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반복되는 '바바리 맨의 추억'

[취재파일] 반복되는 '바바리 맨의 추억'
‘바바리 맨’이 뭔지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생이었던 10살 때였습니다. 친구가 자기 누나 (이하 A양)의 ‘바바리 맨 퇴치기(記)’를 들려주면서였죠.

친구 누나 A 양이 다니던 한 여자중학교 앞에 몇 년째 ‘바바리 맨’이 나타나곤 했는데 어느 날 귀가하던 A 양 앞에도 ‘바바리 맨’이 나타났답니다. 담력이 남달랐던 A양은 몹쓸 짓을 하는 ‘바바리 맨’에게 당황하지 않고 경멸의 ‘썩소’를 날렸다는, 그래서 그 이후 ‘바바리 맨’은 마음의 상처를 입어 그 여중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는 얘기였습니다.  

여중 근처에 몇 년 동안 ‘바바리 맨’이 잡히지도 않고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이 ‘바바리 맨’ 퇴치가 공권력이 아닌 대담한 여중생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 모두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 그 얘기를 듣던 저는 한참을 낄낄거렸습니다.

엉거주춤하니 서서 코트를 펼쳤으나 ‘썩소’를 날리는 여중생을 마주하고는 동공 지진을 일으켰을 ‘바바리 맨’의 우스꽝스러운 몰골이 상상됐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바리 맨’을 마주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남성이고 불쑥 나타나는 성도착증 환자가 주는 공포를 이해하기 어려웠기에 이후에도 ‘바바리 맨’과 관련된 이야기나 뉴스를 들으면 친구의 얘기가 생각나 킥킥대곤 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불감증에서 시작됩니다. 세월이 지나 기자가 되고, 첫 기사 아이템을 찾아 헤매던 와중에도 ‘병원 근처에 간호사들을 노린 바바리 맨이 수개월째 나타난다더라’는 얘기를 접했을 때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어릴 적 친구가 해줬던 ‘재밌었던’ 이야기도 생각났고 말이죠.

바바리 맨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오전 내내 일원동 일대를 탐문하고 다녔지만 나오는 이야기가 없어 ‘별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아이템이나 찾아볼까’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좀 더 끈질기게 탐문해보라는 선배의 이야기가 없었다면 매일 불안한 마음으로 육교를 건넌다는 병원 간호사들을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공쳤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터덜터덜 돌아가려다 마지막으로 물어나 보자고 말을 건넨 여성은 자신이 육교 건너에서 야간 근무조로 일하는 간호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간호사들이 교대하는 시간이나 출퇴근을 하는 시간에 육교에서 수개월째 괴한이 나타나 노출 행각을 벌이고, 여성들을 뒤에서 끌어안고 가슴을 만지는 등 성추행까지 벌인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병원에서는 간호사들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공지를 여러 차례 돌리고, 사설 경비업체 직원을 간호사들의  출퇴근길에 동행시키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 교대시간이라 병원에 가는 간호사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고, 모두들 ‘밤이나 새벽시간대 육교 위에 출몰하는 성도착증 환자 때문에 병원 간호사들이 불안해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병원의 입장도 비슷했습니다. 병원 관계자는 관계기관을 자극할까 싶어 인터뷰가 방송되는 것은 만류했지만 몇 개월째 범죄가 반복해서 발생함에도 방범용 CCTV가 설치되지 않고, 검거도 이뤄지지 않아 병원 자체 보안 인력을 투입해야하는 고충을 토로했습니다.

출퇴근길에 성추행을 당한 간호사들은 정신적 충격에 대한 치료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기자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별 일 아니겠거니’ 생각했던 스스로의 안일함이 부끄러웠던 순간이었습니다.  
왜 아직까지 범인 신상이 특정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한 경찰관은 ‘나름대로 순찰도 돌고 했지만 치안수요에 비해 경찰력이 부족하다’고 토로했습니다. 맞는 말일수도 있습니다. 보도가 나간 뒤 치안 공백을 질타하는 여론의 반응이 야속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겪는 고충에 민감하게 반응해야하는 것은 경찰에게 주어진 직업적 소명입니다. 수개월간 10건 이상의 성범죄가 발생하는 우범지대에 방범용 CCTV 설치 예산 몇백만 원을 확보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는지, 다른 치안 수요 때문에 경찰력이 부족했다면 지역의 자율방범대와 협력해서라도 간호사들의 출퇴근 시간대에 육교를 순찰하는 일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는지 다시 한번 되돌아 볼 일입니다.

▶ 출퇴근길에 '와락' 성추행…간호사만 노렸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