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이 있은 지 얼마 뒤 친한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술이 잔뜩 취한 채 밤늦게 넋두리를 펼쳐놓았다. 대기업 입사시험에서 열 번 남짓 떨어진 아들이 혹시 자살할 까봐 겁난다는 거다. 아들 앞에선 짐짓 아무 것도 아닌 척하며 “남들은 백번도 넘게 이력서 쓴다 하더라”며 위로 아닌 위로를 했지만, 갈수록 자신감을 잃어가고 우울해 하는 아들이 너무 걱정된 것이다.
새벽녘 독서실에서 돌아온 아들이 아무 일 없이 자는지 아들 방문을 빠끔히 열어보고 확인해야 선배도 잠이 온다고 했다. 취업 전선에서 아무것도 지원해 줄 수 없는 부모들 가슴도 멍들기는 마찬가지다. 홀로서기에 안간힘을 쓰는데도, 자꾸 넘어지다 못해 엎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들도 정신적 치료를 받아야 대상이다.
우리사회의 일자리 지형도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을까. 고도성장은 업종별 특성이 있긴 해도 어쨌든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한다. 7%를 넘던 고도성장은 이제 먼 나라 이야기가 됐다. 2, 3%대 성장은 한다지만 문제는 고용 없는 성장이다.
한국은 성장이 고용을 유발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고용탄력성이 OECD 최저다. 젊고 새로운 기업은 더 이상 생겨나지 않고, 기존 기업은 활력도 없고 더 이상 성장하지 않다보니 고용창출 여력이 없다. 88%의 고용을 담당한 중소기업은 한계상황에 허덕이며 나쁜 일자리 창출의 근원이 되고 있다. 10%의 좋은 일자리를 대기업과 공공부문이 차지하다 보니, 청년들은 죽으라고 고시와 대기업 입사시험에 매달린다.
일단 10%의 좋은 일자리에 구사일생으로 진입한 사람은 거기서 일의 양과 질을 독점하며 본전 이상을 뽑으려 한다. 한번 이탈하면 궤도 재진입이 거의 불가능한 우리 일자리의 특성상, 좋은 일자리를 가진 이들은 혹여 퇴출될까봐 사생결단으로 뭉치고 버티기에 대기업 노조는 강성화의 길로 치닫는다.
갈수록 견고해지고 좁아지는 10%의 문을 열기 위해 청년들은 목숨을 걸고, 이른바 나쁜 일자리에 속한 90%의 근로자들은 점점 벌어지는 임금과 복지, 근로조건의 격차를 실감하며 박탈감 속에 살아간다.
이런 여건에서 문재인 정부는 일자리로 시작해 일자리로 경제정책을 완성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대통령이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까지 만들어 일자리의 양과 질을 동시에 챙기겠다는 상황은 기업들에겐 분명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고용창출에 대해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전제로 하는 정책적 판단 역시 필요하다. 무리한 고용확대로 경영 부실이 초래된다면, 불량 일자리가 양산되는 동시에 장기적으로 고용감소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노동계 역시 일자리 시장에서 ‘님비’를 철폐해야 한다. 10%의 좋은 일자리를 가진 근로자들이 노동의 양과 질에서 어느 정도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는 한, 일자리 전선의 냉기가 걷히긴 힘들다. 최소한 10% 근로자들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니다. 약자인 양 코스프레 하며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안달복달할 때 나머지 90%의 파이는 더욱더 적어진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일자리 나누기는 세대 간에도 필요하다. 적극적인 임금피크 도입으로 중년은 백세시대에 오래도록 일자리를 지키고, 청년은 일자리를 나눠 갖는 기회를 얻어야 한다. 그러기에 소득주도 성장의 가장 큰 동력은 이해 주체간의 양보와 배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