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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1월에 본 전시 : 글자가 나를 때렸다……

장영혜중공업 <세 개의 쉬운 비디오 자습서로 보는 삶> 전시평

[취재파일] 1월에 본 전시 : 글자가 나를 때렸다……
최근 삼청동 거리를 걸어본 적 있는가. 아마도 촛불 집회 참석자들은 이 길을 한 번 씩은 걸어보지 않았을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지나 서울시립정독도서관으로 가는 길, 한 건물 밖에 내걸린 강렬한 색감의 배너가 눈에 확 들어온다.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투쟁적인 문구이다. 도대체 어떤 사연인가. 가끔 아파트 벽에서 만나는 “서울시장은 00를 개선하라”, “조망권을 해치는 00기업 반성하라” 이런 류의 문구인가. 혹시 이 건물이 ‘불합리’한 조건으로 삼성에 넘어가게 된 것인가. 최근 시끄러운 기업 중 하나인 ‘삼성’, 이름만 봐도 ‘의심’이 든다.

무슨 일일까, 궁금증을 잔뜩 안고 계속 걷다 보니, 이 건물 앞에서도 또 다른 선동적인 문구를 만나게 된다.

“머리를 검게 물들이는 정치인들--무엇을 감추나”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난 게 분명하다. 정치권과 삼성에 상당히 ‘뿔이 난’ 시민단체 행동인가. 그런데 사실 이 건물은 아트선재센터, 미술관이다. 이 배너도 미술 작품, 전시의 일환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그 이름에서 ‘무게감’이 느껴지는 ‘장영혜중공업’이다. 장영혜라는 한국 작가와 마크 보주라는 중국계 미국인(사실 이들은 부부) 작가의 연합(?)이다. 1999년 결성하여 ‘삼성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지금까지 자본주의 사회와 부패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작업을 하고 있다.

인터넷이 보급되어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했던 시기, 인터넷을 기반으로 미디어 작업을 시작해 ‘1세대 웹아트(Web Art)' 작가로 일컬어진다. ’장영혜중공업‘이라는 이름은 장 작가의 이름에, 마크의 이름을 ’중공업(Heavy Industries)'으로 바뀌어 붙였다. 기계, 선박의 대규모 산업을 대표하는 ‘중공업’처럼, 인터넷, 미디어를 매개로 대규모 산업을 부흥시키고 싶어서였을까.

이번 전시는 아트선재센터의 새해 첫 전시이다. 거창하고 무시무시한 제목과는 달리, 작품이라고는 1층부터 3층까지 대형 스크린 2개씩 설치된 게 전부이다. 볼 게 없는 것 아닌가 라는 걱정도 들지만,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강렬하게 내뿜는 영상과 둥둥 울리는 음악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만다.

스크린에서 나오는 작품은 그저 글자 뿐이다. 글자만 6~8분 정도 끊임없이 나온다. 똑같은 글자가 아니라, 문장이고, 그게 또 스토리가 된다. 하얀 바탕에 검정 글씨, 검정 바탕에 하얀 글씨, 색깔도 없다. 글자 모양도 변하지 않는다. 다만 흘러가는 글자들은 음악에 맞춰 크기가 변하고, 속도가 변한다. 이게 바로 장영혜중공업의 작품 전부이다.

1층, 2층, 3층 작품은 서로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하는데, 그에 맞춘 구성 같기도 하다. 1층은 가정, 2층은 경제(삼성으로 대표되는), 3층은 정치권에 관한 내용이다.
불행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다
1층은 평범한 가족의 흔한 식사 시간 모습을 담고 있다. 가족끼리 모여 식사와 반주를 하고 있고, 대화를 나누는데....... 여느 ‘막장’ 가족, 아니 보통 가족의 식사 시간을 연상케 하는 텍스트가 드럼 비트와 함께 흘러나온다. 분명 본 건 글자 밖에 없는데, 글자를 따라가다 보면, 한 편의 단편 영화를 본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2층에서는 자본주의 사회를 대표하는 ‘삼성’에 관한 이야기가, 3층에서는 정치권의 ‘행태’에 대한 ‘소회(?)’와 ‘비판’을 담은 메시지가 흐르고 있다. 마치 연극에서 배우가 독백을 하는 것처럼.......

이번 전시의 키워드는 3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겠다.

1. “예술은 현실을 반영한다”

사실 장영혜중공업의 작업은 우리나라를 혼란으로 밀어넣은 ‘최순실 국정농단사태’ 훨씬 이전부터 진행되었다. 삼성에 관한 작업은 작가들이 처음 데뷔했던 1999년부터 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 작품의 메시지는 바로 관객이 하고픈 말, 그 자체이다.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역시 예술은 현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2. 웹아트(Web Art)

장영혜중공업은 인터넷에 기반을 둔 작품을 하는 ‘웹 아티스트’이다. 이들의 작품은 전시장에서뿐 아니라, 이들의 홈페이지(www.yhchang.com)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인터넷 1세대로서, 인터넷 세대를 위한 작업을 하고 전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변화에 따라 미술의 지평도 사이버 세계로까지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영상으로, 인터넷에서 구현되는 작품인데, 이런 작품도 회화나 조각처럼 ‘구매’가 가능하냐는 의문도 드는데... 답은 ‘그렇다’이다. 실제로 한 컬렉터는 자신의 집의 모니터에 구매한 영상 작품을 띄워두고 있다고도 한다.

3. 글자의 힘

한글의 위대함,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다. 글자는 그 자체로도 시각적 아름다움, 사회적 메시지를 다 담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 하상욱 시인의 작품 같은 SNS시가 유행이다. 요즘만이 아니라 과거 일본에서는 10여 개 단어로 지은 하이쿠라는 짧은 시도 있었다.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글자의 힘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 내용상 욕도 많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굳이 소리를 듣지 않고 글자만 봤는데도 ‘욕이 참 찰지다’고 느껴진다.

"글자가 나를 때렸다."

랩(rap)이 신랄한 가사와 리듬으로 귀를 때린다면, 이번 작품은 글자와 그 안에 있는 메시지가 나의 눈을, 의식을 때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작품을 보는 내내 ‘시각적인 랩(rap)'을 듣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 수 있는 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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