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페리의 연습실과 기자간담회 현장을 취재한 뒤 드디어 이번 주 무대에 선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의 기량이 여전한지 확인하고픈 마음에 공연장을 찾았지만, 토슈즈를 신고 무대에 등장하는 그녀를 본 순간부터 저는 그녀가 누구인지 또 몇 살인지 잊고 말았습니다. 무대엔 53살의 세계적인 무용수 알레산드라 페리가 아닌, 불 같은 사랑에 눈이 먼 10대 소녀 줄리엣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수석무용수 에르만 코르네호(Herman Cornejo)와 함께 사랑에 빠진 10대를 연기하는 그녀를 보며, 저는 내내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연인이 제발 행복해지기를…’, 비극적 결말을 빤히 알면서도 마음 속으로 부질없이 응원했습니다. 근력이나 탄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대단한 감동을 이끌어내는, 격이 다른 무용수였습니다. 그녀가 긴 공백을 깨고 돌아와 제가 그 무대를 볼 수 있다는 게 새삼 얼마나 다행스럽던지요.
“제가 은퇴하기로 마음먹은 건 44살 때였어요. 당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나 자신과 경쟁한다는 두려움이었는데, 과거에 느꼈던 방식대로 제가 더는 느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자신감이 사라졌고, 그만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죠.”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정상의 자리에서 은퇴를 하고 싶어 하니까요. 금전적인 문제만 없다면 자신의 재능이 사그라지는 걸 목격 당하지 않은 채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기억될 방법으로 많은 이들이 이런 은퇴를 선택할 겁니다. 더군다나 당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예술가라면 더욱 그럴 겁니다.
은퇴 선언 이후 실제로 페리는 긴 시간 무대를 떠나 있었습니다. 두 딸의 엄마로서 처음 한 두 해쯤은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고 엄마라는 역할도 충분히 즐겼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행복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50세가 되던 해 페리는 이탈리아 스플레토 페스티벌에서 자신이 직접 안무한 ‘윗층의 피아노(The Piano Upstairs)’란 작품을 통해 현역 무용수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꾸준한 활동을 이어오며 올 초 올리비에상까지 수상하더니, 지난 여름엔 아메리칸발레시어터 예술감독 케빈 맥켄지(Kevin McKenzie)의 제안을 받아들여 자신의 대표작 ‘로미오와 줄리엣’ 무대에까지 복귀한 겁니다. 3시간 가까운 전막 발레의 여주인공으로 복귀한 그녀에게 찬사가 쏟아졌고, 마침내 한국 무대로까지 이어지게 됐습니다.
지난해 화제가 됐던, 그녀가 출연하는 광고가 하나 있습니다. 광고는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오래 전 동영상 속 19살의 그녀와 현실 속 52살의 그녀가 함께 무대에서 춤을 추는 장면을 연출하는데, 호기심에 가득 차 보이는 10대의 그녀만큼 여유로워 보이는 50대의 그녀도 매력적입니다. 아니 더 매력적입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사랑하는 무대로 돌아온 예술가가 보여줄 수 있는 자유와 행복, 자신감이란 이런 게 아닐까요?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발레리나’라는 수식어에 ‘최고령 프리마 발레리나’라는 별명까지 더하게 된 알레산드라 페리, 그녀는 자신을 ‘춤을 춰야만 하는 사람, 춤추는 걸 사랑하고 춤출 때 비로소 자신다워지고 완벽해지는 걸 느끼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 그것은 외부의 평가와 편견의 산물이 아니라는 걸 페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의 도전을 응원합니다!
(사진 제공=유니버설발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