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인이자 법무장관을 지낸 로버트 케네디의 말입니다.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다 보면, 케네디 말처럼 사회 각 분야에서 ‘이상을 위해 혹은 타인의 운명을 향상시키기 위해 자그마한 물결을 일으키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런 분들 얘기에 귀 기울이고, 그 자그마한 ‘물결’이 ‘조류’가 되도록 돕는 게 저희 기자의 역할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번에 만난 두 사람(심용석 22·인천대 중어중국학과, 백덕열 22·경희대 체육학과)도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자그마한 물결을 만들고 있는 대학생들이었습니다. 독도경비대 출신인 두 사람은 ‘위안부 문제’를 알리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미국 대륙횡단에 나섰습니다. 이름 하여, ‘AAA(트리플 A) 프로젝트’.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 동원한 사실을 인정(Admit)하고, 이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Apologize)하고, 그리고 이 문제를 알리는 데 동참(Accompany)해달라는 뜻입니다.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에서 라스베이거스, 애리조나, 텍사스, 캔자스, 미주리, 일리노이를 거쳐 동부 뉴욕까지 6천여km 거리를 이들은 위안부 할머니 문제를 알리기 위해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미국 일본대사관 앞에서 직접 ‘위안부 할머니 수요 집회’도 개최하고, 미국 시민과 언론인들에게 위안부 문제에 대해 마음을 다해 알렸습니다. 두 사람에게 위안부 할머니란 어떤 의미일까요? 그들의 얘길 들어봤습니다.
● "마치 역사의 한순간을 잡은 느낌이었어요.“
-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 예전에 우연히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녀이야기’란 10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어요. 15살 꽃 같은 어린 나이에 일본군에 끌려간 ‘정서운 할머니’의 실제 삶을 토대로 만든 영화였어요. 그 영화를 보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사람의 인권 특히, 어린 소녀의 삶을 저렇게 망가트려 놓고도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는 데 분노했어요. 사실, 이전엔 위안부 문제가 이렇게 심각한지 몰랐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이 문제를 세상에 더 알려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됐어요.
-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생각했나요?
=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서 인사드리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관련 단체에 연락해 이귀녀 할머니를 찾아뵙고 인사드렸어요. 할머니를 뵙기 전에 “할머니들이 과거의 상처 때문에 가까이서 몸을 만지는 걸 두려워하신다."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걱정이 하면서 쭈뼛거렸는데, 할머니께서 먼저 저희를 보자마자 손을 꽉 잡아주더라고요. 아, 전 그 순간을 잊지 못해요. 이건 손을 잡는 게 아니라 마치 ‘역사의 한순간’을 잡는 느낌이었어요. 그때부터 ‘수요시위’에 참여하고, ‘나눔의 집’도 방문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 그렇다고 자전거로 미국 횡단을 계획한 건 특이한데요?
= 사실, 몇 년 전에 자전거로 미국을 횡단한 사람 이야길 읽은 적이 있거든요. 할머니를 만나고 그때 읽었던 책이 생각났어요. 차를 타고 다니면 목적지까지 빨리 이동할 순 있어도, 중간에 사람들을 만나질 못하잖아요. 반면, 자전거를 타면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그만큼 위안부 할머니 문제를 더 잘 알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또, 내 몸의 동력으로 가는 자전거를 타면서 자신도 돌아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 첫 번째 A는 ‘Admit 인정하라’, 일본군이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인정하란 뜻이고요, 두 번째 A는 ‘Apologize 사과하라’,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라, 세 번째 ‘Accompany 동행’이란 뜻인데요, 저희 프로젝트를 보신 많은 분들은 저희와 뜻을 함께해주시길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미국 프로야구 마이너리그에서 ‘트리플A’는 제일 높은 단계거든요, 우리가 좀 더 노력해서 아직 ‘마이너리그’에 있는 위안부 문제를 ‘메이저리그’, 세상 사람들이 더 많이 관심 가지는 이슈로 끌어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도 있어요.
- 미국을 목적지로 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 아무래도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패권 국가잖아요. 우리나라뿐 아니라 위안부 피해를 겪은 국가에게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작 위안부 문제가 불거졌을 때, 미국은 정치, 외교적 판단을 거치며 소극적일 때가 있더라고요. 이건 국익이나 정치, 외교적으로 풀 수 없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인권’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점에서 미국에 이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 비용 마련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 네, 비용을 마련하려고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어요. 꽃다발을 만들어 졸업식에 팔고,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물건을 옮기는 아르바이트 해서 비행기 삯을 마련했어요. 또, 문화단체와모교 교수님들도 십시일반으로 보태줘서 큰 힘이 됐어요. 스포츠용품 회사와 자전거 회도 취지에 공감하고 자전거와 고글 같은 용품도 후원해줬습니다.
- 미국에선 주로 어떤 도시를 다녔나요?
= 일본 대사관, 영사관이 있는 주요 도시를 주요 동선을 정했어요. 서부 로스앤젤레스에서 출발해서 시카고, 워싱턴DC, 뉴욕 이렇게 주요 도시 4곳을 중심으로 다녔어요. 방학 동안 진행한 거라 80일 안에 모든 일정을 마쳐야 해서 시간이 부족했는데, 앞서 얘기한 주요 도시에선 며칠씩 체류하면서 위안부 할머니 피해를 알리는 행사에 참석하고 언론 인터뷰도 하면서 활동했어요.
= 미국에 도착하고, 최소한 하루에 한 명 이상에게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알리자고 다짐했어요. 그래서 저희가 직접 미국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개최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해를 담은 연설문도 발표했어요. 전단도 나눠주면서, 이건 정치나 외교의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인권 침해의 문제라고 얘기했어요.
또, 이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이나 동남아 다른 국가에서도 발생했고, 이에 대해 일본이 진심을 담아 사과해야 한다고도 말했어요. 이 문제 대해 미국인들이 어떻게 행동해달라는 게 아니라, 이런 비극적인 역사가 있었다는 것만 알아달라고. 그렇게 알고 기억해야,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강조했어요. 다행히 현지 언론에서도 관심을 많이 가져줘서 각 지역 방송사나 신문사에 직접 가서 인터뷰도 하고, 뉴욕에선 수요집회 때 낭독했던 연설문을 일본대사관에 전달하기도 했어요.
- 미국에서 수요집회를 직접 진행했다고 했는데, 현장 분위기는 어땠어요?
= 미국 시민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거의 모르더라고요. 시카고에서 집회할 때 길거리에서 성명서 나눠주는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심지어 이상한 사람 취급하더라고요.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아느냐고 물어보면, 10명 가운데 8명은 처음 듣는 얘기라고 했어요. 알고 있다고 답한 2명 중 1명도 그저 들어보기만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꾸준히 설명하고 얘기하니, 많은 미국인들이 이 문제에 대해 공감해줬어요. 이 문제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당신이 느낀 점을 SNS에 써서 당신 주변 사람들과도 공유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실제로 많은 미국인이 현장에서 바로 글을 써서 올려도 주더라고요. 또, 언론인들도 인터뷰하면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냐?”라며 되묻고, 일본이 어떻게 사과도 제대로 안 할 수 있느냐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도 보여줬어요.
= 필라델피아에 갔을 때인데요, 숙소에 묵으려는데 돈이 부족했어요. 그래서 주인한테 돈을 좀 깎아달라고 말했는데, 안 깎아주는 거예요. 그 모습을 옆에선 아주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위안부 피해를 알리기 위해 LA에서 자전거 왔다고 설명하니, 아주머니가 갑자기 우시더라고요.
알고 보니, 아주머니가 14살 때 성폭행을 당했더라고요.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을 위로해줘서 고맙다며 10달러를 보태주셨어요. 또,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의 인권이 발전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이렇게 상처가 큰 분들에게 조금이나 마음의 위안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 80일 동안 미국을 횡단하면서 일화도 많았을 거 같은데요?
= LA에 도착한 첫날부터 문제가 생겼어요. 들고 다니면 가방을 도둑맞아서 여권과 돈, 소지품을 많이 잃어버린 거예요. 총영사관 가서 여권을 재발급 받고, 돈이나 소지품은 현지에 계신 위안부 단체 분들이 도와주시긴 했는데요, 참 그땐 힘들었어요.
또, 저희가 주로 고속도로 옆길을 따라 달렸는데, 자전거 타이어가 18번이나 터졌어요. 일반도로는 청소가 잘 돼 있는데 고속도로는 주변에 유리조각이나 철 조각 등이 많이 있어서 펑크가 많이 났어요. 한국에서 자전거 수리하고 정비하는 걸 배우긴 했는데,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니 참 난감하더라고요. 자전거 타다가 넘어지고, 라면 끓이다 냄비가 넘어져 화상도 입고 나름 고생은 많이 했습니다.
- 일정을 마무리하면서 무엇을 느꼈나요?
= 제일 큰 수확은 좋은 취지의 일을 하면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이전에는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잘 살까를 고민했는데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함께’ 잘 살 수 있을까, 미약하나마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나만 생각하기보다 주변을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거 같아서 기쁘게 생각해요.
- 끝으로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 공부를 많이 하고 싶어요. 단순히 학점을 잘 받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이번 프로젝트를 경험하며 제가 얼마나 부족한지 많이 느꼈어요. 당장 영어 실력이 부족하니 제가 하고 싶은 말도 다 전달하지 못했고요, 그래서 어학 공부도 열심히 하려고 생각하고 있고요, 역사나 문화와 같은 배경지식도 참 많이 부족하단 걸 느꼈어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싶어요.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부족하나마 제가 경험하고 느꼈던 것들을 책으로 써서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요.
그리고 내년에도 미국 횡단을 다시 가보려고 해요. 그때는 중국이나 동남아 등 위안부 피해를 겪는 다른 나라 지원자들, 또 이 문제에 대해 공감하고 있는 일본인, 미국인들과 함께 릴레이식으로 도시마다 이어서 캠페인을 진행하고 싶어요. 저희로 인해서 조금이라 세상이 바뀐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거 같아요.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아프고 힘없어 나약한 이들을 돌보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 스스로 "미쳤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인터뷰를 마치고, 전 히브리인 사이에 전해오는 이야기 한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한 나라에서 추수했는데, 그 곡식을 먹기만 하면 사람들이 미쳐 버렸습니다. 임금이 신하들을 불러 놓고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곡식을 먹는 사람마다 미쳐가니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달리 먹을 것도 없으니 고민입니다.”
오랜 의논 끝에, 그들은 곡식을 그냥 먹기로 했습니다. 굶어 죽는 거보다 미쳐서라도 사는 게 낫다는 판단에 섭니다. 그 대신, 신하 한 명을 정해 “우리는 지금 미쳤다.”라고 끊임없이 백성에게 일러주는 일을 맡겼습니다. 우리 지금 미쳐 있단 걸 스스로 알고 있으면, 언제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올 날이 있지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라고 해도, 적어도 스스로 ‘미쳤다.’라고 외칠 수 있는, 자기 내면의 한 부분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남겨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두 학생이 일본에 전하는 메시지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