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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의 라이프 저널리즘] 도와주긴 뭘 도와줘

[이주형의 라이프 저널리즘] 도와주긴 뭘 도와줘
최근 우리 입말 글말에서 쉬이 잘못 쓰는 말을 골라 담은 '보리국어사전'이란 사전이 나왔다. 예를 들어 '부스스'와 '부시시'를 비교하고 '~중'과 '~와중'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는 식이다. 4년을 준비해 이 사전을 펴낸 이는 (사)국어문화운동본부의 남영신 대표다.

남 대표는 최근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최근의 '높임말 마구 쓰기'에 대해 몇몇 사람과 고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모님은 스승의 부인을 일컫는 말인데 아무렇게나 쓴다. '커피 나오셨어요'라는 표현이 난무한다. 이는 말글살이를 불편하게 하고, 소통에 장벽을 만든다. 어떻게 풀어갈지 지혜를 모으고 있다." 

이 기사를 읽다가 내가 10년 전에 썼던 글이 떠올랐다. 내 기억으론 이런 엉터리 높임말이 막 만연하기 시작한 때였다. 개인 차원에서라도 바로잡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10년이 지난 뒤에 돌아보니 이런 현상은 오히려 공고해졌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높임말을 쓰지 않았다고 항의하는 '진상' 손님까지 나오는 지경이다. 10년 전의 칼럼을 꺼내어 본다.



<도와주긴 뭘 도와줘>

요사이 프랜차이즈 카페, 식당, 영화관 등지에 가면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자리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른쪽이세요.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메리카노 한 잔 주문하셨습니다. 8천 원이세요. 카드 할인해서 7천 7백 원이십니다.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만 원 받았습니다. 거스름돈 2천 7백 원입니다. 여기 거스름돈 2천 7백 원이세요. 설탕, 프림은 왼쪽 테이블에 있으세요. 즐거운 시간 되세요. 감사합니다" 이것도 많이 줄인 건데, 들어설 때부터 뭔 물어보는 게 그렇게 많은지 일일이 답하기도 귀찮고 안 하자니 사람 무시하는 것 같고 해서 참 난감하다.

아니, 만 원 내민 나나 만 원 받은 종업원이나 눈앞에서 빤히 만 원짜리를 보고 있는데 도대체 왜 그걸 복창해야하냔 말이다. 게다가 존댓말들은 왜 그렇게 써대는지...

나중에는 내가 뭘 주문했는지는 물론 내가 사람인지, 돈이신지, 테이블이신지, 오른쪽이신지 헛갈릴 지경이다. 이들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기 때문에 이들과 대화에서는 사는 이와 파는 이 사이에 오가는 정 따위는 전혀 느낄 수 없다. 그걸 바라는 것은 요즘 같은 세상에서 한가하다 못해 한심한 기대 사항이니 넘어가자.

그런데 가만히 듣다 보면 이들은 말을 불필요하게 길게 하고 있을뿐더러 매매 행위의 의미까지 왜곡시키고 있다. 언제부턴가 등장한 '도와주겠다'라는 표현 얘기다.

오늘 낮 점심 먹으러 선배들과 회사 앞 퓨전 중식당에 갔다. 식당에 들어서자 종업원들이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로 시작해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로 전개하더니,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로 마무리한다. (이 중간에도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말들이 오갔는지에 대해선 더이상 말하지 말자) 어차피 정담(情談)을 나누는 것도 아닐 바에야 당신은 당신 일(손님이 밥을 먹도록 빨리빨리 진행시키는 일)하고 나는 내 일(주문하고 밥 먹고 돈 내는 일) 하면 된다.

그런데 왜 내가 할 주문도 당신이 '도와주고', 내가 할 계산도 당신이 '도와 주냔' 말이다. 나는 밥집에 가서 주문도 못 하고 밥값 계산도 못 하는 바보가 아니다. 당신이 할 일은 주문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주문을 '받는 것'이고 계산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는 일'이다.

압권은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였다. 아니, 안내를 도와주겠다니, 그럼 내가 안내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안내를 하는 사람이었다는 건가. 아니면 안내 도우미 한 명이 더 있는 건가. 종업원은 그냥 안내를 하면 되는 것이다.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하긴 아르바이트하는 친구들이 무슨 죄가 있겠나. 시키는 사람들이 문제지. 이런 일련의 말도 안 되는 생색용 문구를 만든 이들은, 그리고 돈 내는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들은, 만일 집에서 아이들이 "아버지 성적표 열람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버지 등록금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도대체 도와주긴 뭘 도와 주냔 말이다. 돈은 내 주머니에서 나가 당신 주머니로 들어가는 건데. 좀 깎아주든지 돈 내주면서 그런 얘기 하든가.

(2007년3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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