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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대통령의 서명운동

[취재파일] 대통령의 서명운동
▲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경기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 판교역 광장에서 '민생구하기 입법촉구 천만서명운동본부'가 추진하는 경제활성화법 처리를 촉구하는 서명을 하고 있다.

# 1999년, 20세기 마지막 광복절 때다.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과 리영희 한양대 교수, 허웅 한글학회 이사장 등 학계에서 존경받는 원로 11명이 모여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지지하는 서명운동을 제안했다. 해방 뒤 정부가 못 한 친일 청산작업을 민간에서 해내자는 거였다. 반향이 컸다. 두 달 반 만에 전국 교수 1만 명이 서명했고 각계로 확산됐다.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지지하고 식민통치에 협력한 한국인 목록을 정리·분류한 총 3권 3천여 쪽 분량의 사전이 2009년 11월 출간됐다.

# 10년 뒤 2009년엔 서울시민 10만여 명의 서명운동이 있었다.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은 서울광장 사용을 사전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자는 시민단체의 조례 개정 청원을 거부했다. 그러자 시민들이 직접 움직였다. 지방자치법 15조에 따라 서울 인구의 1%인 8만 1천 명 이상의 서명을 통해 직접 조례 개정 청구를 해낸 거다. 반년 만에 10만 2천741명이 서명해 자동 상정된 조례개정안을 당시 시의회는 부결시켰지만, 2010년 지방선거 이후 바뀐 시의회가 결국 서울광장 사용을 신고제로 바꿨다.

서명운동의 핵심은 이름을 거는 데 있다. 이름은 나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 기호인 동시에 ‘나 자체’다. 이어령은 “생명의 탄생과 활동은 하나의 이름 속에서 시작”하며 “성명이 호적부에 오르고부터 인간은 사회의 일원으로 공인 받는다”고 썼다. 그래서 서명운동은 한 인간이 목표를 앞에 두고 숨거나 돌아가지 않고, '이름을 걸고 싸우겠다'는 의지의 행동이다. 때로 별다른 수단이 없는 약자들의 서명운동에 이름 석 자 보태는 일이 '당신과 함께 하겠다'는 강력한 연대의 상징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당연히 자발적일 때 아름답다. 위의 두 서명운동은 정부와 지자체가 하지 않은 일을 시민들이 나서 직접 해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서명운동이 꼭 약자들의 것이거나 자발적인 경우만 있는 건 아니다. 1956년 8월 자유당 정권은 남한의 UN 단독 가입을 추진하며 “효과적인 운동을 전개하고자” 대대적인 관제 서명운동을 벌였다. 정권의 2인자 이기붕을 위원장으로 한 ‘유엔가입전국추위’는 전국 각 지역 동장과 이장, 통반장을 동원했다. 학교는 물론 종교시설에서까지 “1천만 명 넘는 서명을 목표로” 닥치는 대로 서명을 받았다. 지난해엔 강남구청이 한전 사옥을 산 현대자동차가 낼 수조 원대 공공기여금을 "강남구가 우선 사용해야 한다"며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을 ‘동원’해 서명운동을 벌였다가 빈축을 샀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단체와 기업인들이 주도하는 서명운동에 참여해 논란이다. 박 대통령 말 대로 “오죽하면” 그리 했을까 싶으면서도 씁쓸한 기분은 지울 수 없다. 이해당사자가 분명한 서명운동을 대통령이 나서 ‘국민 일반의 운동’으로 왜곡한 것도 문제지만, 국무총리가 ‘인증샷’을 올리며 가세하고 장관들에 이어 기업들까지 참여 독려 공문을 돌려가며 일제히 서명하는 풍경은 지나간 시절의 관제 서명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관가에선 대통령도 한 서명을 따라하지 않았다간 찍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들을 주고받는다고 하니 코미디가 따로 없다. 세금을 들여 공무원을 교육하고 신분을 보장하는 건 이들이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라는 의미에서지 거리로 나가라는 뜻이 아니다.

대통령은 사회의 다른 여러 주체들 보다 여론에 미치는 영향력이 압도적으로 강하고 비대칭적이다. 이런 대통령이 다른 수단이 없었을까. 필요한 법 통과를 위해 입법부를 상대로 설득과 타협을 하기보다 거리로 나가 퍼포먼스를 한 대통령의 행동은 그 자체로 부적절했다. 국회의 입법권을 대통령이 앞장서 부정한 격으로, 대의민주주의 원칙을 흔드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이 원칙이 사라질 때 남는 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즉 혼돈뿐이다. 지금 우린 대통령이 ‘이름을 걸고’ 민주주의를 흔드는 시절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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