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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헬-학교'의 비극…"일상적 성추행, 괴기영화 세트장 같았다"

"학교가 지옥 같았다", '헬-학교'를 외치는 학생과 교사들이 있습니다.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병폐들, 10대 때는 입시지옥, 20대는 취업지옥, 그 지난한 터널을 지나와도 30대엔 '을'이라서 치이고 '약자'라서 치이며, 치여도 '악' 소리 내지 말고 꾹 참아야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무력감. 요즘 회자되는 '헬조선'이란 말이 담고 있는 한국 사회의 병폐, 세대간 갈등이 고스란히 한 고등학교 안에서 폭발했습니다.



서울의 한 공립 고등학교에서 지난 2년간 50대 남자교사 5명이 제자인 10대 여학생들과 20대 초임 여교사들을 지속적으로 성추행, 성희롱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피해 교사들과 피해 여학생들은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상적 성추행 때문에 학교가 마치 괴기 영화 세트장 같이 공포스러운 곳이었다"고 얘기합니다.

● 입시지옥
'헬-학교'의 비극은 입시지옥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었습니다. 이 학교 50대 진학부장 B교사는 교육계에서는 유명한 '입시 전문가'입니다.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진학설명회 대표 강사이기도 합니다. B교사는 대학 입시를 위해서라며 '특별반'을 만들어 성적이 좋은 학생들을 별도로 관리했고, 수시로 입시상담을 했습니다. 이 특별반 학생들이 주로 성추행 대상이 됐다고 합니다. 

참다 못한 학부모들이 지난 2월 B교사를 경찰에 고발했습니다. 학생과 학부모들은 "B교사가 자기 말을 안 들으면 대학 진학에 불이익이 있을 것처럼 하니까 사실을 알리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사건을 처리해야 할 교장은 입시전문가 B교사 징계에 미온적이었다고 합니다. 해당 학교 성추행 피해 교사들은 교장의 태도에는 "입시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어서라고 얘기합니다. 교장은 사건이 불거지자  '대학진학'과 '입시'란 명목으로 B교사가 여학생들을 '만진' 것 쯤은 묻어두자는 식으로 대처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장은 B교사가 경찰 조사를 받고 있는데도 올해 1학기 3학년 담임에, 학년 부장까지 시켰다"는 겁니다.

교장이 이렇게 B교사 사건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다 보니, B교사는 학생들과 격리를 위한 직위해제 기간에도 동호회 활동을 이유로 학교를 버젓이 드나들었고, "학교에서 파티까지 했다"는 겁니다. 학생들은 B교사가 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있는 데서, 다른 어른들과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는 그 파티를 보며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 [단독] '성추행' 직위해제 교사, 학교서 파티

● 취업지옥
이 학교의 비극은 취업지옥 문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 학교 가해교사들의 '더러운 손'은 여학생 제자들 뿐 아니라 동료 여교사들에게도 큰 상처를 줬는데요. 주로 이 학교가 첫 부임지인 20대 초임 여교사들이나 신분이 불안정한 기간제 교사들이 피해 대상이었던 걸로 조사됐습니다.

요즘 같은 취업지옥 시대에, 그 어렵다는 임용고사에 합격해 첫 발을 내 딛은 곳이 이 학교인 20대 초임 여교사들, 그리고 이 초임 여교사들처럼 언젠가는 정교사가 되는 날을 꿈꾸며 비정규직의 불안한 하루 하루를 보냈을 기간제 여교사들. 취업 지옥의 힘겨움이 끝나기도 전에 '헬-학교'의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교장을 비롯한 간부 교사들에게 '싫다, 하지 마라, 신고하겠다' 아무 문제제기도 할 수 없는 신분상 '취업 약자'들이어서, 1년이 넘는 기간 지옥같은 생활을 해야만 했던 겁니다.

교장은 지난 해 1학기 초쯤 신임 여교사 회식 자리에서 20대 여교사 몇명의 신체를 만지거나 신체 사이즈를 묻는 등 추태를 보였던 걸로 교육청 특별감사에 조사됐습니다. 교장 본인이 이렇다 보니 이후 1년이 넘게 학교에서 벌어진 여학생 성추행 사건에 미온적일 수 밖에 없었다는 교사들의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입니다. 가해 교사를 처벌해달라는 피해 여교사들의 주장에 "교장이 오히려 화를 내고 학교 밖에 발설하지 말라"며 사건을 축소 은폐한 정황도 조사됐습니다.

수업시간에 여학생들을 집단 상습 성희롱한 A 교사는 초임 여교사들이나 기간제 교사들에게도 노골적인 성희롱 발언이나 성추행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학교 안에서, 교실 앞 복도에서 지나가는 여교사 신체를 만지고 이런 일이 너무나 일상적으로 벌어졌다고 합니다. (A 교사는 여학생들을 '기생', '황진이', '춘향이'로 부르거나 '원조교재 하자'는 입에 담기도 민망한 말을 수업시간에 공공연하게 했던 걸로도 알려져 있는 바로 그 인물입니다.)
▶ 수업 중 교사 "원조교제 하자"…사건 일파만파

피해 여교사들의 동료 교사는 "젊은 여교사들은 이런 일을 겪으며 너무 수치스럽고 혐오감이 들어서, 그리고 보복 당할까봐 두려워 학교 안에서 가해 교사들을 피해 도망다녀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여교사들이 모여 교장실에 들어가서 '학교가 괴기영화 세트장도 아니고 이렇게 살아야 하냐'고 항의하고 가해 교사 격리 조치를 요구"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 '갑-을' 지옥
지금까지 언론에 밝혀진 '헬-학교' 비극의 근원은 '갑-을' 관계의 부조리에서 시작됐습니다. 가해교사로 지목된 5명의 남교사 중에서 교장을 포함한 4명이 이 학교의 개설요원, 이른바 '개국 공신'입니다.  

문제의 학교는 개교한지 2년 반쯤 된 신생 학교입니다. 개교 준비 단계부터 함께 했던 이들이 "내가 이 학교를 세웠다"는 식으로 권력을 사유화했다는 얘기가 학교 안팎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이 지역 유일한 공립고교인 이 학교가, '개국 공신들' 때문에 "마치 족벌 사립학교 설립되듯" 운영됐다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교장을 포함한 개설요원들과 개교 이후 학교에 온 선생님들 사이에 묘한 '갑-을 관계' 같은 것이 형성됐던 걸로 보입니다. 개교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인 지난 해 2월, 노래방 회식에서 동료 여교사의 옷이 뜯어질 정도로 심한 성추행을 했던 것으로 조사된 부장교사도, 학교 내에서 교장과 교감 다음인 '넘버3'에 해당하는 교무부장 자리에 있던 자입니다. '나는 갑, 너는 을' 이런 의식이 머릿속에 없었다면 애초 일어나기 어려운 범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후 피해 여교사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개국공신들이 의사결정을 주도해온 학교 분위기 속에서 해당 부장교사는 1년 넘게 휴가나 연가, 병가를 쓰면서 징계 없이, 아무 탈 없이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갈 수 있었고 그렇게 문제는 덮혔습니다. 설립요원들은 이렇게 서로 뒤를 봐주며 교내 성추문을 점점 키우게 됐다는 분석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개국공신 '갑'들은 주요 보직도 나눠가졌습니다. 성추문이 끊이질 않았던 학교에서, 교내 성 관련 전담기구인 '성고충처리위원회' 책임 교사도 '갑'의 몫이었습니다. 학교 개설요원 중 한명인 미술 부장 C교사가 성고충처리 책임자였는데, C교사 역시 미술실에서 여학생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했던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C교사는 지난 해에도 여학생 성추행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고, 이 사건으로 학교 남교사 전체가 성인지 교육을 받아야 했다"고 피해 여교사 모임은 전했습니다. 하지만 교장은 이런 C교사를 성고충처리위원회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개국공신들의 자리 나눠갖기, 의사결정 독점 때문에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성고충처리 책임자가 되고도 C교사는 올해 또 여학생들 몸에 손을 댄 혐의로 현재 경찰에 고발된 상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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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란한 10대 후반기, 상처뿐인 졸업생 되지 않도록"
학교란 무엇일까요. 학교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요. 미래 사회 인재를 키우고 전인적 교육으로 한 인간의 온전한 성장을 이뤄 내는 곳이 학교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학교는 너무나 병들어 있습니다. 입시란 미명에 찌들어 학생 인권은 뒷전이 된지 오래고, 교사와 학생들 간의 세대 갈등, 갑과 을 사이의 권력 관계에서 생기는 온갖 부조리들이 그대로 학교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란 얘기가 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학교에서 가장 약한 집단-학생, 초임 여교사, 기간제 교사-이 피해자들인 점을 보면 '사회 부조리의 축소판' 같단 생각이 듭니다. 

언론에 공개된 막장 교사들의 자극적인 '성희롱 어록'이나 사건의 선정성에 때문에 혹시나 간과하고 있는 건 없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금 가장 아프고 상처가 깊을 해당 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이들을 우리 사회가 따뜻하게 감싸 안아야 할 것입니다. 교육당국은 현재 직위해제된 교장을 대신해 교감 대행 체제로 사태를 해결 중이지만, 교장 연수를 받고 있는 교감이 대행하기엔 학교의 상처가 너무 커 보입니다.

현재 진상조사를 위한 특별감사와 경찰 조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이 학교를 혁신학교든 특별학교든 특정 행정적 지위를 부여하고, 인품과 명망을 갖춘 인사를 학교에 보내 학교 정상화 조치를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곧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고 2학기 수시모집도 있고 수능 시험도 보면서 무심한 듯 학사 일정이 흘러가는 동안, 3학년 학생들은 이 학교의 첫 졸업생이 되어 사회로 나가게 됩니다. 해당 학교 학생들이 인생의 찬란한 10대 후반기에, 이런 큰 생채기를 마음에 안은 채 상처뿐인 졸업생이 되지 않도록 교육당국의 세심한 대책 마련이 절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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