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칼럼]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습니다"…어느 노정객의 고백

[칼럼]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습니다"…어느 노정객의 고백
글이 사람을 속이지 못한다고 믿었다. 글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주 좋은 이의 손끝에서 나오는 글에 몇 번 속고난 뒤부터는 글을 쉽게 믿지 않는다. 글에 값할 만한 행동이 없으면, 글을 속이고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요즘 더불어민주당을 떠나는 의원들의 고별사를 유심히 읽고 있다. 정치인에게 당을 떠난다는 것은 정치 생명을 건 결단이다. 그런 결단의 이유와 소회가 고별사에 담겨있다.

정치 생명을 건 결단을 내리면서 쓴 글인 만큼 명문이다. 몇 사람의 글을 일부 인용한다.

안에서 싸우다 기운을 다 소진해버리는 그런 정치 말고, 오만과 독선과 증오와 기교로 버티는 그런 정치 말고, 아무리 못해도 제1야당이라며 기득권에 안주하는 그런 정치 말고, 패권에 굴복하지 않으면 척결 대상으로 찍히는 그런 정치 말고, 비리와 갑질과 막말로 얼룩진 그런 정치 말고, 그래서 국민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그런 정치 말고, 이제는 국민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정치로 변해야 합니다…저는 이제 밀알이 되고 불씨가 되고 밑거름이 되겠습니다.

문장의 리듬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이 고별사는 소설가이기도 한 김한길 전 대표의 글이다.

<협궤 열차가 달려갈 철길에 작은 침목이 되겠습니다>라는 제목의 이 글은 또 어떤가?

"숨 막히는 정치의 어둠을 뚫고 달릴 새정치의 새벽 저는 협궤 열차를 기다립니다. 그 기적 소리를 위해 저는 철길의 작은 침목이 되겠습니다. 협궤 열차를 타고 젊은이들이 통일과 번영의 깃발을 흔들며 달려올 것을 기대합니다. 기차는 정권 교체의 간이역을 거쳐 조국통일의 종착역에 다다를 것입니다"

이 기자회견문은 치과의사이자 시인이기도 한 김영환 의원의 작품이다. 이 재주 많은 시인에게만 가면 모든 것이 시의 소재가 된다. 

떠나는 이들의 글만 있는 게 아니다. 떠나는 이들을 바라보는 소회를 격정적으로 토로하고 있는 이 글도 한 번 보자. <접시꽃 당신>이란 서정시로 이름 높았던 도종환 의원의 글이다.

" 당을 떠나는 사람들은 그럴듯한 기자회견문을 국민 앞에 내밀지만 거기서 진지한 실존적 고민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탈당을 통해서 정치적 연명의 길을 찾으려는 것이야말로 낡은 정치이다. 그것이야 말로 낡은 진보, 진보적인 삶을 살았던 이들의 낡은 정치이다…진보의 크기는 헌신과 희생의 크기에 비례한다. 헌신과 희생, 약자에 대한 연민, 의로운 분노로 불의한 권력에 맞섰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젊은 날이 탈당의 군색한 변명을 찾고 있는 지금의 모습을 한없이 부끄러워 할 것이다…그대를 태우러 달려올 열차를 기다리지 말고 ,이제 그만 구차한 정치의 열차에서 내리시길 바란다"  

떠나기로 한 사람이든 남기로 한 사람이든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고뇌 끝에 내린 결단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된다.

또 한 번 금배지를 달기 위한 정치적 셈법일 뿐이라고 어려운 결단을 쉽게 단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목숨을 건 결단이다.그런 결단이 어찌 가볍게 이루어졌을 것인가.

명색이 정치인이다. 나라와 민족, 우리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절절한 고민이 담긴 글이 가슴이 아닌 손끝에서 나왔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다만 이런 아쉬움은 있다. 당을 떠나는 마당에 쓰는 글이라면 앞날에 대한 각오와 다짐도 물론 있어야겠지만, 지난 날에 대한 반성과 회한도 무게있게 담겨야 한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행동이 적지 않은 국민들에게 희망보다는 절망을 안겨주는 일이라면 시늉만이 아닌 제대로 격을 갖춘 정중한 사과는 지지자들에 대한 당연한 예의다. 

그런데 떠나는 사람들의 글을 몇 번 고쳐 읽어봐도 반성과 사과보다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각오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글은 화려하고 잘 읽히는데 울림이 적다고 느끼는 것은 필자뿐일까? 그래서 유명 소설가나 시인의 글보다는 80대 노정객의 이 글이 오히려 더 와닿는다.  

"저는 오늘 참담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60여년 정치인생 처음으로 몸 담았던 당을 스스로 떠나려고 합니다. 우리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로 쟁취한 민주주의를 지키고 정권 교체를 준비해야할 야당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분열을 막아보려고 혼신의 힘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올해 87살인 권노갑 고문의 이 고별사 가운데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저에게는 없습니다"라는 고백은 밑줄 치고 싶은 문장이다. 정치인에게 좀처럼 듣기 어려운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에 문장가가 없고 웅변가가 없어 3류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지금의 야당은 말이다.

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정치인들의 말이 난무하고 글이 흐드러질 거다. 사람을 속이지 않는 말과 글을 가려내는 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