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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자유한국당 '혁신의 추억'

자유한국당 혁신의 방식, 그리고 '악(惡)의 평범성'

[취재파일] 자유한국당 '혁신의 추억'
지난달 17일. 자유한국당 중진의원 간담회 분위기는 살벌했습니다. 대선 패배 이후 한국당 중진들이 모여 혁신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거친 발언이 쏟아졌습니다. 4선 정진석 의원의 '육모 방망이' 발언이 단연 화제였습니다.

"진짜 정신 바짝 차리고, 이제는 정말 보수의 존립에 근본적으로 도움 안 되는 사람들은 육모 방망이를 들고 뒤통수 빠개버려야 해요. 동지가 아니라 적으로 간주해서 무참히 응징해야 됩니다."
-지난달 17일 정진석 의원
정진석 의원
간담회 내용을 받아치던 기자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육모 방망이가 뭐냐고 수근 거렸습니다. 수위 높은 발언 덕에 이날 회의는 세간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새 정부의 탄생 직후 수요가 급감했던 자유한국당 뉴스가 웬일로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물론 정신 못 차렸다, 반성은 없었다는 비난이 핵심이었습니다. 육모 방망이에 가려져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시선을 끌 만한 대목이 더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사태가 단순히 탄핵과 최순실 사태 때문이 아니라고 봐요. 이미 총선 결과부터 예고 조짐 있었다고. 그 당시 득표율이 지역구 38%, 정당프로 33.5%였어요. 이미 보수에 대해 국민들이 등을 돌렸어요. 그때부터 정신 차렸어야 했어요. 혁신하겠다고 해서 젊은 사람 내세우니 어떻게 했어? 전국위원회 무산시키고 말이야. 못하게 했잖아, 혁신을."
-지난달 17일 정진석 의원

지난해 4월, 자유한국당의 전신이었던 새누리당의 총선 성적표는 비참했습니다. 혁신의 목소리는 빗발쳤지만 금세 유야무야 사라져버렸습니다. 1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총선 직후 원내대표였던 정진석 의원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다만, 그때 정신 차렸어야 했다는 말에서, 혁신과 퇴보의 쳇바퀴를 돌고 있는 대한민국 제1 보수정당의 씁쓸한 현주소가 느껴졌습니다.

제1 보수정당의 유례없는 역대 최다 득표 차 대선 패배. 박물관에 안치된 거나 다름없는 자유한국당 '혁신의 역사'를 다시 추억해보려 합니다.

● 총선의 추억, 그리고 혁신의 추억
새누리당 로고
지난해 20대 총선. 자유한국당의 전신이었던 새누리당은 122석을 얻는 데 그쳤습니다. 더불어민주당보다 한 석 적었습니다. 당시 야권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분열돼 어느 때보다 유리한 환경이었던 만큼 굴욕적 패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권성동 전략기획본부장은 ‘20대 총선 후 당 지지 회복 방안’이란 이름의 당 내부 보고서에서 첫 번째 선거 패인을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1. 공천과정의 문제점

→국민을 무시한 공천, 국민의 기대치와 괴리된 공천, 당의 스펙트럼을 좁히는 공천이 돼 결과적으로 '수도권 승리의 공천(더불어민주당) vs 참패의 공천(새누리당)'으로 나타남.

→경제 전문가 등 영입 실패로 이어짐.
-옛 새누리당 '20대 총선 후 당 지지 회복 방안' 내부 보고서

가장 큰 원인은 계파 갈등으로 촉발된 공천 파동이었습니다. 친박과 비박의 갈등은 공천 과정에서 극에 달했고 김무성 전 대표의 '옥쇄 파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선거라는 공적 절차에 계파 사조직의 이해관계가 개입되는 모습은 언론을 통해 고스란히 중계됐고, 국민들은 이를 막장 정치 힐난극으로 소비했습니다. 국민의 준엄한 심판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총선 직후 새누리당 내에서 혁신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새누리 혁신 모임, 새혁모가 조직됐습니다. 김세연, 김영우, 이학재, 황영철 박인숙, 오신환, 하태경, 주광덕, 이렇게 7명의 의원이 주축이 됐습니다.

시작은 야심 찼습니다. 공천 파동 당시 대표였던 김무성 의원이 이미 대표직에서 물러났던 상황, 원내대표였던 원유철 의원이 비대위원장직을 맡은 거란 말이 나오자 새혁모는 연판장을 돌리며 압박에 나섰습니다. 총선 책임자가 당 비대위원장을 맡아서는 안 된다는 명분을 내걸었습니다. 사태를 야기했던 지도부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선전포고로도 읽혔습니다.

20대 국회 당선자에게 드리는 호소문

새누리당 20대 국회 당선자 8인은 총선에서 확인된 새누리당 심판과 혁신 요구를 겸허히 받아들여 혁신 비대위가 구성되어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하고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습니다. 동료 당선자 여러분의 동참을 호소하며 오늘(2016년 4월 19일) 오후 2시까지 동의 여부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1) 총선 참패 책임자가 이끄는 <임시 비대위> 체제 거칠 필요 없다!

총선 패배에 책임이 큰 분이 비대위원장 직을 맡는 것은 혁신을 요구하는 민심에 정면 도전하는 것입니다. 차기 원내대표가 선출될 때까지 임시로 맡는 것이라고 하나, 차기 원내대표 선출은 당규에 명시된 대로 선관위를 구성하여 처리하면 됩니다.
-지난해 4월, 새누리혁신모임 연판장

새혁모는 원유철 의원과의 면담 끝에 원 의원의 비대위원장직 포기를 이끌어냈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습니다. 성과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세 불리기는 실패했고, 마지막 새혁모 모임에 참석한 의원은 황영철, 김영우, 하태경, 딱 3명뿐이었습니다.
황영철 의원
우리도 다 자기 일정이 있어요. 그래서 시간 되는 사람만 모여서 차 한 잔만 하자, 이렇게 모이기로 한 겁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원유철 비대위원장 체제를 바꿔내야 한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저희가 뜻을 함께해서 관철한다는 부분이 있었잖아요.
-지난해 5월, 황영철 의원 백브리핑

● 새혁모의 실패한 실험

새혁모는 그렇게 동력을 잃었고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습니다.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해석이 나왔습니다. 일부 친박계에서 새혁모 의원들을 회유하고 있다는 말부터, 새혁모 의원들이 박근혜 정권에 약점을 잡혔다는 소문까지 흘러나왔습니다.

소문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당시 다른 의원들의 호응이 크지 않았다는 건 분명했습니다. 한 친박계 의원은 기자와 만나 비웃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혁모에서 연판장을 돌린 거 참 우스웠어. 당선인들한테 당선인 총회하자고 문자로만 뿌려서 동의 문자 보내달라고 하면, 당선인들이 옳다구나 이러면서 답 문자를 보내겠어? 눈치 봐야 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야. 솔직히 원내 상당수가 친박이잖아. 내가 듣기로는 동의 문자가 너무 적어서 새혁모 활동 잠정 중단한다고 쇼를 한다는 거야. 새혁모 나부랭이가 아무리 날뛰어 봤자 이 당은 박근혜 당이라고.
-지난해 5월 친박계 A 의원

사실이 그랬습니다. 20대 한국당 의원들은 사실 당시 공천 파동의 수혜자들이었습니다. 공천으로 의원 배지를 받았던 20대 한국당 의원들이, 공천 파동 책임을 묻는 개혁의 움직임에 동참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았습니다. 호응은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혁모의 혁신 움직임은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었습니다.

새혁모가 계파 정치의 한 축으로 소비됐다는 점도 이유가 됐습니다. 공천 파동으로 친박의 입지가 좁아진 상황에서 비박이 그 틈을 비집고 당내 주도권을 잡기 위해 새혁모를 조직했다는 해석까지 나왔습니다. 새혁모 구성원이나 이에 지지를 보냈던 사람들 상당수가 비박계였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지난해 4월 20대 국회 당선인 오찬에서 한 친박계 의원은 이런 말을 꺼냈습니다.

새혁모가 상처난 당에 책임론 이야기하며 총질을 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쇄신입니까? (비박계 좌장인) 김무성 전 대표 언저리에 있으면서 바로 잡기 위해 조언은 하지 않고 덩달아서 부화뇌동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4월 국회 당선인 오찬, 친박계 B 의원

친박계뿐만 아니었습니다. 총선 직후 만난 비박계 의원도 새혁모에 함께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정치적 오해를 받기 싫었다고 털어놨습니다.

C 의원 : 선거가 끝나고 새혁모 한 의원이 연락을 했어. 새혁모에 함께하자고 하더라고. 그런데 거절했어. 사실 좀 부담스러웠어. 초반에 힘이 붙을까 싶기도 했고. 거절한 가장 큰 이유는 새혁모가 계파 싸움의 논리로 해석될 게 뻔했기 때문이었어.

기자 : 그런데 의원님도 늘 당 개혁 필요하다고 말했잖아요?

C 의원 : 그렇지.

기자 : 그러면 개혁 모임 같은 것 하는 게 맞지 않아요?

C 의원 : 글쎄. 갈등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어. 친박은 비박이 당권을 잡으려고 이런 모임 만든 거라고 말하고 다닐 거야. 그게 프레임이야. 새혁모를 비박 프레임으로 몰고 가면 다시 계파 갈등이 생기는 거라고. 새누리당 역사상 수많은 개혁 모임이 있었고, 소장파들이 참여했지만, 결국은 또 다른 갈등이 생겼어. 내가 지금껏 봐왔던 정치판에서 개혁은 곧 갈등이었어. 말이 좋아 개혁이지. 지금은 일단 화합으로 가는 게 맞아.
-지난해 4월, 비박계 C의원

정말 그렇게 흘러갔습니다. 새혁모가 해체수순을 밟은 뒤, 당내에서는 '화합'이란 키워드가 급속도로 번졌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5월 24일. 당시 정진석 원내대표는 친박계 좌장 최경환 의원, 비박계 좌장 김무성 의원과 만나 향후 당내 운영에 대한 합의안을 발표했습니다. 계파 대주주들과 만나 '갈등의 종식'을 선언한 정치적 행위였지만, 달리 말하면, 그간 쌓였던 폐단을 모두 덮고 가겠다는 '혁신의 종식'을 의미했습니다. 그렇게 김희옥 비대위원장, 이정현 당 대표 체제로 이어졌고, 옛 새누리당은 지난해 말, 그렇게 최순실 사태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 책임 회피, 그리고 보수의 기질

<정권 재창출을 위한 지지 회복 방안>

1. 완벽한 계파 청산

→우리 스스로 좁혀 놓은 당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새로운 인물에 문호 개방

→'유권자는 알파고보다 똑똑하다'는 분명한 인식 아래 권력을 사유물화하거나 남 탓을 하는 오만함 등 잘못된 행태 일소
-옛 새누리당 ‘20대 총선 후 당 지지 회복 방안’ 내부 보고서

총선 직후 옛 새누리당은 어떻게 하면 혁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20대 총선 후 당 지지 회복 방안' 보고서는 당이 거듭나기 위한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는 꼭 있어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책임’이란 표현입니다.

혁신.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완전히 바꾸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냉혹한 평가가 수반돼야 하며,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우는 건 혁신의 전제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제1 보수정당은 유독 책임이란 말에 거친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 왔습니다.

이 자리에서 선거 패배의 책임이 친박의 책임이냐, 비박의 책임이냐, 정치적 판결을 내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옛 새누리당, 그리고 자유한국당 혁신의 궤적을 살펴보면 유독 책임에 소극적이었던 게 사실이었습니다. 화합이란 프레임이 쇄신을 덮어버렸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격언으로 끝났습니다. 자유한국당이 최순실 사태에 맥없이 무너지며 대선 패배까지 이어진 건 누군가의 말처럼 좌파 전술의 승리나 우파의 패배만은 아니었습니다. 성장통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면역을 키우지 못했던 안일함이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비박계 의원은 이런 모습을 '보수의 기질'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박근혜 때문에 당 개혁을 제대로 못 했다는 거 동의해. 맞는 말이야. 물러나야 한다는 것도 머리로는 이해해. 하지만, 우리는 박근혜 책임이다, 물러나라, 이런 말 쉽게 할 수가 없어. 이런 게 바로 보수의 기질이야. 우리가 속한 조직의 안정성, 질서가 우선되는 가치야. 박근혜를 말처럼 쉽게 버릴 수 없는 거야.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는데, 그 정권에서 최순실 사태 같은 게 터졌더라면 쉽게 대통령 물러나라고 했을 거야. 진보 세력은 정치를 매우 공학적으로 계산하며 버릴 건 버리고, 털어버릴 건 털 수 있거든. 하지만 보수는 그렇지 않아.
-지난해 12월, 비박계 D 의원

● 악(惡)의 평범성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 학살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끌어냈습니다. 악은 히틀러라는 악인에 의해 기획됐지만, 그걸 실행했던 사람들은 아이히만같은 매우 평범한 관료들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은 그저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유태인을 죽이라고 해서 죽였을 뿐, 자신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고 항변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전형적인 공무원’으로 일컬었습니다. 그는 광신도 혹은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뺨을 때린 것에 괴로워할 줄 아는 평범한 인간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은 그가 유대인에게 저지른 그 어떤 일에도 괴로워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런 그도 한 가지 사소한 사건에 괴로워했어요. 빈에서 유대인 공동체 회장을 심문하다가 그 사람 뺨을 때린 일이죠. 사람 얼굴을 때리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일들이 많은 이들에 일어났다는 걸 세상이 다 아는데, 하지만 그는 뺨을 때린 자신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고 그걸 대단히 그릇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의 말 :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마음 산책

조직의 안정을 위해 사유(思惟)를 애써 외면한 것만으로도 악은 시작됐습니다. 악은 우리 세계 밖에 존재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조직의 논리에 순순히 따르는 것만으로도, 달리 말하면 저항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거대해졌습니다. 악은 이렇게 평범했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결론은 이랬습니다. "성실하게만 살아서는 안 된다."

그간 국회를 출입하면서 만났던 한국당 의원들의 면면은 대단했습니다. 검찰에서, 법원에서, 경찰에서, 각 정부 부처에서, 기업에서, 각자가 몸담았던 조직에서 누구보다 인정받았고, 빨리 진급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국회의원은 일을 안 한다는 세간의 고정관념과는 달랐습니다. 새벽 서너시까지 술을 마셔도 정시에 출근하는 성실함, 아무리 고단해도 자신이 맡은 일은 끝까지 해내는 책임감, 여기에 뛰어난 업무 능력까지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당 의원들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훼손하는 행동을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조직 관성에 매몰돼 자신의 철학을 포기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국회 상임위 회의에서도 이들은 청와대가 내려준 질문지를 그대로 읽으며 정권을 비호하기도 했습니다. 헌법에 명시된 '3권 분립'을 모를 리 없었겠지만, 거역할 생각을 못 했습니다. 상부의 지시를 따르는 게 선(善)이라고 믿었고, 성실함으로 치장했습니다.

개인의 양심은 사치였습니다. 안전하게 가자, 긁어 부스럼 만들어서 말 나오게 하지 말자는 말은 한국당 의원들에게 격언과 같았습니다. 호불호를 떠나, 조직의 관성에 맞섰던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이 여전히 배신자 꼬리표를 달며 공격받는 것만으로도 이런 분위기를 방증하고 있습니다.

한국당이 개혁에 쉽사리 나서지 못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겁니다. 개혁의 기회비용은 조직의 안정성인 까닭입니다. 그 기회비용을 견뎌내지 못하면 개혁은 어렵습니다. 위기 때마다 늘 개혁과 쇄신을 말했지만, 결국 각론으로 들어가면 조직의 안정을 해친다는 공격이 들어왔고, 이내 화합하자는 말로 끝이 났습니다. 보수의 기질은 이런 거라며,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자위했던 역사가 바로 한국당 혁신의 궤적이었습니다.

● 문재인 정부의 실정을 기대하는 사람들
문재인 대통령
최근 만난 한 의원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지금은 지지율이 잘 나오지만, 언제까지 가겠어? 얼마 못 가. 길어봤자 6개월이야. 결국 뭔가 터질 거고, 지지율 떨어질 거야. 그럼 우리에게도 기회가 생긴다고. 두고 봐. 전세는 역전되게 돼 있어. 그게 정치야.
-지난달, 자유한국당 D의원

상당수 한국당 의원들은 벌써부터 문재인 정부의 몰락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그들의 발목을 잡는 데 정치적 생명을 걸겠다는 의원도 여럿 있었습니다. 정치는 냉혹합니다. 상대의 몰락은 기회입니다. 그걸 기대하는 건 정치판의 생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유례없는 역대 최다 득표 차 패배 앞에서조차 문재인 정부의 실정을 기대하는 의원들의 모습에서, 정치적 비겁함보다는 한국당의 패배감이 읽혔습니다. 대한민국 제1 보수정당의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자괴감, 나아가 더는 면역을 키울 만한 에너지도 의지도 없다는 무력감을 봤습니다. 이게 자유한국당의 현주소일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2년 반 동안 자유한국당을 출입했고, 최근 인사로 자리를 옮기게 됐습니다. 정치부 기자라는 정치 행위자에서, 관찰자로 돌아섰습니다. 한국당을 출입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꼽으라면 지난해 4월 총선 패배 직후, 새혁모에서 주최했던 고려대 최장집 교수의 강연회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최 교수의 말을 들으며 보수 혁신의 철학과 명분을 얻었고, 대한민국 보수의 대푯값이라 할 수 있는 한국당의 쇄신을 기대했습니다. 물론 그 모습을 끝내 보지는 못하고 국회를 떠나게 됐습니다.

그래도 대한민국 보수가, 자유한국당이 왜 변해야 하는지, 왜 쇄신해야 하는지, 그 명분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자유한국당을 앞으로도 계속 지켜보고 싶은 이유입니다. 최장집 교수의 당시 강연 내용으로 갈음합니다.

진보 세력이 변화를 추동한다면 저항이 클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가 진보보다 강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치열한 운동들이 다시 동원되고 격렬한 투쟁과 갈등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효과는 대단히 미미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한국 사회가 실제로 변하려면 보수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그게 효과적이고 비용이 적게 들 겁니다.
-지난해 4월 최장집 교수 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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