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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창고에서 탄생한 신데렐라…그녀 이름은 최혜정

[취재파일] 창고에서 탄생한 신데렐라…그녀 이름은 최혜정
손으로 뭐든지 뚝딱 만들어내는 '맥가이버' 같은 손 재주를 가진 한 남자가 있었다. 자신의 사업장 사무실 옆 창고 바닥에 인조 잔디를 깔고 벽면에 큰 그물을 걸어 '자가용' 미니 골프연습장을 만들었다. 그 남자에겐  11살된 초등학교 5학년 딸이 있었다. 딸은 자타가 공인하는 '운동치'였다.

학교에서 달리기를 하면 늘 꼴찌를 했고 몸으로, 특히 손으로 하는 운동엔 영 소질이 없었다. 그렇게 운동을 멀리하고 싫어했던 딸이 아빠가 만든 미니 골프연습장에 흥미를 보였다. 장난삼아 아빠의 중고채를 휘둘러 보았다.  8번 아이언이었다. 공이 제대로 맞을 리 없었다. 그래도 그냥 놀이라고 생각하고 계속 휘둘렀다.

손가락이 까지고 허리가 아파서 놀이를 그만두려 하자 아빠가 계속 하라고 했다. 딸에게 아빠는 하늘이었다. 아빠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채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이젠 '놀이'가 아니라 '고역'이었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났다. 지켜만보던 아빠가 돌직구를 날렸다. "그걸 치는거라고 치냐? 일주일이나 휘두르고도 공을 그렇게 못맞혀?" 아빠의 큰 목소리에 딸은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 "잘 맞혀보면 될거 아냐!" 홧김에 이를 악물고 공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순간 아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그거야! 한번 더!" 신기하게 공이 똑바로 맞아 나갔다.

그렇게 골프를 시작한지 13년 만에 '운동치'였던 그 소녀는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무대에서 쟁쟁한 스타들을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지난 15일 KLPGA 시즌 최종전 조선일보 포스코챔피언십에서 프로 데뷔 6년만에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 '늦깎이 신인' 최혜정 선수(24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최혜정이 15일 경기도 용인시 레이크사이드CC에서 열린 KLPGA 투어 조선일보·포스코 챔피언십 마지막 날 3라운드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아버지와 포옹하며 경기장 밖으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연합)
최혜정은 아버지에게 골프를 배웠다. 지금도 아버지가 스윙을 봐주고 잘못된 점을 지적해준다. 특이한 건 아버지의 골프 실력이 '보기 플레이어' 수준도 안된다는 사실이다. 독학으로 골프를 익힌 아버지는 딸을 레슨 프로에게 보내는 걸 싫어한다.

초창기에 몇번 보내봤더니 선생님마다 가르치는 방법도, 스윙에 대한 분석도 다 다르고 제각각이어서 혼란만 가중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고집과 신념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최혜정은 이따금 아버지 몰래 레슨 프로들을 찾아가 원포인트 레슨을 받으면서 여기까지 왔다.

최혜정은 고 3때인 2009년, 18살에 프로에 데뷔해 6년동안 2부투어만 뛰었다. 1부투어 시드전에서 5번이나 고배를 마셨고 6번째 도전 끝에 올해 처음 1부투어에 올라와 시즌 마지막 대회에서 우승까지 차지하며 새로운 신데렐라로 이름을 알렸다.

그녀는 자신의 짧은 골프 인생을 돌아보며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애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골프를 시작한 2002년부터 발목 수술로 골프를 중단했던 2011년까지는 제가 좋아서 골프를 친 게 아니었어요. 그저 아빠가 시키니까 당연히 해야하는 걸로 받아들이고 기계적으로 쳤죠. 아빠랑 무지 많이 싸우기도 했어요."

"잠깐 성적이 날 때도 있었지만 골프에 크게 재미를 못느꼈어요. 그러다가 제 가슴을 뛰게 하는 '터닝포인트' 가 하나 있었죠.  2011년 가을이었어요. 당시 저는 발목 수술 이후 6개월간 완전히 골프를 떠나 있었어요. 중계방송도 안봤죠. 중계방송 보면 속상하고 열 받으니까."

"김자영,이정민, 조윤지,양수진,김지현 이런 제 동기들이 우승하고 잘 나갈 때였으니까 제가 상대적으로 아주 초라해 보였죠. 하루는 아는 오빠가 휴대폰으로 여자골프 중계방송을 보고 있길래 무심코 같이 봤는데 점점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뛰기 시작했어요."

"어떤 선수가 수많은 갤러리에 둘러싸여서 5미터짜리 우승 버디 퍼팅을 넣고 환호하는 장면이었는데, 피가 뜨거워지고  저 자리에 나도 서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순간 깨달았죠. 아, 내가 골프를 정말 사랑하고 있었구나! 그 때부터 저는 골프를 대하는 마음과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아빠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스스로 찾아가 연습하고 골프를 즐기기 시작했죠."
최혜정이 15일 경기도 용인시 레이크사이드CC에서 열린 KLPGA 투어 조선일보·포스코 챔피언십 마지막 날 3라운드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연합)
큰 무대에서 첫 우승을 하고 그동안 의류 지원은 물론 메인스폰서도 없던 그녀에게 요즘 하루 수십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모두 후원을 해주겠다며 조건을 타진하는 전화들이라 선택을 놓고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상금랭킹 21위로 2015 시즌을 마친 최혜정의 내년 시즌 목표는 거창하다. "첫 우승의 물꼬를 텄으니 내년엔 상금왕을 목표로 도전해야죠. 이제 시드 걱정은 안해도 되고 체력만큼은 자신있으니 내년 시즌 지켜봐 주세요."

최혜정은 다음달 중 후원 계약을 마무리한 뒤 연말에 두바이로 전지훈련을 떠날 예정이다. 더 단단해져서 돌아올 그녀의 2016시즌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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