다. 박근혜 정부 들어 처음이자, 헌정 사상 여섯 번째 국무위원 해임건의안 국회 통과였다.  

김재수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 통과는 20대 국회에서 나름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4.13 총선으로 16년 만에 여소야대가 된 이후 처음으로 다수 야당이 정부 여당에 위력 시위를 벌였고 승리를 거둔 사건이었다. 국민의당이 당론을 정하지 않은 가운데 우상호 전 원내대표는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와 함께 해임건의안을 발의하고 주도했다.

우 전 원내대표는 당시 상황에 대해 “도박을 걸었다”고 표현했다. 국민의당이 자유투표 의사를 밝히면서 통과 확률은 반반이 됐다. 부결되면 큰 정치적 부담을 끌어안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드라이브를 걸었다”. 여소야대 국회가 된 이후로도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쭉 야당의 요구를 무시해왔기 때문에, 정권에 경고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운도 따랐다. 당시 새누리당은 해임건의안 발의를 지연시키기 위해 ‘지연 전술’을 썼다. 대정부질문에 대한 장관들의 답변이 늘어졌고, 정진석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국회의장에게 국무위원들의 식사 시간을 보장해달라는 이른바 ‘필리밥스터’ 전술을 펼치기도 했다. 이 지연전술이 도리어 여당에 독이 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국회의사당 바깥에는 방송사 중계차들이 속속 도착했다. 여론의 이목이 집중되자 당시 금요일이라 지역구에 가 있던 국민의당 의원들이 상경해 본회의장에 입장했다. 자정을 넘겨서야 상정된 해임건의안은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통과됐다.
김재수 해임건의안 상정을 앞두고 정진석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말다툼하는 모습
(우상호) “그 시점이 매우 중요해. 그게 없었으면 최순실 게이트를 터뜨리는 기세 싸움에서 졌을 거예요.”

우 전 대표는 그때부터 정국의 주도권이 야당에 넘어왔다고 자평했다. 비록 박근혜 전 대통령은 꿈쩍하지 않았고 김재수 장관도 물러나지 않았지만 공고한 정권에 균열에 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1955년 임철호 농림부 장관을 시작으로 가장 최근이었던 2003년 김두관 행자부 장관에 이르기까지, 해임건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국무위원은 모두 스스로 물러났었다. 전례가 깨진 셈이다.

정국의 주도권이 넘어왔다는 것은 물론 우 전 대표의 주장이다. 그러나 2016년 9월 말과 10월 초, 이 시기를 기점으로 국정감사가 시작됐고 국정농단 의혹사건이 불거지며 급박하게 정국이 굴러가기 시작했다는 것도 대체로 사실이다.

● 3. 백남기 청문회, 우상호와 이한열 열사

2016년 9월 12일, 국회에서 백남기 농민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그 전 해인 2015년 11월 14일, 제1차 민중총궐기 대회 현장에서 고 백남기 씨가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의식을 잃은 지 304일 만이었다.

하루뿐이었다. 단 하루의 청문회를 열기 위해 300여 일이 넘게 걸린 셈이다. 그러나 과정은 치열했다. 제1 야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이 ‘백남기 청문회’를 열겠다고 처음 선언한 건 원내지도부 출범 직후인 5월 26일이었다. 국민의당과 정의당까지 야 3당도 합의했다. 그러나 성과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의외의 곳에서 물꼬가 트였다. 8월이 되자 대우조선해운 구조조정 문제가 국회의 쟁점으로 떠올랐다. 정권 실세들이 청와대 서별관에 모여 구조조정 문제를 졸속으로 합의했고 부실을 야기했다는 의혹이었다. 이른바 ‘서별관 청문회’ 논란의 화살은 그때까지도 실세였던 최경환 의원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을 겨냥했다. 정권 핵심부의 두 사람을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하는 문제를 가지고 여야가 씨름을 거듭했다.

이 당시 우상호 전 원내대표가 정진석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성사시킨 ‘빅딜’이 최경환, 안종범 두 사람을 증인에서 제외하는 대신 백남기 청문회를 여는 것이었다. 정치권 뿐 아니라 언론에서도 의외의 협상 결과라는 반응이 나왔다. 야당의 정치적 실익이 크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 당시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반대 의견을 개진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우 전 원내대표는 “그거(청문회) 안 했으면 나중에 백남기 농민 장례식 때 우리는 (민주당) 들어가지도 못 했다”고 돌아봤다. 고 백남기 씨 유가족과 농민 단체마저도 민주당이 청문회를 끝까지 추진하지 못할 걸로 봤다는 얘기다.
백남기 농민 유가족과 면담하는 우상호
당시 ‘약속을 지킨다’는 원칙 외에 그에게 가장 크게 작용했던 요인 중 하나는 시위 도중 경찰 최루탄을 맞아 숨진 고(故) 이한열 열사에 대한 기억이었다. 이한열 열사가 쓰러졌을 당시 우 전 원내대표는 연세대 총학생회장을 맡았다. 장례식 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우 전 원내대표는 ‘공권력에 의한 희생자’와 관련된 그때 경험이 큰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건의 본질은 시민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이 도리어 시민을 해쳤다는 사실이었다. 또 정치적 쟁점을 해결하는 것뿐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를 위로하고 희망을 주는 것 역시 정치의 영역이라는 설명이다.

하루 동안 열린 청문회의 성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청문회장에 출석한 전현직 경찰청장은 혐의는 부인했고, 사과는 거부했다. 청문회 무용론까지 나왔다. 기자 또한 그 당시에는 큰 회의감을 느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후의 전개는 모두가 익히 아는 대로다. 사건은 권력의 검은 민낯과 전문가 집단의 파렴치함을 드러낸 뒤 대체로 ‘사필귀정’으로 돌아갔다. 국회 청문회도 그 지난한 과정의 한 징검다리가 됐다고 본다.
고 백남기 농민 장례식장
● 4. 박근혜 前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前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 날, 인터넷에서는 한 장의 사진이 화제가 됐다.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 국회 본회의장을 나서던 우 전 원내대표가 한 손을 들어 누군가에게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었다. 인사의 대상이 방청석에 있던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화제가 됐다. 인사를 건넨 게 정말 세월호 유가족이었는지부터 물었다.

  “맞아요. 사실은 남한테 안 보이게 한다고 살짝 손만 든다고 들었는데 그게 찍혀가지고.”
탄핵안 가결 직후 세월호 유가족에게 인사
(그러기엔 너무 여러 언론사에서 잘 찍긴 했지만, 당시 보도사진 대부분이 우 전 원내대표 ‘원샷’이 아닌 다른 의원들과 함께 잡힌 사진인 걸 보면 손을 살짝만 들었던 건 맞는 것 같다)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고, 제대로 위로받지 못한 채 거리로 나앉았던 유가족을 방청석에 앉히고 그 순간을 선물하고자 한 건 우상호의 아이디어였다.

우 전 원내대표는 당시 순간을 기쁘다기보다 "다리가 다 풀려서 휘청거렸다”고 회상했다. 민주당 의원들 대부분 의원직 사퇴까지 내 건 상태였다. 초긴장 상태에서, 정세균 국회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리는 순간 맥이 풀렸다고 했다.

국회 탄핵소추안이 가결되기까지 그 1~2주간은 국민뿐 아니라 정치인과 기자들에게도 물리적으로 힘든 시간이었다. 당시 또 화제가 됐던 아이템 가운데 하나가 우 전 원내대표의 ‘검정색 터틀넥’ 이었다. 한 차례 미뤄졌던 탄핵안 처리 날짜가 확정된 이후 우 전 원내대표는 ‘국회 내 비상대기’를 선언했다. 원내대표실에 숙식하면서 역시 철야에 나선 의원들을 수시로 돌아봤다. 밤늦게까지 기사를 쓰고 국회 로텐더홀에 올라가면 이불을 둘러쓴 국회의원들과 검정 터틀넥을 입은 우 전 원내대표를 자주 볼 수 있었다.
검정색 터틀넥. 어느 브랜드인지 궁금하다.
탄핵안이 통과된 뒤 가진 오찬 자리에서 개인적으로 궁금해 “그 옷 빨아입었냐’고 물어봤냐고 물어본 기억이 있다. 우 전 원내대표는 “두 벌을 가져와 돌려 입었다”고 대답했다. 검정색 터틀넥은 탄핵 전선의 최전방에 있던 우상호의 ‘전투복’이었던 셈이다.

● 5. 문재인 대통령 당선

2017년 5월 9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당시 후보가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마지막 유세 장소는 광화문이었다. 우상호 전 원내대표도 함께 무대에 올랐다. 그는 당시 마지막 유세에서 “당선을 확신했다”고 한다. 엄청난 인파가 쏟아내는 에너지에 “지난 1년의 여정이 결실을 맺는구나”하는 감동이 몰려왔다.
광화문 마지막 유세
지난 18대 대선에서 우 전 원내대표는 문재인 대선캠프의 공보단장이었다. 그때는 마지막까지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오후 4시쯤에는 ‘이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상파 3사 출구조사 결과는 달랐다. 충격을 받고 다들 떠나간 상황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새벽 늦게까지 기자들과 술을 마셨단다.

  “너무 괴로웠거든 그 때는. 막 죄진 것 같고. 아, 내가 최선을 다 했나 회한도 들고”

5년 뒤, 문재인 대통령의 재수는 성공했고 우 전 원내대표는 이번에는 일찌감치 상황실을 떴다. 

우 전 원내대표가 취임하면서 내건 목표 가운데 하나는 정권 교체였다. 정확히는 누가 나와도 이길 수 있도록 ‘정권 교체의 기반’을 만들겠다는 약속이었다. 탄핵을 통한 조기 대선이 아니었다면, 그의 임기는 대선 전에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입장에선 운이 좋았던 셈이다. 목표를 이뤘고, 동료 의원들에 대한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자신의 최고의 장면으로 문재인 대통령 당선을 꼽았다. 

● 원내대표 우상호, 그 다음은?

이제는 평의원이 된 그에게 원내대표를 마친 소감을 물었다. 386 운동권 출신이 무능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이를 인정받은 것 같아 기분 좋다고 했다. 보람 있었다는 말도 했다. 평범하지만 자부심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386 운동권 대표주자’, ‘대변인만 8번’. 그동안 정치인 우상호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였다. 이제는 ‘전(前) 원내대표’라는 수식어가 새로 붙게 될 것이다. 새 정부 들어선 그가 통일부 장관 입각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지만 스스로 부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출마할 것이라는 예측이 꾸준히 나온다. 우 전 원내대표는 “지금은 그냥 쉬고 싶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정치인 우상호는 꾸준히 자신만의 수식어를 만들어왔다는 점이다. 이후의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다.


* 사진: 우상호 의원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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