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러드가 귀국한 뒤 코넬대에 기증한 사진 및 기록물들이 110년만에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일부 기록물들은 이미 공개된 바 있긴 합니다만, 이번에 서울 역사박물관의 조사를 통해 스트레이트가 남긴 기록물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게 됐습니다.
기록물 가운데 미국의 25,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의 한국 방문 사진들이 눈에 띕니다. 그녀의 방한 사진에는 기울고 있던 대한제국의 아픈 역사가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앨리스는 아름다운 외모와 활달한 성품으로 워싱턴 사교계의 ‘공주’로 불리며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여성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속내는 달랐습니다. 이미 두 달 전인 1905년 7월 말 미국은 일본과 태프트-가쓰라 비밀협약을 맺고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해 줬습니다. 그 대가로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권한을 인정받습니다.
미국측 문서를 통해서도 루스벨트 대통령이 당시 얼마나 일본에 경도돼 있었는지 잘 드러납니다. 앨리스가 부산을 통해 출국한 뒤 불과 두 달 후에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는 등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됩니다. 고종으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미국 대통령 딸에게 매달렸지만, 당시 국제정세를 알지 못했던 외교적 오판으로 기록됐습니다.
그렇다면 앨리스 루즈벨트는 왜 조선에 왔을까요? 전문가들은 당시 앨리스 루스벨트의 방한이 고종의 바람과는 달리 외교적 목적의 방문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외유였을 거라고 분석합니다. 당시 앨리스 일행은 모두 18명이었으며, 뉴랜즈 상원의원 부부, 롱워스 하원의원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이중 롱워스 의원은 앨리스와 연인 관계로 이듬해인 1906년 2월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실제로 사진 자료들을 봐도 이 방문의 성격이 외유였음이 드러납니다. 한미간의 특별한 공식 행사 사진은 거의 없고 일행들끼리 찍은 가벼운 관광 사진이 대부분입니다. 특히 앨리스는 워싱턴 사교계의 공주라고 불릴만큼 빼어난 미모와 활달한 성품을 드러내며 연인인 롱워스 뿐 아니라 여러 사람과 팔짱을 낀 채 자유분방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앨리스의 방한에 관한 뒷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녀의 자유분방함은 국제적인 논란으로까지 비화되기도 했습니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앨리스 일행은 청량리에 있는 홍릉을 방문했는데, 능 앞에 있는 석마(石馬)에 올라타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앨리스 일행중 남성 2명 역시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홍릉은 이들의 방문 10년 전인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 자객들의 손에 시해당해 묻힌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앨리스가 홍릉을 방문했을 때 또다른 외국인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한제국 황실의 외교전례를 담당했던 독일여성 엠마 크뢰벨입니다. 크뢰벨은 4년 뒤 자신의 저술인 <나는 어떻게 조선황실에 오게 되었나>(1909)에서 앨리스의 행동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크뢰벨의 책이 출판된 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 언론에까지 보도됐습니다. 뉴욕타임즈는 1909년 11월 17일자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크뢰벨은 자신의 책에서 앨리스의 행동이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무례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이 보도가 나간 다음날 롱워스 의원은 방한 당시 그런 행동을 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며 크뢰벨을 비난하는 내용의 인터뷰를 합니다. 하지만 훗날 코넬대에서 스트레이트 부영사가 찍은 사진들이 발견됨으로써 크뢰벨의 말이 사실로 드러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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