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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예은 아빠가 겪은 그 날 이후 - 국가 상대 손배소 당사자 신문 ③

1월 1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10부(이은희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2차 기일에서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등 347명이 국가와 청해진해운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의 당사자 신문이 진행됐다. 당사자 신문을 위해 출석한 유족은 '예은 아빠' 유경근(48) 씨였다. 사고 당시 세월호 근처에 있던 둘라에이스호 선장 문예식 씨는 이날 증인신문이 예정돼 있었지만, 외국에 체류 중인 관계로 다음 변론기일에 나오기로 했다.

유경근 씨는 지난해 4월 21일 자신의 SNS를 통해 '현재 416가족협의회 130가정 342명의 피해자들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한 배·보상을 전면 거부하고 정부와 청해진해운을 상대로 정부가 정한 배·보상금보다 더 많이 받아낼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법조인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진행한다'라며 '이 소송의 목적은 판결문에 정부와 청해진해운의 법적 책임을 구체적으로 명시해 재판정에서 침몰의 원인과 책임, 구조 방기의 이유와 책임, 피해자들에 대한 부당한 탄압의 책임을 따지기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아래는 이날 3시간 넘게 진행된 당사자 신문 과정에서 예은 아빠가 증언한 참사 이후 최근까지 상황에 대한 내용이다.

 
지난해 11월 22일, 첫 변론기일에 촬영한 사진. 법정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되지만 재판장은 노란 점퍼를 입은 유족들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세월호 유족 제공
원고 측 대리인
세월호 가족대책위는 2014. 8. 22.부터 여야가 합의한 세월호 특별법 재협상을 요구하면서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대통령 면담을 촉구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그 경위를 설명해 달라


유경근(예은 아버지)
도저히 특별법 합의가 안 되고, 여야가 계속 이상한 합의안만 가져와서 우리에게 강요하고. 그러니 이것은 대통령께서 말씀하신 취지와 안 맞지 않습니까, 대통령께 다시 한번 국회에 강력하게 얘기를 해서, 특히 여당에 얘기를 해서 대통령의 뜻을 좀 얘기해 주십쇼. 그러니까 우리를 좀 만나주십시오, 국회와는 아무리 얘기를 해도 안 되니 이제는 만나주십시오. 왜냐하면 청와대에서 5월에 만나고 나올 때 대통령이 분명히 그러셨다.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특별한 일정만 아니면 언제든지 얘기 듣고 도울 수 있는 건 돕겠다고. 너무나 진지하게 한 사람 한 사람 손 잡아가면서 이야기하셨다. 저희는 그걸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저희는 어려울 때마다 대통령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거고.

이 날도 그런 이유로 갔는데, 전혀 예상치 못하게 경찰이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틀어막고,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희가 요구한 게, 이 많은 인원이 들어가는 건 안 된다고 하는 걸 이해한다. 그러면 대표가 몇 명 들어가서 만나면 되지 않느냐. 그런데 대통령 일정상 안 된다고 거절했다. 그러면 대통령을 저희가 직접 못 만나면, 비서실장이라든가 관련된 수석이라든가 이런 분들하고는 만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분들하고도 안 됩니까? 그것도 거부를 당했다.

마지막으로 저희들이 다시 요청을 했다. 수석이 아니라 행정관도 좋으니 대통령께 저희의 의견을 직접 전달할 수 있는 분이라면 누구라도 좋으니 동사무소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것도 거부당했다. 그래서 저희들은 그 때부터 누구라도 청와대에서 우리 이야기 들을 사람 단 한 명이라도 나올 때까지 우리는 못 가겠다. 그래서 그 때부터 청운동사무소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2014년 8월 24일, 세월호 참사 가족대책위, 박 대통령 결단 촉구 서한 전달 기자회견/ 출처: SBS 보도국 촬영 영상 아카이브
2015년 3월 27일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진상규명법 시행령 안을 입법예고했는데, 이 시행령 안에는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범위와 인력의 대폭 축소, 위원회 활동 부서를 전부 파견 공무원이 통제하도록 그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어떤 문제가 있었나

저희는 사실 특별법을 만들 때만 해도 시행령이 뭔지 솔직히 잘 몰랐다. 법만 만들면 모든 게 끝나는 건 줄 알았는데, 만들고 나니 시행령이라는 걸 또 만들어야 한다고, 시행령은 정부가 만드는 거라고 얘기하더라. 그래서 그 전에 저희들이 정부에게 여러 차례 의견 제시했다. 시행령 만들 때 특별법의 취지를 손상하지 않도록 만들어 달라, 어떤 부분을 강조해서 만들어 달라, 하는 걸 공문으로 공식적으로 이미 저희들이 해수부에 보냈고. 그렇게 잘 만들어 달라 했는데, 실제로 저희에게 설명하겠다고 가져온 내용을 보니 아예 특조위가 정상적으로 성역 없이 독립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길을 완전히 차단하는 듯한 내용을 가지고 왔다.

대표적인 게 원래는 인원을 120명까지 둘 수 있게 해 놨는데, 시행령이 80명까지 줄여버렸다. 그리고 오히려 공무원 숫자가 더 많도록 만들어버렸다. 또, 사무처가 사무처의 일을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소위원회 전체를 관할할 수 있도록 만들어버리고. 진상규명이 가장 중요한데, 진상규명 소위원회 조직 같은 경우엔 특조위가 제출했던 것보다 훨씬 축소하는 규모로 만들어서 시행령에 집어넣고, 예산 같은 경우에도 거의 반토막을 내버리고. 반토막낸 예산 가운데 특조위와 직접 관련되어있는 조사 활동비는 거의 대부분 70-80% 이상 삭감해 일방적으로 정하고. 이런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저희들이 1주기를 앞두고 시행령을 폐기하지 않으면 특별법은 그냥 말로만 특별법이겠다,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416가족협의회는 여러 시민 단체들과 함께 시행령 전면 폐기를 위한 행동에 돌입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

3월 30일부터 4월 16일까지 416시간 연속 행동을 저희 가족들이 하기로 하고, 시민들에게 제안했다. 그래서 광화문 광장에서 416시간 연속으로 농성을 하는데 주로 릴레이 농성을 했다. 이와 관련한 기자회견이라든가 간담회 특히 여야 국회의장과의 면담, 그 다음 변호사협회, 법원, 법원은 불발되었습니다만, 시행령 문제 관련한 간담회와 이런 일들을 계속 진행했고, 특히 4월 4일과 5일, 1박 2일 동안 안산에서 광화문까지 저희 가족들이 시민과 함께 도보 행진을 했다. 비도 많이 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상복 입고 영정을 앞세우고 광화문까지 도보 행진을 했다.

그런데 이런 모든 행동들보다 시민들 머리에 가장 많이 박혀있는 건 삭발하는 장면이다. 그 때 광화문 광장에서 50명 가까운 가족들이 일시에 삭발을 했는데,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계획에도 없던 행동이었다. 갑자기 하게 된 이유는 4월 1일 갑자기 아침 뉴스에 대대적으로 모든 언론사가 배·보상 문제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해수부가 발표를 한 것이다.


처음 발표할 때는 4억 2천이다, 4억 7천이다, 이야기를 하다가 2시간쯤 지나서 10시쯤 7억으로 뛴다. 좀 있으니까 8억 2천까지 올라가면서 단원고 학생 희생자들 같은 경우에 8억 2천을 받는다, 이런 게 뉴스에 보도되기 시작하는데 놀라운 속도로 퍼져서 돌리는 채널마다 모든 자막과 뉴스가 그 이야기로 도배됐다. 더 기가 막힌 건 해수부에서 배·보상(금액의) 출처가 어딘지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제대로 안 했다고 한다. 8억 2천 가운데에는 저희 아이들이 수학여행 갈 때 개인적으로 든 여행자보험 1억이 들어있었다. 그걸 거기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분명히 정부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건 청해진해운에 구상권을 행사해서 받아낼 돈이라고 처음부터 저희에게 얘기했었는데, 그런 것과 상관없이 모두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처럼. 특히 그 안에는 국민 성금이 들어가 있다. 국민 성금 포함해서 8억 2천이었다.

그래서 마치 국민 세금을 저희가 받는 것처럼 모든 보도가 그렇게 나와버렸다. 그걸 보고 저희가 아니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전혀 반영이 안 됐다. 밖에서 볼 때에는 우리가 아이들 앞세워서 상복 입고 보상금 8억 달라고 안산에서 광화문까지 오는 모습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니라고만 해서는 도저히 우리 말 안 들어주고 보도가 안 되겠다 싶어서 우리에게 시선이 모일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뭐냐, 그래서 4월 2일 광화문에서 집단으로 삭발이라도 하자, 그러면 카메라라도 와서 찍어줄 거 아니냐. 그래서 4월 1일 발표하고 그 다음날 갑자기 급히 모여서 삭발을 한 것, 그게 예기치 않은 행동에 들어갔다.


가족협의회는 처음부터 진상규명을 첫 과제로 요구했고, 처음에는 정부를 믿었지만 이것이 시행령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반영되지 않아 (시행령) 폐기 운동을 여러 다양한 방면으로 벌였는데, 거기에 대해서 정부는 오히려 일방적으로 배상 보상 이런 언론 보도를 통해서 가족들의 행동을 호도했다. 거기에 분노하고 또 언론을 바로잡아야겠다 해서 삭발을 하기로 했다. 이런 말인가.

그 때 저희 가족들이 사실 보도를 통해서 처음 알았던 건 아니고 문자를 받았다. 4월 1일 아침에. 그 문자가 해수부 배·보상 지원단에서 보낸 문자였다. 저희 가족들이 느낀 것은 '왜 이걸 지금 보내지?' 정말 가족들을 위하고 희생자를 애도하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적어도 이런 날에는 안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에 항의를 했고, 해수부 대답은 '그런 게 아니고 일상적으로 저희가 해야 할 것을 하는 것 뿐입니다'라는 답이었다. 그런 상황에 굉장히 모욕감을 느꼈고, 이제는 대놓고 정부가, 모르는 사람이 그러는 건 그러려니 하지만 대놓고 정부가 언론을 통해서 이런 식으로 모욕을 주는구나.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다.
2015년 4월 2일, 세월호 참사 피해 배보상 절차 전면 중단촉구 기자회견/ 출처: SBS 보도국 촬영 영상 아카이브
416 가족협의회는 2015년 9월경부터 동거차도 인양작업 감시단을 운영하고 있다

2015년 9월 1일부터 저희들이 동거차도에 있다. 동거차도는 세월호가 침몰한 지점부터 약 1.5km 떨어져 있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위로 올라가면 손에 잡힐듯한 거리에 인양 현장이 펼쳐져 있다. 그곳을 9월 1일부터 저희 가족들이 매주 단위로 금요일에 교대해 적으면 두 명, 많으면 서너 명의 가족들이 교대로 돌아가면서 지키면서 감시하고 있다. 많은 분들이 처음 시작할 때 그런 이야기했다. 무슨 효과 있느냐고,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멀리서 망원경으로 보는 게 무슨 효과가 있느냐. 쓸데없는 것 아니냐. 저희도 얼마나 효과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딱 하나다.

인양 시작할 때 저희들이 해수부에 요구했던 건 그 바지선에 우리들이 올라갈 수 있게 해 달라, 상시적으로 있는 게 불편하면 정기적으로라도 가서 인양 상황을 파악하고 그리고 실제로 우리 아이들을 찾기 위해 참여하는 사람들이니까 중국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고마우니 가서 저희들이 할 수 있는 게 있고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 격려할 수 있으면 하겠다. 그런데 다 거절당했다. 그 당시에는 해수부 발표만 보고 믿고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러느니 동거차도에라도 가서 망원경 하나 놓고 보면 신경 써서 일하지 않겠나, 그런 취지에서 동거차도 감시를 시작했는데 지금 이렇게까지 오래 하게 될 지는 당연히 몰랐다. 2016년 7월까지 인양 끝낸다고 했기 때문에 한 10개월, 그렇게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지키고 있다. 지금은 종종 많은 시민들이 참여해주신다.
올해 1월 1일, 동거차도에서 바라본 세월호 인양 현장/ 출처: SBS 보도국 촬영 영상 아카이브
2016년 4월 7일, 4.16가족협의회는 세월호 특별법 일부 개정안과 세월호 특조위가 요청한 특별검사 의결 요청안을 국회 조속 통과를 요청하며 삭발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저와 인양분과장을 맡고있는 동수 아빠 둘이서 삭발 단식 80시간을 예정하고 들어갔다. 내용은 당연히 특별법 개정안이었다. 특조위의 활동 기한을 두고 계속 시비가 발생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명확하게 개정을 하고 언제까지 활동 시한인 것을 못 박으라는 내용, 예산 같은 것들을 손대지 못하게 하는 내용들로 특조위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하나는 19대 국회 마지막 회기 본회의를 앞두고 있어서, 이미 특조위에서는 19대 국회에 특검을 요청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특검을 전혀 상임위에서 넘기지 않고 의결하지 않고 뭉개고만 있었다. 특검 요청을 하니까 여당에 원내대표라고 하는 분은 지금 선거 앞두고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하면 어떡하느냐면서 거부했는데, 저희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개정도 개정이지만 특별검사가 반드시 관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나갔고. 이런 주장이 언론 보도에 많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마찬가지로 언론에게 제발 우리 이야기를 보도해 달라, 다들 특조위가 잘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금방 끝날 위기에 처해있고 특검조차도 국회는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데 왜 특검을 국회에서 의결할 사항이 아닌데 이러고 있는 건지,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지 보도해 달라는 취지에서 삭발 단식을 했다.

덧붙여 이야기하면 왜 우리가 특검에 대해서 흥분을 하느냐면, 처음 특별법 만들 때 수사권 기소권 요구했는데 집어넣지 못했고, 하지만 받아들였다. 대신 특검으로 수사권 기소권을 활용하도록 하겠다는 게 여당과 야당이 같이 우리에게 약속해 준 상황이었고, 특히 그 특검이 상설특검법을 준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국회에서 특검 후보 추천위원회를 구성하고 거기서 후보를 두 명 내면 대통령이 둘 중 하나를 임명하는 방식인데, 이건 100퍼센트 대통령이 원하거나 여당이 원하는 사람으로 특검이 이뤄질 수 밖에 없는,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특별법에는 규정이 안됐지만 여당과 야당이 따로 만나서 합의문을 만들었다. 특검 후보를 정할 때 여당은 가족들이 명시적으로 반대하는 후보를 내세우지 않겠다. 그리고 그 합의문을 작성하고 사인했다. 야당과는 가족과 야당이 함께 협의해서 특검 후보를 정하겠다, 이 내용으로 합의하고 사인했다. 이 말은 '특검 요청만 들어오면 그런 과정을 거쳐서 특검을 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보는데 그런 요청을 했는데 아예 상임위에서 뭉개고 처리하지 않고 정치 공세로 폄훼하는 것을 보면서, 약속을 하고도 어기는 국회를 왜 언론은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그런 것들이 억울하고 답답해서 농성에 들어갔다.


결국 2016년 9월 30일 정부에서 세월호 특조위 강제 종료됐다. 이때 원고 및 유가족 심정이 어땠나

물론 그 전에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다. 그렇게 안 되게 하려고 농성도 하고, 많이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받아들여지면 특조위는 해산될 수 밖에 없겠구나, 충분히 예상하고 있어서 충격을 받는다든가,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이런 상황이 오자 드는 불안감은, 이게 진상 규명의 끝이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었다. 특조위는 사라진다 하더라도 진상 규명은 끝나면 안 되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진상 규명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그 때부터, 물론 지금까지도 저희는 세월호 특조위는 여전히 살아있다.

왜냐하면 세월호 특조위는 기존 특별법의 기준상 올해 2월 3일까지다. (특조위가) 살아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조건인 걸 알기 때문에. 결국 실질적인 진상 조사를 해 나가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방법이 필요하겠다. 그래서 그때부터 정한 방법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세월호 특별법을 만드는 것. 그리고 현재 안건 조정 신청되어 있는 개정안들이 풀리는 대로 다시 개정안을 통과시키도록 노력하는 것. 그리고 국민조사위원회를 통해서 국가가 하지 못한, 국가 조사 기관이 하지 않는 일을 피해자와 시민들이 나서서 해야겠다는 것. 이 세 가지를 정해 지금까지 오고 있다.


그러다 2016년 12월 3일 최순실 씨 국정 농단 사건에 따른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6차 촛불집회가 있던 날, 유가족들은 드디어 2014년 8월 22일부터 효자동 주민센터를 963일 만에,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행진할 수 있었다. 그때 상황을 간략하게 말해 달라

그 날, 저희 가족들이 사실은 청와대 앞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날 광화문에 참 많이 왔다. 그리고 가고 싶어도 정말 갈 수 없었던 그 자리에 우리 아이들과 같이 가고 싶다는 마음에 우리 아이들의 얼굴이 그려진 망토를 만들어서 몸에 두르고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갔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겨우 100미터, 이만큼 더 오려고 2년 넘도록 그렇게 모욕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고 폭력적인 진압을 당하고 캡사이신을 맞고 물대포 맞고. 겨우 100미터 더 오려고. 굉장히 서러운 기분이 들었고, 그런데 가다 보니까 가족들 주위에 수십 만의 시민들이 그 자리까지 왔다. 우리끼리만 오려고 했을 때는 올 수가 없었는데 많은 시민들이 함께 가자고 하니까,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올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 더 강하게 저희들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은 결국 국민의 힘으로 밝혀야 하는 것이다, 국민의 힘이 있지 않으면... 국민의 힘으로 반드시 밝혀낼 수 있을 것 같다, 하는 생각을 한 날이었다.
2016년 12월 3일,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행진한 시민들과 세월호 유가족. 유족들은 모두 희생자의 사진이 담긴 노란 망토를 쓰고 있다 /출처: SBS 보도국 촬영 영상 아카이브
2017년 1월 9일 세월호 발생 1,000일 되는 날 이틀 전인 1월 7일 새해 처음으로 열린 11차 촛불집회는 세월호 추모 문화제로 진행되었는데 1,000일 동안 예은이 가족 삶에는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지

저희 가족 말고도 우리 모든 가족들이 똑같은 것, 아시지 않나. 2014년 4월 16일 이전에 살았던 삶, 그때 꿈꿨던 삶으로는 앞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에. 아빠나 엄마 중 한 명은 돈 벌고 또 한 명은 막 쫓아다녀야 한다. 저 지방에서 누가 가족들과 이야기하고 싶다고 부르면, 몸이 아프건 어디 아프건 쫓아가 이야기해야 하고, 간담회 해야 하고. 광화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 저희들이 많이 가는 이유가 있다. 특히 겨울 날 추워서 나가기 힘든데, 촛불 집회 때 많이 나가는 이유가 하나 있다. 저렇게 많은 시민들이 모여서 외치는데 저 가운데 세월호가 없으면 어떡하지. 우리라도 가서 세월호를 외쳐야 하니, 사람들 많이 모이는 곳에 더 많이 간다.

그렇게 한 명은 돈 벌고 한 명은 싸우고. 그런데 그 와중에 부모들 입장에서 부모는 괜찮다. 자식을 그렇게 보내 놓고 나서 어떻게 산들 그건 다 인내할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데, 나와 있는 아이들이 문제다. 아직까지도 나와 있는 아이들은 자기 언니 오빠 동생을 잃었는데도 불구하고 엄마 아빠가 너무 힘들게 지내니까 그것을 표현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씩씩하게 보여야만 엄마 아빠가 걱정 안 한다는 생각 때문에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희는 또 한 번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비록 죽은 자식의 진실을 밝혀 줘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혼자 그렇게 방치돼서 지내도 어쩔 수 없다. 이겨내라. 예은이를 먼저 보낸 아빠 엄마와 너희들의 운명일 수밖에 없는 거 아니냐. 같이 이겨내라.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 두려운 것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그런 게 두렵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 민사소송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과 관련해서 원고 등 유가족들이 법원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 달라

첫 기일에서도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판사님들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한다. 사실 지금 다니면서 저희들이 손해배상청구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궁금해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배상 안 받았나요? 받았다고 들었는데, 이런 이야기도 하고. 저희들은 정부가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시각 그 자체를 바꿔버리고 싶다. 지금까지도 정부는 세월호 참사를 바다에서 우연히 일어난 교통사고, 그것 외에는 어느 것도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건 위자료의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일반적인 교통사고의 기준으로 위자료를 책정했다고 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누차 강조했지만 참사 직후에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장관들, 국회의원들,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세월호 참사는 한국 전쟁 이래 도저히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정말 끔찍한 아픈 일이라고, 그래서 이걸 극복해야 한다고, 그래서 4월 16일 이전과 이후는 달라지게 만들겠다고. 우리가 그런 이야기 해달라고 한 게 아니라 먼저 와서 그랬다. 대통령이 만나자고 제안해서 만났고, 그런 이야기 들었다. 국가 개조를 이야기했고. 그런데 정작 진상규명에 들어가니까 모든 입장이 한 순간에 바뀐다. 교통사고인데 뭘 조사합니까. 아니 해경이 구하지 않은 것 국민이 생중계로 다 봐서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데, 그 이상 밝힐 게 뭐가 있습니까.

저는 정부가, 그리고 정치인들이 이런 시각을 갖고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앞으로도 이런 사고가 또 일어날 텐데. 세월호 참사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고 진상 규명을 못하게 하는 사람들, 정치인들 ,대통령. 10년 뒤에 일어날 사고를 지금부터 보위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재판을 통해 저희들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민국이, 청해진해운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책임이 있는 지를 명확하게 지적하고 그 책임에 걸맞는 배상을 비롯한 책임지는 행위들을 반드시 할 수 있길 바라고, 그것이 명명백백 판결문에 적시가 되어서 공무원이 됐든, 사기업이 됐든. 책임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해야 할 마땅한 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일어날 모든 피해에 민사적으로도 형사적으로도 피해갈 수 없게끔 분명하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이 재판을 통해 저희들이 바라는 것이다.
광화문광장에 놓인 304개의 구명조끼. 세월호 희생자를 상징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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