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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공터에서' - 김훈 "역사의 하중을 견디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

[취재파일] '공터에서' - 김훈 "역사의 하중을 견디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
작가 김훈이 새 책을 냈다. 장편소설 ‘공터에서’. 지난 6일, 출간을 기념한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거대한 전망, 시대 전체의 구조, 통합적 시야가 저에게는 없다. 내가 쓰고 싶은 것, 써야 마땅한 것을 쓰는 것이 아니고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겨우겨우 조금씩 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렇게 ‘쓸 수 있는 것을 겨우겨우 조금씩’ 써낸 책 ‘공터에서’는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고난의 시대를 살아온 마 씨 집안사람들을 조명한다. 아버지 마동수에는 작가의 부친인 김광주(1910∼1973), 둘째 아들 마차세에는 작가 자신이 겹친다.

기자는 간담회를 통해 김훈의 '말하기' 특징을 관찰했다. 이날 작가는 원고 없이 1시간 가량을 즉흥적으로 이야기했다. 기자들이 질문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가 홀로 말하는 자리였다. 방송기자 일을 하다 보면 말하기와 글쓰기가 서로 얼마나 다른 성질의 것인지에 대해 (저절로) 알게 된다. 회사로 돌아와 기사를 쓰기 위해 방금 촬영한 인터뷰 영상을 돌려보면, 제아무리 달변가라는 사람도 ‘그러니까’, ‘이런’, '제 말은', ‘그’, ‘저’, '음' 같은 무의미한 단어를 (생각보다 자주) 섞어 쓴다.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 대부분 말할 때엔 글쓰기라면 사용하지 않을 단어들을 문장의 이곳저곳에 집어넣는 방식으로 생각할 시간을 번다. 김훈은 달랐다. 이날 이야기한 것을 그대로 풀어 다시 문서 위 활자로 읽어보았다. 한 편의 글이라고 해도 손색없었다. 기자는 이런 식의 말하기를 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 그렇다고 말의 속도가 느리거나 어눌한 것도 아니다. 그저 글쓰기 하듯 말하는 사람이다.

정교한 문어체의 말투보다 흥미로운 건 ‘내용’이었다. 많은 언론에서 이날 그의 말하기 내용을 간추려 기사로 냈지만, 지극히 일부분이다. 작가 자신의 가정사부터 세월호 참사를 거쳐 최근의 촛불집회를 지켜본 경험까지 김훈이라는 거대한 산을 장장 1시간동안 가까이서 샅샅이 지켜본 텍스트이기에 조금은 길지만 전문을 싣는다. 신간을 읽은 사람, 읽을 사람 모두에게 의미있을 것 같다. 앞서 밝혔듯 작가가 말한 것을 '그대로' 받아적은 '속기록' 수준의 글이다.
김훈 작가의 신간 '공터에서'
김훈 장편소설 『공터에서』 출간기념 기자간담회 (지난 6일, 한국프레스센터)
- 김훈입니다. 저는 이런 자리가 너무 쑥스러워서 안 하려고 그랬는데 제가 글을 써서 책상 서랍에 넣어놓은 게 아니고 세상에 내놨으니까 피할 수 없는 자리겠다, 싶어가지고 여기 오게 됐습니다. 저도 젊었을 때 여러분하고 똑같은 직업에 종사했는데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되니까 참 쑥스럽고 몸 둘 곳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는 너무 오늘 여기 오기가 힘들어가지고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빙판에 넘어져가지고 이마가 다 깨지고 무릎이 깨져서 겨우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졸작 소설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준 것에 대해서 매우 두렵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쓴 소설은 제가 살아온 시대에 관한 소설입니다. 저는 1948년에 태어나서 올해 70살이 되었습니다. 저의 돌아가신 아버지는 1910년, 우리나라가 망해서 없어지던 해에 태어났고 나는 그 나라를 다시 만들어서 정부수립을 하던 해에 태어났습니다. 1910년과 1948년이라는 두 숫자가 우리 부자의 생에 운명적인 좌표처럼 찍혀버린 것이죠. 여기서 부터 결코 도망갈 수가 없는, 피해서 달아날 수 없는 한 시대의 문명이 전개되었던 것이고 저나 저희 아버지나 모두 그 시대에 참혹한 피해자였습니다. 저의 소설에는 그 피해자의 얘기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의 소설에는 영웅이나 저항하는 인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역사의 하중을, 시대가 개인에게 가하는 고통을 견딜 수 없어서 도망 다니고, 그 시대를 부인하고, 또는 그 시대가 하중이 무거워서 미치광이가 돼서 세계의 바깥을 떠돌고 그런 인간들의 모습을 그렸죠.

그리고 희망이라는 것은 아주 조금밖에 말하지 못했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 속에 들어있는 희망을 아주 조심스럽게 말하다가, 희망을 말하다가 미수에 그친 것 같았어요. 그래서 참 미수에 그친 것이 너무나 사소하고, 또 무력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내가 아주 협소한 시야와 협소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거대한 전망, 시대 전체의 구조, 통합적인 시야가 저에게는 없습니다.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것, 써야 마땅한 것을 쓰는 것이 아니고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겨우겨우 조금씩 쓸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런 글로써, 이런 글쓰기로 내 생애를 마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죠. 내가 쓰고 싶은 또 써야만 하는 어떤 목표나 당위가 있다 하더라도 그 목표를 향해서 나의 언어를 몰고 가서 올바른 표현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장인적 기법이 확보되지 않는 한 저는 글을 쓸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참 괴로운 고백인데, 내 고백에는 거짓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소설은 시대의 여러 가지 모습을, 제가 쓴 것보다 쓰지 못한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쓰지 못한 부분이 훨씬 많았죠. 여러분들은 제가 쓰지 못한 부분을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제가 겨우 쓴 부분을 좀 어여삐, 연민을 가지고 봐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부탁입니다.

저는 이 시대 전체를 전체로서 묘사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고심 끝에 고심참담해서 도입한 기법은 우선 전체를 다 통괄할 수 없는 자로서는 어떤 디테일한 세부 사항, 디테일에 갑자기 달려들어서 날카롭게 한 커트 찍어 버리는 스냅적인 기법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디테일을 통해서 디테일보다 더 큰 것을 어떻게 드러냄으로써 이 괴로운 글쓰기를 돌파하자는 생각을 했었고. 그 다음에는 이렇게 포착된 디테일들을 그리는데, 이 펜에 스피드를 매우 빠르게 해가지고 빠른 속도로 그 골격만을 그려내고 세부사항을 그려내지 말자. 빨리 펜을 빨리 움직여야겠구나. 그래서 미술로 치면 크로키 같은 기법을 써야겠구나. 그래야만 내가 이 어려운 난관을 돌파할 수가 있겠구나. 전체를 말할 수 없는 자의 전략적 기법으로써 그런 스냅 사진과 크로키 데생 법을 써가지고 문장을 전개해 나가야겠다, 그런 전략을, 글쓰기의 전략을 세웠습니다. 나의 전략은 부분적으로 성공했고 또 많은 부분에서 실패했습니다. 이 소설은 처음에는 이것보다 3배, 3배 정도의 분량으로 썼다가 스냅과 크로키가 좋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걷어내고 남은 부분만 인쇄를 했습니다.

저의 등장인물은 어떤 이념이나 사상이 거의 없는 사람들 입니다. 나는 그런 것보다도 어떻게 생활의 바탕 위에서 이념과 사상이 건설, 전개되어야 보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거기다가 명석한 전망이나 희망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마 제가 쓴, 지금까지 쓴 모든 작품에서도 그와 똑같은 문제를 발생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너의 한계다'라고 말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한계입니다. 그것은 저의 아주 분명한 한계죠. 그런데 저의 한계가 그것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문장 하나 하나마다 저의 한계는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루에 수많은 한계에 부딪혀서 갈팡질팡하고 살고 있습니다.

이번 소설은 만주에서 떠돌다가 온 일제시대, 1910년생, 우리아버지, 1910년생들이, 나라 망하던 해에 태어난 젊은이들이 만주를 헤매다가 돌아와서 여기서 한국전쟁과 이승만, 박정희 치하를 겪은 그 우리 아버지 세대들 그리고 나는 48년에 태어나서, 이승만 때 태어나가지고 박정희 시대부터 지금까지 산 사람들의 얘기를 그렸는데 아버지는, 소설 속에 아버지는 상해에서 돌아온 분이고 그 어머니는 6.25때 흥남부두에서 내려온 월남 피난민들이죠. 이 두 부부가 부산 피난지에서 결혼해가지고 난 자식들이 '마장세'와 '마차세' 라는 두 2세들인데 이런 설정은 도식적인 점도 있는 것이죠. 만주에서 돌아온 사람과 월남한 여자들이 흥남에서 배를 타고 내려온 여자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좀 도식적인 점도 있는데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아들이. 아들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스냅과 크로키로써 쓴 것입니다.

마장세라는 큰 아들은 한반도에서의 삶과 자기 아버지의 삶, 역사가 주는 하중이 너무 지긋지긋하고 감당할 수 없어서 마이크로네시아로 도망가 버린 패륜아죠, 그 자는. 그리고 그 동생 '마차세'라는 녀석은 불과 2년 후에 나오는데 얘는 그냥 어쨌든 조국의 현실 속에서 발붙이고 기신기신 살아가려다가 결국 여러 가지 고초를 겪게 되는 그런 과정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마차세'는 말하자면 생활인으로서 발붙이는데 거듭거듭 실패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죠.

지난 6일, 신간 '공터에서' 기자간담회

어떤 분들은 저의 아버지 '김광주' 그분을 모델로 한 것이 아닌가 싶은 질문을 하는 분도 있는데 그것은 나의 아버지와 그 시대에 다른 많은 여러 아버지들을 합성한 것 입니다. 그들의 옷 입고 다니는 폼, 그들의 말투, 어투. 그 사람들은 대개 만주에서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어투가 매우 크고 몽롱하고 가파른 말을 사용하는 말하자면 언어의 협객이죠. 현실에서는 완전히 뿌리 뽑힌 언어의 협객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술 먹고 떠들고 그런 것들을 많이 봤어요. 나는 그걸 그때 보면서 절대 저런 인간이 되면 안 되겠구나 결심을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나는 그 사람들 싫어했어요. 그런데 그분들이 삶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겉돌고 헤매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모자이크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상해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하는 말들은 거의 대부분 과장된 것 입니다. 자기의 생애를 과장해 가지고 후배들한테 허장성세로써 말하는 것, 많은 것들이 지금 그대로 이전되고 있는 것이죠.

아버지는 무슨 '김구' 선생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라고는 볼 수는 없었고 아버지는 그렇게 주장하고 다녀서 그렇게 알려져 있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유랑청년이었어요. 그 시대 수많은 떠돌던 유랑 청년 중에 하나였고 그 유랑의 모습이 저의 소설에 그려져 있고 그들의 유랑의 내용이 어떤 거였든지. 그리고 김구선생이라는 그 거대한 캠프에 먼 외곽에 배치되어 있었던 그런 젊은이들로 김구 선생님의 눈에는 보이지가 않는 아득히 멀리 있는 그런 유랑의 청년들이었죠.

이 점에서 여러분들이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런 아버지, 거기서 태어난 아들의 삶을 그렸는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제가 쓰지 못한 것 그런 것들이 너무나 많았어요. 나는 우리, 내가 이 땅에서 70년을 살면서 내가 정말 소름끼치게 내가 무서웠던 것은 우리들 시대의 야만성과 폭력이었습니다. 한없는 폭력, 한없는 억압, 한없는 야만성, 그것을 이루 다 말도 못하는 것이죠. 그런 것들이 지금까지도 악의 유산으로 세습되고 있는 것이죠.

내가 이 소설을 쓰려고 지나가는 시대의 신문을 많이 봤습니다. 지나간 시대의 사회면을 많이 봤더니 우리 사회의 70년 동안의 유구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갑질'이더군요, 갑질. 뿌리 깊은 악의 유습으로 내려오는 이 갑질, 그런 것들이 전쟁 때에도 아주 적나라하게 신문에 나타나 있더군요. 피난민들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한 50만 명이 줄을 지어가지고 그 추운 겨울날 피난을 가는데 이 나라 고관대작들이 군용차와 관용차를 징발해서 그 군용 트럭에다 응접세트를 싣고 피아노를 싣고 먼지를 날리면서 피난민들 사이를 남쪽으로 질주해 내려갔고, 국방부 정훈관이 '제발 이런 짓을 하지 말아 달라'고 성명을 발표한 그런 성명들이 신문에, 조선일보에 그때는 조선일보에 그리고 부산일보에 큰 탑 기사로 나온 걸 봤어요.

그뿐 아니라 매일 매일 그와 유사한 갑질, 그것이 이제 보도가 된 것이죠. 나는 그걸 보고 '아 내가 태어난 조국이 이런 나라구나'를 깨달았어요. '아 나는 이런 나라에 태어난 후예로구나. 이런 나라에 태어나서 글을 쓰고 있구나' 슬픈 생각을 했죠. 그런데 그런 말하자면 전쟁 때 신문이 보여주는 그런 비리와 야만성이 지금도 계승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광화문에서 매일매일 분노의 함성이 일어나고 있는 그런 전통은 유구한 것이로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앞으로 그런 문제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의 매우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글쓰기를 하게될 것 같으니까 '저 사람은 본래 저런 사람이구나' 하고 그렇게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제 얘기를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기자 질의응답>
* 작가의 말을 하나의 텍스트로 읽길 바라며, 기자들이 던진 각각의 질문은 적지 않았다. 답변을 통해 앞선 질문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 어려운 질문을 하시는데 내 조카들이 지금 장성한 조카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이제 애들이 초등학교를 다니는데 초등학교 애들을 데리고 매일 주말마다 광화문 집회에 나가더군요. 나를 보고도 같이 나가자고 그랬어요. 그런데 나는 물론 거절을 했죠. 그런데 그 사람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좋은 회사에 취직해가지고 중산층에 맨 밑바닥에 겨우 들러붙은 젊은 가장들이었습니다. 나가서 사진을 찍어 보내왔더군요. 집회에 나가서 그런데 사진을 보니까 분노의 기색은 없었고 소풍 온 것처럼 깔깔대고 애들이 손가락 두개로 브이자를 그리고 있는 사진을 보내왔어요.

날 보고 가자고 그러는데 나는 감기 걸렸다 그러고 안 갔어요. 나는 감기에 걸려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는 내 또래의 친구들, 70살 먹은 또래의 친구들이 태극기 집회에 나가가지고 태극기 집회에 나가서 또 그렇게 태극기를 어깨에다 두르면서 소리 소리 지르면서 찍은 사진을 보내와가지고 나보고 같이 가자고 그랬어요. 태극기 집회에 나는 그것도 또 감기 걸렸다 그러고 안 갔어요. 그 때에도 감기가 걸려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태극기 집회에 나간 내 친구들은 나하고 같이 자란 사람들이죠. 우리는 국민소득 100달러 미만의 시대에 사춘기를 보냈고 우리가 대학교 들어갈 때 우리 국민소득이 130달러였어요. 우리는 뭐 에티오피아나 소말리아와 똑같았습니다. 세계 최빈국으로 분류가 돼 있었고 우리는 필리핀의 원조를 받아먹고 살던 시절이었어요. 그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해가지고 지금 대기업, 재벌기업이 나오기 바로 직전에 종합무역상사라는 게 있었습니다. 

종합무역상사 해외 주재원으로 나가가지고 베를린이나 파리에 가서 그 친구들은 상사주재원이 돼가지고 뭘 했냐면 우리나라 여학생들의 생머리를 잘라서 만든 가발, 담양 죽제품, 비닐원단, 미역, 김. 이런 것밖에 팔아먹을게 없었어요. 그런 걸 외국시장에 팔아서 그 한줌의 달러를 국내로 송금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내 친구들, 태극기 집회에 나간 친구들이에요. 그 친구들은 연말에 술을 먹으면 꼭 한탄하면서' 우리가 쌓아온 게 다 무너져간다.' 이런 한탄을 하는 것이죠. 기아의 정서가 있는 거죠.

우리가 어렸을 때 100달러 미만의 살던 그 기아의 두려움, 기아와 또 무서운 것이 적화였습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제일 무서운 게 기아 그리고 적화. 이것이 가장 무서웠는데 그런 잠재적인 근원 정서가 아마 저렇게 됐구나 싶었어요. 난방을 펑펑 때고 밥이 넘쳐흐르는 세상에 살면서도 기아와 적화의 공포, 그런 게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성조기, 그 십자가 이런 것들이 나오더군요.

태극기, 성조기, 십자가. 이것이 내가 어렸을 때 전개됐던 이 나라의 반공의 패턴하고 완전히 똑같은 것입니다. 반공의 패턴의 똑같은 그것이 전개되고...... 내가 이걸 어떻게 알았냐 하면 내 조카나 내 친구들이 가자 그러는 데엔 안가고 지난 연말에 혼자 갔어요. 혼자 가서 아마 나는 참가자라기보다는 그 관찰자로서 갔을 거예요. 이쪽 저쪽을 다 봤죠. 양쪽을 다 봤어요. 갑질의 유구한 전통이 살아남았다고 했지만 그렇게 태극기와 성조기와 십자가가 왜냐하면 반공이라는 것은 항상 내가 어렸을 때는 기독교 우파와 결탁됐어요.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부정하는 정치권력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직까지 남아있구나 싶어서 머릿속으로 생각을 했는데 내가 지금 어디 와있나 싶어요. 70년이 지났는데 나는 또 어디 와 있나 그런 글을 내가 한번 써놨어요. 내가 써 놓아서 어떤 계간지에 발표를 하려고 그러는데 우리 어렸을 때 이승만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외국 갈 때 태극기 들고 나와서 흔들었거든요. 강제로 동원돼가지고 거기 앉아가지고 지금 이제 시위를 하는 바로 그 거리 입니다. 서울 도심지의 학교 애들은 다 거기 나갔어요.

태극기 들고 한나절 기다려야 해요. 교통을 통제해 놓은 그 빈 거리에서 한나절을 기다려요. 애들이 오줌 마려우면 남학생들은 가로수 밑에다가 싸고 여학생들은 발 동동 구르죠. 담임 인솔 교사가 여학생들한테 '참아라, 참아'하는 것을 내가 다 들었어요. 그걸 어떻게 참으라는 건지. 근데 참으라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서 언 도시락을 까먹고 대통령 지나가면 만세 불렀죠. 바로 그 자리에서 지금 또 저렇게 태극기 들고......참...... 내가 너무 오래 산 거 아닌가.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를 모르...... 내가 도대체 서 있는 자리가 어딘가 싶어가지고 정신을 못 차리겠더군요. 그런 비애가 있었죠. 대답이 되었는지 모르겠네.

- 세월호 문제는 제가 그 사태를 어떻게 써야 될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자료는 많이 갖다 읽었습니다. 자료는 아주 많이 읽었어요. 학문적으로 접근하자니 별로 재미가 없고 기자들이 현지에서 수집한 정보를 책으로 만드는 것이 참 재미가 있더군요. 저는 항상 현실에 바탕으로 쓴 글들을 좋아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글은 다큐멘터리, 아니면 보고서 이런 거죠. 현장보고서 이런 것들 아니면 실록, 사실에 바탕을 둔 글들을 좋아하는데 세월호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걸 쓰려면 어쨌든 그걸 변형시켜서 쓸 수밖에 없는데 나는 그 세월호 참사 다음날 자살한 교감선생님을 생각했어요. 안산고등학교 교감선생님은 인솔 책임자였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 나무에 목매달고 죽었더군요. 이걸 보고 난 너무나 끔찍했어요. 이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뭐라고 글을 써야 되나 이 교감선생님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런 것들은 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죠. 그것은 그냥 종교의 영역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2014년 10월, 문인들과 함께 작가가 팽목항을 찾았던 당시 모습
그리고 또 에세이와 소설은 차이를 물어보시는 것 같은데 저는 에세이는 주인공이 없이 무책임한 정서를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기 때문에 에세이가 좀 편하긴 한데 자유로운 정서를... 소설은 반드시 등장인물을 통해서 말해야 되기 때문에 저한테는 좀 어려운 것이죠. 특히 그 3인칭을 만든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3인칭 소설을 쓴다는 것은, 제가 쓴 소설이 3인칭을 쓴다 하더라도, 3인칭이 많이 나오잖아요. '마차세'도 나오고 '마장세'도 나오고 무슨 '마동수', '마남수' 뭐 여자도 나오는데 사실 그걸 잘 들여다보면 그게 아직 3인칭에 도달하지 못한 1인칭의 아류들일 거예요. 그래서 3인칭은 정말 바다와 같이 넓은 것이죠. 그쪽을 지향해야 되는데 그것은 참 가기가 어려운 것이죠. 제가 존경하는 '황석영' 선배님은 3인칭을 정말 잘 만들어내시더군요. 나는 3인칭을 만들기가 너무 어려워요.

- 저는 젊은 소설가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안목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의 다 읽는 것은 아니죠. 나는 내가 필요한 것만 골라다가 읽는데 젊은 소설가들은 확실히 우리 세대가 못 보는 것들을 보고 있더군요. 우리 세대가 못 보는 것을, 우리 세대가 구사할 수 없는 언어를 통해서 구사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놀라운 발전인 것이죠. 사람이 눈을 떴다고 다 보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 같은 노인들을 장님처럼 못 보고 지나가는 것들이 많이 있죠. 그런데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젊은이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 되게 사소한 것들, trivial한 것들, 사소한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고 어쨌든 그것이 내면화 된 것들이 너무나 지엽말단적인 것들, trivial한 것들, 물론 그 trivial한 것 속에서 큰 의미를 찾아낼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일단은, 그런 것들은 저한테 걱정이 된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그 젊은 작가들의 새로운 시선을 매우 경이롭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마 처음에 또 한 질문은 조사와 관련된 문체를 말씀하시는데 요새 젊은이들은 문체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더군요. 그런데 저는 문체를 매우 신중하게 고르는 사람이죠. 아까 말씀드렸듯이 내가 장인적 규범이 없는 한 그 목표를 향해서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어쨌든 기법을 통해서 표현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조사라는 것은 나에게 엄청 중요한 것입니다. 한국어를 쓴다는 것은, 한국어를 읽는다는 것은 그 조사를 잘 읽어야 돼요. 한국어는 모든 논리의 작용이 조사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우리가 말할 때 '는'과 '를'을 안 읽으면 어느 놈이 어느 놈을 사랑하는지 모르게 돼 있어요. 언어 구조가. 한국어로 사유한다는 것은 조사를 연결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사가 5-6개, 는, 를, 이, 가. 6개인가 7개밖에 안 돼. 이걸 이리저리 띄었다 붙였다 하면서 가난한 삶을 사는 거예요. 조사는 그러니까 참 답답한 것이죠. 그러나 그 조사는 아주 또 모호한데 그 모호함 속에 우리 모국어의 힘이 또 있는 것이죠. 그 불분명한 조사 속에...... '비가 내린다'와 '비는 내린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거죠.

그럼 이것을 문법적으로 논리적으로 규명할 수는 없어요. 그걸 분석해서 증명할 수는 없는데 '대답이 없다'와 '대답은 없다' 같은 것이 아니죠. 그걸 규명할 수는 없지만 자기가 읽는 것이죠. 이런 것들을 문장마다 하나하나씩 따져서 쓰려면 진이 빠지는 것인데 그런 노력이 없이는  알 수가 없는 것이죠. 조사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죠. 우리나라에서. 여러분 나는 법전 가끔 읽기를 좋아하는데 법전 읽어보면 우리 순수한 한국어는 조사밖에 없었죠. 조사와 종결어미만 있어요.

지난 6일, 신간 '공터에서' 기자간담회
지시어, 개념어, 주어, 동사, 술어 이런 것들은 다 한자어에요. 한글로 그럼 이걸 바꿀 수가 있는가. 그건 절대로 불가능해요.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할 수가 없어요. 법전을 한글로 한다는 건. 가시리 가시리 있고...... 어기야...... 이걸 해가지고는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법을 쓸 수가 없어요. 땅이라고 하면 땅, '땅'이라는 개념은 법전에 보면 대지, 택지, 동한지 무슨 여러 가지, 수십 가지예요. 땅의 법적 지위가...... 이걸 땅이라고 해서 어떻게 해서 어떻게 하겠어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법적으로 세분화 된 개념이 우리한테 필요한 것이죠. 타인을 기만하여 재물을 편취한 자를 사기라고 할 때 그걸 우리 한글로 할 수가 없어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한문으로 할 수가 없고 그리고 정범, 주범, 종범 무슨 미필적 고의 이런 것들을 우리는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한자를 배워야 됩니다. 그럼 한자는 남의 나라 글자에요? 한자는 남의 나라 글자가 아니에요. 한자는 우리나라 글자입니다. 한자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 들어온 거예요. 우리 여기서 3000년이 넘은 글자니까 우리나라 글자라고 해도 손상이 없는 것이죠. '달아 높이곰 돋아사' 이것만이 우리나라 글자가 아닌 것이죠. 한자를 모르면 법전을 이해할 도리가 없어요. 그 개념이 뭔지를 모르죠. 나는 소설에 한자어를 도입한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한자가 필요하다면 반드시 넣는 것이죠, 거기다가. 그래서 우리 모국어를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 글쎄요. 전체를 통괄하는 우리 문단, 한국문학 전체를 놓고 이렇게 통찰력 있는 진술할 입장은 안 되는데 가령 '조정래' 선배나 '황석영' 선배 같은 분들은 한 시대의 구조, 억압적인 구조, 역사적인 틀 이런 것들을 전체를 내다보면서 그걸 주물러 가면서 거기다 인물을 배치해서 글을 쓰시잖아요. 그리고 우리 윗대 어른들도 그런 작가들이 있었죠. 그런데 저에게는 그런 전체를 들여다보는 시각보다는 아까 말했듯이 디테일을 통해서 좀 더 큰 것을 말해보자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조 전체를 들여다보고 원고지에 올려다 놓고 쓰는 작가들을 나는 한없이 존경하지만 제가 그 분들의 뒤를 따라가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게 저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 광화문 집회에 대해서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에요. 아무데도 안 갔는데 사실 아무데도 안 간 건 아닐 거예요. 양쪽을 다 기웃거렸죠. 두 번쯤 나갔었어요.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해방 후 70년이, 엔진이 공회전 하듯이 지나가지고 나는 같은 자리에, 박정희 대통령하고 태극기 흔들던 그 자리에 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너무나 서글픈 마음이 들었죠. 그런데 어쨌든 그 위정자들이 저지른 난세를 광장의 군중들이 함성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크나큰 불행이지만 그 안에 희망의 싹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것이 그냥 분노의 폭발로 끝나지 말고 새로운 날, 미래를 건설하는 그런 힘까지 동력으로 연결됐으면 하는 바람은 누구나 다 갖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연결하는 것이 정치 지도자들의 몫이겠죠.

- 그것은 제가 나의 아버지 세대와 나의 세대가 살아온 일들을 쓰기로 했는데 지금 같은 쓸 생각은 없었어요. 나의 생각엔 아주 긴 글을 쓰고 싶었어요. 5권 정도를 쓰고 싶었는데 그것이 후기에도 밝혔듯이 기력이 미치지 못했고 많은 부분을 제가 갖다 버렸어요. 아까 말한 크로키나 스냅이 잘 안 된 것 같아서 갖다 버렸습니다. 여기에 바친 노력은 참 많았는데 결과는 초라하게 됐고 내가 쓴 것보다 못 쓴 것이 훨씬 더 많았다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제가 평생의 짐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 대의 일에 대해서 쓰는 것이. 우리 아버지 세대, 그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정말 지금도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절대 저런 아버지가 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누구나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아버지의 고통을 이해 할 수 있지만 나는 저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싶은 생각을 했죠. 그런 고통들이 제가 글을 쓰게 된 중요한 동기였을 것입니다.

- 그것은 참 괴로운 질문인데 희망과 고통 중에서 어떤 것을 써야 하는지 늘 고민하고 있는 것이죠. 내가 이번 소설에서 말할 수 있는 희망이라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죠. 그 갓난애가 태어나가지고 그 소시민적인 삶을 살면서 아주 그 순수한 생명의 원형이 드러나는 것. 그 세상에 태어나는 것. 그 여자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죠. 이 세상에 한 여성이, 여성의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이 참 놀랍고 신비스러운 아니겠어요. 남자도 물론 그렇겠지만 특히 여성의 생명이 태어나는, 왜냐하면 여성은 또 애기를 낳을 수 있으니까. 그런 것들을 희망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이것은 조금 한심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내가 써놓고 봐도. 그러면 나는 또 뭐를 써야 되나 뭐를, 그것이 아니면 무슨 어떤 그런 이념을, 희망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글쎄요. 그것은 나로서는 참 자신이 없는 부분이었어요. 희망이라는 것이 결국 나는 생활 위에다가 건설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이념이 아니라. 그러니까 갑질을 쳐부수는 것, 나는 이런 것들이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유구한 갑질. 갑질을 매일 매일 TV 뉴스 보니까 갑질 세상이에요. 갑질 세상.

-'하춘파'이라는 인물은, 그런 인물의 이력은 내가 많이 봤어요. 아버지 시대에. 아나키스트였는데 정말로 뿌리가 없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그런 많이 봤어요. 그 사람들의 심정은 술 먹으면 권력이 있는 곳에 정의는 없다. 이런 말들을 막, 이런 구호를 막 외치고 그러면서 다니면서 이렇게 광태를 보이는 사람이었죠. 나는 그런 분들의 생애도 굉장히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도저히 희망이 없고 절망만 가득찬 세상에서 그 세상을 어떻게든지 부수려고 애쓰다가 미쳐버린 사람들이죠. 하춘파는...... 그런데 내 소설에서 매우 소략하게 그려졌죠. 왜냐하면 그것은 저의 관심은 그 아들, 두 아들에게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하춘파의 생애는 소략하게 했고 그리고 나중에 그 사람에 대해서 매우 그분을 희화화 하는 것 같은 그런 쪽으로 갔는데 그것은 두 형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할 수 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분에 대해서는 더 많은 글을 쓸 수가 있겠죠.

- 나는 아버지가 어렸을 때 집에 돌아오면 늙은 말이 오는 것 같았어요. 늙은 말이 갈퀴가 눈앞을 덮고 힘이 없어가지고 광야를 헤매다 투덜투덜 들어오는 그런 느낌이었죠. 그래서 이 소설 뒤에도 말 타는 얘기가 나오죠. '누니'라는 애가 어린이 공원에 가서 말 타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 말에다가 아버지의 모습을 투사한 것이죠. 비루먹은 불쌍한 말, 그래서 말 그려놨는데 말이 너무 뻔쩍뻔쩍하고 경마장 말처럼 해가지고 재판에는 좀 초라한 말로 다시 그리려고 얘기를 해놨습니다. '공터에서'라는 제목은 공터라는 것은 주택과 주택들 사이에 있는 버려진 땅이잖아요. 아무런 역사적인 구조물이나 시대가 안착 될 만한 건물이 들어있지 않은 것. 나와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를 나는 이제 공터라고 가정을 한 거죠. 앞으로 여기다 뭘 지어야 되는 공터. 돌이켜보면 내가 이 가건물에서 산 것 같아요. 지난번에도 광화문에 나갔다가 태극기 흔드는 사람들 보고 또 계속 철거되는 가건물 안에서 살아왔구나. 또 헐리겠구나, 또 헐리겠어. 며칠사이면 또 헐어버리고 그런 슬픔을 느꼈죠. 그 공터라는 제목은 그런 나의 비애감과 연결이 되어 있는 제목입니다.

- 글쎄... 마 씨는 내가 확실히 정했어요.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 느낌이 말이니까 이 성은 말로 해야 되겠다. 표지에도 말을 그렸는데 '동'자는 동녘 동자에 다가 지킬 수자를 썼잖아요. 그 지킬 수라는 건 애국적인 이름이죠. 동쪽을 지킨다는 애국적인 이름을. '동'이라는 게 우리나라니까 애국적인 이름을 지었는데 결국은 애국과는 하나도 관련이 없이 세상을 떠도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말았죠. 동수라는 이름이 어떤 아이러니로써 그런 이름을 지었습니다. 썩 잘 지은 이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장세', '차세'는 내가 잘 지었다고 생각해요.
책 '공터에서'
- 내 그동안에 글 쓰는 게 매우 저조해 있었는데 그 이유는 후기에도 밝혔듯이 몸이 많이 안 좋았고 그런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특별한 병은 없는데 노화 현상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늙어가지고. 그리고 글을 쓰기가 싫었어요. 사실 나 자꾸 써서 뭘 하나 싶어가지고 글을 이제 그만 쓰자 생각도 가끔씩은 했어요. 단편을 가끔 쓰고 에세이를 쓰고 그러고 살았죠. 그러다 또 정신을 차려서 쓰고 또 밀쳐 놓고 이런 시절이 많이 갔었는데 올해부터는 좀 정신을 차려서 열심히 쓰려고 합니다. 올해부터는 정말 닭이 알 낳듯이 써보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70년대를 쓸 생각이 없느냐 라고  최재봉 기자님이, 신문을 썼더군요. 나는 그걸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엄두가 나지 않아요. 70-80년대에 내가, 우리가, 한국 언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나는 다 알아요. 나는 완전히 알아요. 그것은 어느 언론사도 예외가 아니에요. 그 후에 생긴 언론사는 예외죠. 신생언론사, 그 후에 생긴 많은 언론사들은 80년대로부터 자유롭지만 그것을 나는 다 알죠.

내 선배들은 더 잘 알 거예요. 내 선배들은 정말로 잘 알 거예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 문제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반성하거나 되묻지 않았어요. 단 한번도. 그리고 그대로 흘러간 거예요. 그것을 말할 때가 되겠죠. 나는 그때 입사한지 내가 74년에 입사를 했거든요. 80년이면 6년차, 1년 견습을 했으니까 5년차, 5년 반쯤 된 기자였죠. 그런 지휘. 나를 지휘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을 쓸 수 있나, 써야 되나 자신이 없어요.   

우선 나는 그보다도, 내가 무슨 소설을 쓰는 것보다도 나는 그 시대에 종사했던 사람들이 다 모여가지고 글쎄 왜 그렇게 됐는지를 얘기라도 좀 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왜 그렇게 됐는지. 아마 내가 짐작하기에 짐작이지만 그 시대에 언론들이 역사라는 것은 민주적인 법칙에 따라서 전개되고 진화한다는 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아마 이것은 맞는 얘기일 거예요. 그런 신념이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그런 신념을 가진 언론인들도 있었지만 그런 신념이 없었고 또 압도적인 사회전체의 공포의 분위기에 짓밟혀 있었던 것 같아요. 내 개인적인 소회입니다.

어쨌든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더 늙기 전에 다들 말할 수 있는, 후세에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그런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 시대에 또 그런 언론행위로써 높이 출세한 자들도 있었어요. 권력의 정상까지 간 사람들도. 아마 지금도 있을 거예요. 지금도. 다 모여가지고 얘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소설을 이걸 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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