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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원조 걸그룹은 SES·핑클? 바로 '저고리씨스터'

[취재파일] 원조 걸그룹은 SES·핑클? 바로 '저고리씨스터'
한류바람이 거센 요즘이다. K-POP의 인기도 드높다. 그 중심에 걸그룹이 있다. 뛰어난 춤과 노래 솜씨, 빼어난 외모. 걸그룹의 원조는 누굴까. SES? 핑클? 천만에. 우리나라 걸그룹의 원조는 그 이름도 정겨운 '저고리씨스터'.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1939년, 그러니까 일제 강점기에 등장한 그룹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들이 떼로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은 대중들에게 큰 관심이자 화제꺼리였나 보다.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각종자료를 종합해보면 멤버도 딱히 정해진 게 아니라 5~9명 정도로 들고났고, 활동시기도 꽤 오랜 기간, 지금말로하면 기수 내림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트로트, 신민요, 만요, 재즈 등 일본과 서양의 유행가들을 우리 것으로 만들기 시작한 대중가요 초창기의 모습이다. 저고리씨스터는 태평레코드와 함께 당시 대중음악계를 좌지우지하던 오케레코드에서 철저히 기획한 걸그룹이었다. 음반회사가 유명가수를 전속하던 시절이니 지금의 연예기획사들이 소녀시대, 브아걸, AOA 같은 걸그룹을 기획하는 것이 비단 새로운 일이 아니다.

한국 최초의 걸그룹, 걸그룹의 전설 저고리씨스터의 중심인물은 이난영이다. 요즘으로 치면 팀의 리더인 셈이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1935년)이라는 노래로 당대 최고의 히트를 쳤다. 이애리수의 '황성옛터'(1928년), 고복수의 '타향'(타향살이, 1934년),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1937년)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백성의 애환을 함께 한 국민가요로 기록된다.

올해는 이난영이 태어난 지 100년 되는 해다(생일 6월 6일). 서울에선 최근 시스터즈의 계보를 잇는 미미시스터즈와 바버레츠가 기획한 헌정공연이 열렸고, 고향이자 노래의 배경인 목포에선 특집 난영 가요제, 토크 콘서트, 자료 전시회, 시민 토론회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졌다. 재평가 작업도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이난영을 단순히 구성지고 애수 띤 목소리의 트로트 가수로만 알았다면 그건 몰이해다. 이난영은 가수를 넘어 연출가로 제작자로, 나아가 글로벌 마인드를 가진 한류공연 기획자였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대구에서 부산으로 가는 피난기차 안에서 이난영은 '김시스터즈'라는 아이돌 걸그룹을 기획한다.

김시스터즈는 이난영의 딸 숙자 애자, 조카 민자로 구성된 한국 최초의 아이돌 걸그룹이다. 이들의 주요무대는 미군부대였다. 양주로 출연료를 대신하던 시절이었다. GI쇼 한 번에 위스키는 네 케이스, 맥주는 열두 케이스를 받았다고 한다. 이걸 집에 두면 자전거를 끌고 온 어떤 아저씨가 쌀과 교환해갔다.

이난영 100년 기념사업을 위해 잠시 한국을 찾은 김시스터즈의 리더 김숙자 씨는 기자와 만나 이렇게 회고했다. 제보를 받았는지 가끔 미군 헌병(MP)이 집으로 들이닥치곤 했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이난영)는 양주를 감춰둔 방문 바로 앞에서 우리 7남매를 잠들도록 했다. 그러면 미군 헌병이 문을 열다가도 아이들을 보고 그냥 돌아갔다.

1959년, 한류가 꿈틀거리는 순간이 다가왔다. 김시스터즈의 미국진출이었다. 이때 나이가 열아홉, 열여덟, 열일곱. 김시스터즈는 아시아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아이돌 걸그룹이자 원조 한류로 기록됐다.

김숙자 씨는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톰 볼이라는 미국 연예 에이전트가 도쿄에서 대상을 물색하다가 우리 얘기를 들었나 봐요. 원래 4주 계약으로 라스베이거스에서 쇼를 하는 조건이었어요. 반응이 좋으면 4주 더 연장한다는 옵션이 있었지만."

그런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인기를 누리던 CBS-TV 프로그램 에드 설리번 쇼는 이들을 22회나 출연시켰다. 라스베이거스의 스타더스트 호텔은 당시에도 지금의 신용카드처럼 생긴 플라스틱 룸 키를 사용했는데, 한쪽 면에 김시스터즈의 사진을 새겨 넣을 정도였다. 김시스터즈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은 건 그로부터 11년 뒤인 1970년 서울시민회관에서 가졌던 귀국공연이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어머니 이난영은 무섭도록 연습을 시켰다. 미국에는 실력파 가수들이 너무 많으니 노래만으론 성공할 수 없다. 악기를 함께 다뤄야한다. 그래서 멤버 누구나 10개 정도의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게 됐다. 김숙자 씨는 피아노, 트럼펫, 트럼본, 테너섹소폰, 기타, 만돌린, 벤조, 클라리넷 등 13가지 악기를 다룬다고 했다.

또 하나의 지시사항은 '노 데이트'. 남자친구를 사귀면 연습을 게을리 하게 되고 팀워크는 흔들린다. 4년 동안 절대 남자를 사귀지 마라. 사실 김숙자 씨에게는 벤이라는 미국 남성이 끊임없는 구애를 해왔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노 데이트' 약속을 깰 수 없었다. 그 사람에게 사정 얘기를 했고, 그는 2년을 기다렸다. 마침내 1962년 12월 이난영이 8개월 일정으로 미국에 왔을 때 식사를 함께 해도 된다는 허락을 얻었고, 함께 식사를 한 뒤 클럽에서 트위스트를 신나게 췄던 기억이 있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했다.

인기, 돈, 명예를 얻었지만 그리움은 더해갔다. 서울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면 눈물부터 쏟아져 말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국제전화 요금이 엄청나게 비싸던 시절이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에이전트가 왜 비싼 국제전화를 걸어놓고 말을 하지 않고 울기만 하냐며 놀렸다고 한다.

동생 애자 씨는 김치를 못 먹어 황달까지 생겼다고 한다. 의학적 인과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숙자 씨는 그렇게 말했다. 지금과 달라서 당시만 해도 주위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웠거니와 김치를 구하기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별을 따는 일만큼이나 어려웠다.  하루는 서울 어머니가 총각김치를 담가 보냈다고 연락해왔다.

시카고에서 공연할 땐데 공항에 물건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한걸음에 달려 나갔는데, 글쎄 이게 웬일인가. 포장이 잘못돼 김치 국물이 흘러나왔고, 고약한 냄새에 식품이 상한 줄 안 공항직원이 폐기처분해버린 게 아닌가. "아. 이 양반아. 그건 썩을수록(삭을수록) 맛있는 거야." 소리를 치며 항의했지만 엎질러진 김치였다. 포장기술이 형편없던 시절이라 어머니 이난영이 깡통을 구해 김치를 차곡차곡 넣은 뒤 국물이 새나올까 용접까지 했건만 불상사가 생기고만 것이다.      

김치는 가버렸지만 이렇게 세상에 나오게 된 노래가 바로 '김치 깍두기'. '머나먼 미국 땅에 십년 넘어 살면서 고국생각 그리워. 아침 저녁 식사 때면 런치에다 비후스텍 맛좋다고 자랑 쳐도 우리나라 배추김치 깍두기만 못하더라~'. 김치 사연을 전해들은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이 작곡한 노래다. 지금 가사내용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오지만, 그땐 얼마나 절박했을까. 이봉룡은 목포의 눈물과 함께 지금도 호남지역에서 애창되는 '목포는 항구다'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난영은 1965년 마흔아홉 짧은 삶을 뒤로한 채 세상을 떴다. 항간엔 알콜중독이다, 약물중독이다 말이 많지만 확인된 건 심장마비라는 사실이다. '오빠는 풍각쟁이', '선창', '다방의 푸른 꿈' 등 당대의 명곡을 작곡한 남편 김해송은 앞서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던 중 총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숙자 씨는 1969년 이탈리아계 미국인과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지금도 라스베이거스에서 살고 있다. 이젠 아이들도 결혼해 어느새 손주를 둔 일흔일곱의 할머니가 됐다.

뿌리 없는 나무가 있다던가. 한류도 그렇다. SM이, YG가, JYP가, SES가, 핑클이, 소녀시대가 어디 한순간에 튀어나왔겠는가. 지금의 한류가 있기 전 그 어디에선가 아무도 몰라주던 코리아를 알렸던 선배들의 역사가 있었음을.  

▶ [SBS 뉴스토리] 원조 한류 걸그룹 '저고리씨스터'…숨겨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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