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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곶자왈에서 쉬고, 오름에서 억새와 춤을 추다 - 제주 쫄븐갑마장길 ①

[라이프] 곶자왈에서 쉬고, 오름에서 억새와 춤을 추다 - 제주 쫄븐갑마장길 ①
▲ 너른 평원의 억새는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제주도로 걷기 여행을 떠나면서 품은 로망 하나. 또 어쩌면 걸으러 가는 그 곳이 어디든 품게 되는 기대일지도 모른다.

지평선 저 너머에서부터 까마득히 달려온 파도가 섬 가장자리 절벽을 철썩~하고 부딪고, 그 절벽 위로 실처럼 이어진 바닷길을 살랑살랑 걷는 것. 그리고 하늘하늘 춤추는 억새들의 군무에 취해 정신줄이 툭~ 끊어지는 듯 아득해지는 무아(無我)의 평원을 홀로 걸어 보는 것.
섭지코지의 바다를 에둘러 절벽이 흐르고, 사람들은 탄성 속에서 길을 걷는다.
이것이 로망이라면 로망이고 걷는 이의 맹랑한(?) 기대라면 기대일 것이다. 하지만 꿈은 깨기 위해 꾸는 것이 아니던가. 단지 그런 꿈을 꾸었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작은 기대를 안고 제주도 길을 걸었다. 그 곳에는 꿈꾸었던 바로 그 길은 아닐지라도, 그 길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길이 있었고, 또 사람들이 있었다.
억새와 풍력발전기는 바람의 지휘에 따라 노래하고 있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하나는, 산중턱에서 미어터질 듯 빼곡한 억새들이 섬나라의 봄바람에 울부짖듯 노래하는 모습이었다.

제주 올레 2코스를 걸은 후 연이어 3코스를 걸으며 억새(또는 갈대)에 대한 아쉬움이 계속 이어졌었다. 한편으론 이 길 위에서 억새 평원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3코스의 온평리 바닷길를 지나고, 이어진 숲길을 지나고, 다시 바닷길에 섰을 때, 다른 선택을 해야 했다.
온평리 바닷가를 따라 제주 올레 3코스는 이어진다.
시간은 오후로 들어선 지도 이미 오래, 지금 다른 길을 찾아 떠나야 한다면 종주 여부가 의심스런 상황이었다. 주저하고 주저하며 길 위에서 종종거리길 몇 분...

그때 <두려움과의 대화>를 쓴 톰 새디악의 조언이 힘이 된다. “두려움이라는 늑대와 진리(*선한 의지나 바람 등을 의미)라는 늑대가 있다. 누군가가 묻는다. 누가 이겼느냐고. 대답은 간단하다. 당신이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긴다.”는 조언 말이다.

그래서 콜택시를 불렀다. 거금 1만 8천 원을 들여 조랑말체험공원으로 달렸다. 그렇게 해서 <쫄븐갑마장길>을 걸었다.
쫄븐갑마장길 지도.
‘쫄븐갑마장길’에 대한 정보는 한국관광공사가 운영하는 <걷기 여행길 안내 포탈(www.koreatrails.or.kr)>에서 얻었다. 곶자왈길이 있고, 잣성길이 있으며, 멋진 오름의 억새길을 걸을 수 있다는 소개는, 내가 찾던 그 길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녹산로 유채꽃의 행렬. 유채꽃이 흐르는 강물이었다.
조랑말체험공원으로 가는 길인 녹산로의 양편으로는 때늦은 유채꽃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야말로 유채꽃의 사태였고, 유채꽃이 흐르는 강물이었다. 차를 세우고 그냥 이 길을 걸어도 좋을 듯싶었다. 나의 감탄에 택시기사님은 4월초에 이곳에서 제주유채꽃 축제가 열렸었다고 알려준다. 온 천지가 유채꽃 바다였다는 설명이다.
조랑말체험공원 입간판 맞은편에 길의 시작점이 있었다.
조랑말체험공원에 도착하자, 부슬부슬 이슬비가 내린다. 어쩌랴. 달리 선택지가 없는 도보 여행자에게 가고자 했던 길을 걷는 것 말고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물어물어 길의 초입을 찾고, 드디어 첫발을 내디뎠다. 조랑말체험공원 입간판 맞은편에 길의 시작점이 있었다.
쫄븐갑마장길의 이정표가 길을 가리킨다.
<쫄븐갑마장길>에 ‘쫄븐‘은 제주도 말로 ’짧은‘에 해당하는 말이다. ’갑마‘는 말 중에서 갑(甲)인 최고의 말을 이르는 말이고, 그 말을 키우던 곳이 바로 제주 ’갑마장‘이다. 이 갑마장(甲馬場)을 에둘러 도보 여행길을 만들어 놓았으니 ’갑마장길‘이다. 그리고 이 ’갑마장길‘이 20km 남짓 되는데, 이 가운데 핵심이 되는 10여km 거리의 코스를 바로 ’쫄븐갑마장길‘이라고 한다. 이해되셨는가?
쫄븐갑마장길의 곶자왈
쫄븐갑마장길을 들어서면 이내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숲길이 이어진다. 제주도 말로 곶자왈이다.

‘곶자왈(Jeju Gotjawal)은 숲을 뜻하는 제주 사투리 ‘곶’과 돌(자갈)을 뜻하는 ‘자왈’을 합쳐 만든 글자로, 용암이 크고 작은 바위 덩어리로 쪼개져 요철(凹凸)지형이 만들어지면서, 나무, 덩굴식물 등이 뒤섞여 원시림의 숲을 이룬 곳을 이르는 제주 고유어‘다.(*위키백과)
숲이 흩어놓은 향기를 맡아보다.
흐린 날씨 탓에 숲은 잿빛 속에서 잔뜩 움츠려 있었다. 숲을 허겁지겁 바삐 걷는 어느 순간, 코끝에 와 닿는 그 무엇이 있다. 상쾌한 느낌이 나면서도, 은은하고 또 그윽하다. 숲이 흩어놓은 향기였다. 아! 새삼 깨닫는 푸른 향기가 아득하다. 살면서 몇 번이나 숲의 내음을 인식하였던가. 정신이 번쩍 든다.

그렇게 길은 숲을 향하고, 길 위에 갈아놓은 야자매트(야자수에서 뽑은 섬유로 만들었다는 매트)는 걷는 이의 발걸음을 부드럽게 한다.
동백이 처연한 표정으로 길 위를 수놓고 있다.
길 위에는 이른 봄과 노닐었던 동백이 처연한 표정으로 길 위를 수놓고 있다. 비록 길 위로 떨어진 꽃이지만 냅다 밟을 수는 없는지라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진다. 그것도 진달래도 아니고 동백꽃인지라...... 더더욱 ‘즈려 밟을‘ 수는 없었다. 
미로를 닮은 목책이 길을 막고 서 있다.
얼마를 더 갔을까. 미로를 닮은 목책이 길을 막고 서 있다. 말과 같은 덩치 큰 가축들이 지나가지 못하게 막아놓은 목책이 아닐까 싶다.

숲의 터널이 끝나갈 즈음, 고사리가 보인다. 저걸 한 아름 따간다면 집에서는 분명 큰일 했다고 칭찬을 해줄 것이나, 상식이 있는 사람이 할 짓은 아닌 지라, 사진에만 담는다.
길은 삼나무 숲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길은 수목을 바꾸어 삼나무 숲으로 이어진다. 제주의 오름들이 민둥산이었을 적에 녹화사업의 일환으로 심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제주의 거센 바람으로부터 감귤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방풍림으로 심었다는 설도 있는 제주의 삼나무. 삼나무가 제주의 산야(山野)에 어울리는 나무인가 하는 논쟁과는 별개로 쭉쭉 뻗은 그 기상만큼은 그야말로 드높았다. 언뜻 일본의 규슈 올레길에서 만났던 풍경과 닮아 있음을 깨닫는다.
가시천은 건기에는 유량이 거의 없는 하천이다.
얼마가지 않아 온통 이끼 옷을 두른 건천(乾川)이 나타난다. 가시천(加時川)이다. 건기에는 유량이 거의 없는 하천이라서 그런지 이정표가 없었다면 개천인지도 몰랐을 정도다.
짙은 푸르름이 밀림의 가운데에 있는 듯 아득하기만 하다.
이끼와 숲이 이루어내는 짙은 푸르름이 밀림의 가운데에 있는 듯 아득하기만 하다. 가야할 길마저 삼켜버린 푸르름은 벽처럼 깊고 또 서늘하다. 시간을 더한다는(加時川) 개천의 이름과는 달리, 그 더한다는 시간이 차라리 원시로 거슬러 올라갔던 것일까? 개천의 가운데에 서면 마음도 차라리 서늘해진다.
쫄븐갑마장길 15
제주의 아낙들은 이슬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김을 매느라 여념이 없다.
가시천을 지나면, 시야는 잠시나마 뻥 뚫린다. 풍력발전기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긴 팔을 휘두르고, 그 아래에서 제주의 아낙들은 이슬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김을 매느라 여념이 없다. 가꾸는 작물이 뭐냐고 여쭈니, 더덕이란다. 사진은 찍지 말라며 손사래를 치시는데, 한 장만 찍겠다고 사정을 했고, 아낙들은 웃으신다.
길은 까만 얼굴로 묵묵히 뻗어있다.
날이 흐려서인지 길은 더욱 까만 얼굴로 묵묵히 뻗어있다. 그 까만 길을 나 홀로 고요만을 동행한 채로 도보 여행자의 자유를 만끽한다. 큰 소리로 노래를 불러도 될 것 같은 길을 독차지한 자만의 즐거움과 여유가 있다. 태곳적의 길을 지나는 듯 아득한 선경(仙境)을 찾아나서는 기분이 이러 할까. 마음은 느긋하여지고, 소요(逍遙)하듯 걸으며 몸은 충전의 시간을 갖는다.
풍경을 갈라놓으며 길은 어디론가 흐르고 있었다.
다시 길은 숲을 갈라놓으며 나아간다. 마치 길의 숙명은 자신 앞의 풍경을 좌우로 나누고, 그 속으로 침입하는 정복자의 모습이어야 하는 듯 거침이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길을 막아서는 계단들의 행렬. ‘오름의 여왕’으로 불린다는 따라비오름으로 가는 길이다.
계단의 끝에 오름이 있다.
한 발 한 발... 내가 생각하고 오르고 했던 그 오름을 오른다. 해발 342m, 높이 107m에 불과한 오름인지라, 그 계단이 많다고 해봐도 그까이꺼~ 아직은 거뜬하다. 오름 정상이 머지않은 지점에서 바라본 지나온 길에는 계단이 줄지어 나를 ‘따라’ 오르고 있었다.
어느 때는 지나온 길마저도 낯설다.
가끔 가던 길을 멈추고 가만히 뒤돌아보면, 지나온 길이건만 조금은 낯설다. 지나왔다고, 경험해봤다고 다 아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 깨달음? 여하튼 그랬다. 보고 듣고 스치는 풍경을 눈 가득 담았음에도, 내가 본 것은 극히 일부였던 것이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놓쳐버린 풍경들이 돌아본 저 너머에서 아는 체를 한다. 
쫄븐갑마장길 20
철쭉꽃 저 너머로 오름이 보인다. ‘따라비오름’이다.
계단을 벗어난 길은, 갈대와 철쭉 군락 사이로 새색시마냥 수줍은 듯 열려 있다. 나 역시 수줍은 듯, 조심스레 물안개 자욱한 길을 열어 나아가자, 철쭉꽃 저 너머로 오름이 보인다. ‘따라비오름’이다.

‘따라비’라는 말은 ‘땅하래비’에서 연유된 말로 추측하는데, 주위에 여러 작은 오름이 있고 그 중에서 가장 큰 오름에게 부여된 이름이 ‘따라비’였고, 그래서 ‘따라비오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염원을 쌓은 돌탑 너머로 따라비오름이 보인다.
이슬비가 촉촉하니 적셔둔 오름의 평원은 고요의 바다였다. 숲 어느 틈에서 제 살아있음을 울어대던 새들도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는, 가만히 바라만 보아도 아득해지는, 그래서 오름을 딛고 선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열리고, 차라리 그 속에 담기어 그냥 주저앉고 싶어지는 아득함이 있었다.
쫄븐갑마장길 22
억새들과 더불어 따라비오름을 오른다.
무지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은 순정(純情)이라더니...... 안다는 것이 차라리 무지의 원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열린 마음으로 가만히 바라볼 수 있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한 것을. 무엇을 더 얹어 주저리주저리 해석하고, 떠들 것인가. 그냥 그 안에서 바라만 봐도 되는 풍경이 있다. 물안개 자욱한 따라비오름이 그랬다.

철쭉들의 사열을 받으며 오름 정상을 향해 나아간다.
철쭉꽃과 따라비오름
오름의 정상에 서면, 능선을 따라 흐르는 억새들의 선율이 있다. 불현듯 불어온 바람에 온몸으로 부르는 그들의 노래가 있다. 오목한 오름의 분지 아래에서 정상으로 치달리며 증폭되는 그들의 합창 소리는 천지간을 깨우기도 하고, 이내 흩어진 소리 너머에는 또 다른 정적이 밀려든다. 
능선을 따라 흐르는 억새들의 선율을 보고 듣다.
오름의 등성이에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탁월한 배려다. 또 어쩌면 가만히 앉아 오름이 전하는 이야기를, 오름이 품고 있는 관조(觀照)와 사색(思索)의 공간을 발견하고, 또 바라보며 인식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또 그 과정 속에서 ‘너 자신’을 깨달았으면 하는 오름의 당부인지도 모른다.
오름의 등성이에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20여분 의자에 앉아 오름을 바라보았다. 산에서 왔는지 바다에서 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안개 속에서 부드러운 능선은 안개의 흐름 속에 자신을 내어준 채로 더불어 흐르고 있었다. 마음이 열리고, 그러면서 편안해지는,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좀 더 ‘너그러워지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길은 오름을 향하고, 그 길을 따라 사람들은 오름을 오른다.
아쉽지만 언제까지 오름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다. 내려오는 길에는 이름 모를 보라색의 꽃들과 철쭉이 배웅을 한다.
오름에서 만난 산담.
내려오는 길에 만난 산담 하나. 작은 오름 정상을 차지한 채로 이곳에 누워있는 어떤 분은 아마도 전생에 세상은 몰라도, 제주도 한 마을 정도는 구한(?) 분이 아닐까 싶다.
편백나무 숲을 벗어난 길은 ‘잣성’길로 이어진다.
오름을 내려가자, 편백나무의 숲이 기다리고 있다. 편백나무 숲만의 향기가 아릿하게 길 위를 흐르고 있었다. 피톤치드인가. 가슴을 열어 한 숨이라도 더 마실 요량으로 코를 벌렁거리며 숨을 들이신다. 폐부 가득히 채워지는 상쾌함을 깨닫는다.

편백나무 숲을 벗어난 길은 ‘잣성’길로 이어진다.


<2편에 계속>


## <쫄븐갑마장길 가는 방법> 

- 쫄븐갑마장길은 진입로까지 가는 대중교통이 없다. 원점회귀 코스이므로 자동차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고, 가장 가까운 가시리마을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갑마장길’ 20km 전체코스를 걷는 방법이 있다.

-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표선민속촌방면 버스를 타고가다 가시리정류장에서 하차. 제주시외버스터미널 (064)753-1153

- 표선콜택시(064-787-5588), 표선콜(064-787-7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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