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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정의화는 제2의 이만섭이 될 수 있을까

[취재파일] 정의화는 제2의 이만섭이 될 수 있을까
● "삼권분립 흔들린다"… 뼈있는 정의화 국회의장의 영결사

어제(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엄수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영결식에서 가장 비통해 보였던 인물은 정의화 국회의장이었습니다. 이미 지난 14일 별세 소식을 접하고 일정을 전면 중단하고 한달음에 빈소를 찾았을 정도로 고인과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영결사를 낭독하면서 정 의장은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 못 하고 목이 메어 흐름이 잠시 끊어지기도 했습니다. 영결사는 고인을 추모하는 내용이기도 했지만, 현 정치 상황에 관한 뼈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정의화 의장은 "(이만섭) 의장님의 투철한 신념과 원칙으로 어렵게 지켜내신 의회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 흔들리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의장님의 빈자리가 더욱 커 보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청와대와 여당이 선거구 획정은 물론 경제, 노동 관련 쟁점법안을 직권상정해달라고 입법부 수장에게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영결사를 통해 정 의장은 이런 상황을 의회민주주의와 삼권 분립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 "대통령이 되니까 그렇게 날치기를 좋아하느냐?"…YS에 항명한 이만섭

故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거침없는 강골 정치인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대해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히고,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위세 당당했던 이후락 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퇴진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전 의장의 이런 소신 행보는 국회의장이 돼서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1993년 14대 국회의장에 취임하면서 자신의 방에 기자들을 불러 모아놓고는 "날치기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국회 파행의 원인이 되는 날치기를 하기보다는 대화와 타협으로 국회를 정상화시키겠다는 대국민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이만섭 전 의장이 시험대에 오른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습니다. 1993년 연말 예산안 처리를 하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청와대로 이 전 의장을 불렀습니다. 같이 국수를 먹으면서 "예산안을 통과시키면서 안기부법, 통신비밀 보호법, 정당법 세 개를 꼭 같이 통과시켜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이 전 의장이 "무리할 필요 없다"며 난색을 표하자, 김영삼 전 대통령도 끈질기게 설득을 했습니다. 계속된 설득을 압박으로 받아들인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돌직구에 가까운 반발을 했습니다. 국회 도서관이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그의 구술기록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 이만섭 전 국회의장 구술 기록
= 아니 "대통령께서는 옛날에 야당총재 할 때는, 여당이 날치기하는 것 극구 반대하고 이러다가 왜 대통령 되니까 그렇게 날치기를 좋아하느냐?"고 내가이랬더니 말이야 화를 내면서 "과거에는 대통령이 군인 대통령이니까 안 되지마는 나는 문민 대통령이니까 법을 지켜야 한다.”고 “꼭 해야 한다.”고. 그래서 “내 노력은 해보겠다.”고 “그러나 그때 가서 내가 수시로 연락을 드리지요.” 그러고 내가 약속을 안 했어. 그래 내가 차 타고 오면서 굉장히 우울했다고.

 이 전 의장의 고집을 꺾지 못하자 결국 황낙주 부의장에게 사회권을 넘기는 것으로 정리됐습니다. 하지만 이 전 의장이 공개적으로 사회권을 넘겨 황 부의장은 야당의 공적이 됐고, 결국 야당 의원에게 중요 부위를 공격당한 부의장이 사회를 제대로 못 보는 헌정 사상 초유의 '날치기 미수'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대통령의 노여움을 산 이 전 의장은 전반기 의장을 끝으로 국회의장에서 내려와야 했습니다. 

● "대통령은 국회 문제에 간섭하지 마십시오"…DJ 전화 끊어버린 이만섭
이만섭 전 국회의장
 두 번째 소신 행보는 두 번째 국회의장에 오른 지난 2000년, 16대 국회 때 보여줬습니다. DJP 연합을 통해 집권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교섭단체 구성을 하기에는 의원 수가 적었던 자민련을 위해 국회법을 고치려 했습니다. 소속 의원 20명으로 규정돼 있는 교섭단체 구성 요건을 완화해 10명이면 가능하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법까지 마음대로 고친다는 비판을 받을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주도권이 워낙 중요한 만큼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만섭 의장을 통해 이 법만은 통과시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 이만섭 전 국회 의장 구술 기록
공관에서 아침에 아침 먹고 있는데 전화가 왔어. 김대중 대통령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 의장, 날치기 안 하는 거는 좋은데 다수결로 결국 결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 내가 “그러나 무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랬더니 “그러나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닙니까?” 그래 내가 “민주주의가 다수결의 원칙이란 거는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압니다. 그러나 이거는 근본적으로 국민이  이해할 수 없는, 이런 무리한 법을 만드니까 이건 다수로 밀어붙이면 안 됩니다.” 이랬더니 “그래도 그 길밖에 없지 않으냐.”고. 그래 내가 은근히 화가 나서 “대통령은 국회 문제에 간섭하지 마십시오. 국회 문제는 국회의장한테 맡기십시오.” 그렇게 전화 끊었다고. 그러니까 와이에스(YS)나 디제이(DJ)나 나한테는 굉장히 버겁고 만만치 않고 어려웠다고요.

 이만섭 전 의장이 스스로 밝힌 것처럼 대통령을 상대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버겁고 어려운 일임이 분명합니다. 최고 권력자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국회 일 간섭하지 말라"고 일갈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리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런 소신 있는 행동으로 당시 이 전 의장은 대중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도 친정에서 터져 나오는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당에서도 이만섭 의장은 '영원한 스타일리스트', '자기 정치의 화신'이라는 뒷말이 따라다녔습니다. 정치적 기반 없이 자주 당적을 옮긴 것을 만회하기 위해 날치기를 막고, 원칙을 지킨다는 이미지에 집착한다는 비아냥거림까지 나왔습니다. 이만섭 전 의장은 생전 이런 비난에 대해 "내가 우물쭈물 현실에 붙어서 살아야겠다고 했다면 장관 한두 번 하고 정치 생명이 끝났을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정치적인 유불리를 떠나 입법권을 사수하겠다는 사명감의 발로였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만섭 전 의장에 대한 친정 의원들의 평가는 정의화 국회의장에 대한 새누리당 의원들의 평가와 놀랄 만큼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정 의장에 대해서도 새누리당 의원들의 평가는 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여당이 경색된 국면을 돌파하려고 하는데, 친정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자기 정치만 하려 한다는 비난과 원망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 "姓을 갈겠다"는 정의화 국회의장…직권상정 '배수의 진'

 쟁점 법안 처리를 놓고 대단히 이례적으로 박근혜 대통령과 정의화 국회의장의 기 싸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만섭 전 의장이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겁니다. 정 의장의 대처 방식도 이만섭 전 국회의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 의장은 이미 기자회견을 통해 "쟁점법안의 직권 상정은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해 직권 상정이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습니다. 입법부 수장이 법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그제(17일)는 더 수위를 올려서 "국회법이 바뀌지 않는 한 내 생각은 변할 수 없다"며 "성을 바꾸든지 해야 생각이 바뀔 것"이라는 취지로 답했습니다. 정의화 의장은 과거 기자간담회를 할 때도 농담과 자랑을 섞어 자신의 이름에 '정의'가 들어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성을 간다는 의미는 자신이 직권 상정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는 무언의 항변을 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정 의장은 '배수의 진'을 치고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도 쟁점법안에 대한 통과 필요성을 점점 높은 수위로 말하고 있습니다. 국회가 국민이 바라는 일 제쳐놓고 무슨 정치개혁이냐고 지적했고, 어제는 "법안 처리가 안 돼 속이 타고, 걱정에 잠을 못 잔다"라고 개인적인 소회를 솔직히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쟁점 법안이 꼭 통과돼야 한다는 절실함을 표현한 말이겠지만, 국회의원들이 듣기에는 여간 부담스러운 말이 아닐 겁니다. 특히 직권 상정만 해주면 일이 해결되는데, 대통령과 맞서고 있는 정의화 국회의장 처지에서도 심리적인 압박을 느낄만합니다. 
국회의장 공관에 모인 여야 대표들

 그제(17일) 정의화 국회의장은 자신의 생일을 맞아 여야 대표와 원내대표를 자신의 공관에 초대해 비공개 만찬을 열기도 했습니다. 선거구 획정은 물론 쟁점 법안에 대해서 논의가 오간 자리였고, 의견을 조금씩 좁혀가는 중이라는 얘기도 들립니다. 국회의장이 이토록 여야의 협상에 직접 개입해 하나 하나 현안에 대해서 논의하는 모습은 극히 이례적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난국을 풀어가야 합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해가 가면 선거 전까지는 쟁점 법안을 처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집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을 추모하며 의회민주주의와 삼권 분립의 위기를 말했던 정의화 국회의장은 앞으로 어떤 국회의장으로 기억될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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