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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촛불집회'와 '학도호국단의 역설'

[취재파일] '촛불집회'와 '학도호국단의 역설'
1천만 명을 넘어선 촛불 집회가 새해에도 뜨겁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촛불을 통해 ‘어둠’을 이기고, ‘변화’를 직접 이끌어냈습니다. 우리 힘으로 ‘망가진 민주주의’를 바로잡고 있다는 자부심도 생겼습니다. 덕분에 새해에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됐습니다.

촛불 집회는 ‘광장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줬습니다. 그것도 아주 성숙하면서도 강력한 모습으로요. 안이한 정권과 정치권을 향해 국민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단호하게 메시지를 전했고, 이를 쟁취했습니다. 다수의 외신들도 이 점에 주목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사를 보면 촛불 집회 같이 ‘시민의 힘’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로잡은 굵직한 민주화 운동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을 들 수 있습니다. 후대에 촛불 집회 역시 이 ‘민주화 전통’의 맥을 잇는 운동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민주화 전통’을 갖게 되었을까요? 모든 전통이 그렇듯이 하루아침에 형성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민주화 운동은 상당한 참여와 헌신, 더 나아가 희생을 요구합니다. 단단한 결속력과 서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에, 쉽게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죠.

저는 궁금했습니다. 특히 저의 일본 특파원 경험이 더 호기심을 자극했던 것 같습니다. 일본에는 우리와 같은 ‘민주화 운동 전통’이 없습니다.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제일 부러워하는 면입니다. 그들은 “일본인은 좀체 광장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집회를 해봤자 뭐하나”라며, ‘참여의 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죠. 촛불집회처럼 수백 만이 하나가 되는 그런 거대한 운동은 상상도 못한다고 말합니다. 

제가 갖고 있던 의문에 대해 꽤 설득력 있는 해석을 제시한 책을 만났습니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역사를 생활사의 관점에서 조망한 <한국현대 생활문화사>(창비)라는 책인데, 이 가운데 오제연 성균관대 교수와 허은 고려대 교수의 분석이 흥미롭습니다. 두 교수는 한국의 ‘조직적이고 강력한’ 민주화 운동 형성의 계기를 다름 아닌 학도 호국단과 교련 훈련에서 찾습니다. 어? 이상하죠? 권위주의와 군사문화의 상징인 학도 호국단과 교련 훈련이 민주화 운동과 연관이 된다니요? 저도 처음에는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다 읽고서는 ‘유레카!’를 외쳤습니다.

오제연 교수의 분석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학도호국단은 이승만 정권 때 군대식 집단 훈련과 반공 교육으로 국가가 학생들을 직접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1949년 창설됐습니다. 모든 학생과 교직원은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총재, 문교부 장차관이 단장과 부단장을 맡고, 말단 교장까지 이어지는 수직적인 준(準)군사조직이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정부의 하부 조직이었기 때문에, 정부 요구에 따라 학생들이 정치적으로 동원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대표적으로 1953년 휴전회담 반대 궐기대회에 연인원 8백만 명, 1955년 중립국 감시위원단 축출 궐기대회에 연인원 2백만 명, 그리고 1959년 재일 한국인 북송 반대 궐기대회에 연인원 1700만 명이 동원됐습니다. 학생들은 궐기대회의 머릿수를 채워줬을 뿐만 아니라, 북진통일과 반공반일의 구호를 외치며 자연스레 반공 반일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았습니다. 정권의 뜻대로 이승만 대통령은 통일과 반일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오 교수는 그러나 학생 통제와 동원은 이승만 정권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영향을 줬다고 지적합니다. 먼저 학생들에게 ‘통일’과 ‘반일’이라는 저항 논리의 기반을 마련해줬다는 것이죠. 학생들은 동원된 관제데모에서 끊임없이 통일을 언급하면서 비록 ‘북진’이기는 하지만 통일에 대한 열망을 고조시켜 1960년대 이후 통일운동으로 분출했고, ‘반일’ 강조 역시 일본에 대한 우려와 불신을 증폭시켜 이후 ‘한일협정 반대운동’으로 폭발했다는 것입니다.

오 교수는 학도호국단 자체의 학생동원 능력과 조직력에도 주목합니다. 준 군사 조직이다 보니 관제데모 등에 동원될 때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는데, 이렇게 일상적으로 익힌 집단성과 규율성이 나중에 419혁명 같은 저항과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는 것이죠.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 그랬겠구나, 맞다’라며 무릎을 쳤습니다.   

예를 들어 관제 데모에 불참할 경우 결석으로 처리됐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예외 없는’ 집단적 시위 참여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데, 반대로 민주화 시위 때도 이런 익숙함이 조직적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몸에 밴 ‘전교생이 한꺼번에’라는 행동 규칙이 똑같이 작동한 셈이죠. 또 관제데모를 통해 시위 방법도 익혔습니다. 즉 학교에서 대열을 지어 나가서 동일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그러고는 다시 열을 지어 각기 학교로 돌아가서 그대로 해산하는 방식을 학생들이 나중 419시위 때도 그대로 살렸다고 합니다. 학교는 전혀 의도치 않았지만, 학생들에게 조직적인 저항 방법도 학습시켜준 셈이죠.

더욱이 학도호국단은 운동의 필수 조건인 강력한 조직력도 키워줬습니다. 각 학교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관제 데모의 실무를 상의하기 위해 자주 만났는데, 이 때 친분을 쌓고 자연스레 네트워크가 형성됐습니다. 그리고 이 네트워크가 나중에 지속적인 저항을 할 수 있는 탄탄한 조직이 됐다는 설명입니다. 오교수는 “관제 데모 등을 통해 익힌 집단적인 힘의 결집과 분출이 당시 학생들에게 익숙한 ‘경험’이었고, 4.19혁명의 동력이 됐다”고 단언합니다.

학원 통제와 동원의 역설은 이후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도 나타났다고 허은 교수는 분석합니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은 학생을 군사동원과 선전의 대상으로 삼아 교련 훈련을 강화하고 학도호국단도 부활시켰는데, 결정적 시기가 되자 이 역시 정권의 의도와는 달리 ‘저항 조직’으로 바뀌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우리 ‘민주화 운동’의 전통을 다 설명해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어떻게 강한 연대를 구축하고 힘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일본도 1960년대 학생운동이 활발했지만, 조직력이라는 집단적 힘의 결집에서 한계를 보이면서 극소수 ‘그들만의 과격한 운동’으로 전락해, 결국 사회변혁에는 이르지 못하고 소멸해 버렸습니다.

특히 저는 무엇보다 한국과 일본의 ‘민주화 운동’의 성패를 가른 건 ‘승리 경험’의 유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미완에 그쳤다고 하지만 우리는 419혁명과 6월 항쟁 등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성공한 경험이 있습니다. 반면 일본은 현대사, 아니 근대사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이런 ‘민주화 운동 성공 기억’이 없습니다. 모두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고 없음은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성공의 가슴 뿌듯한 기억은 민주화 과정의 혹독한 시련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지만, 반면 그런 경험이 없으면 자꾸 회의와 냉소 같은 패배주의로 흐르기 쉽습니다. 적어도 민주화 운동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은 선순환에 들었고, 일본은 악순환에 빠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촛불 집회에서 우리가 성숙한 시위문화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도, 과거 민주화 운동의 성공 경험을 통해 학습한 자신감과 여유가 든든한 바탕이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시국이 어떻게 흐를지 여전히 안개 속입니다. 하지만 촛불 집회를 통해 많은 분들이 ‘국민주권’과 ‘연대의 힘’을 자각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다음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촛불의 힘’을 경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열매를 맺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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